•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1. 조선시대 벼농사의 추이
  • 15∼17세기
이정철

조선 전기에도 양반들의 주식은 쌀이었고, 국가가 세금을 거둘 때도 주로 쌀로 거두었다는 점에서 쌀은 매우 중요하였다. 하지만 쌀은 조선에서 17세기 후반까지도 일반 백성들의 주식은 아니었다. 또 여러 농업 생산물 중에서 양적으로 지배적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쌀과 벼농사가 양적으로도 농업의 중심이었을 것이라는 일반의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 전기의 벼농사 상황은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1429)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은 농업을 국가 정책으로 앞세운 나라였다. 『농사직설』은 그런 조선이 국가 시책으로 펴낸 책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그 편찬 방식에 있다. 이 책 서문에 분명히 밝혀 놓은 것처럼 정부는 단순히 학자들을 모아 중국 책을 참고해 펴내는 방식을 쓰지 않았다. 정부는 철저히 시골의 ‘노농(老農)’들에게 물어서 수집한 내용만을 책에 포함시켰다. 정부는 단지 그것들을 편집하였을 뿐이다. ‘노농’이란 시골에서 평생 농사일에 종사해서 전문가 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요컨대 『농사직설』은 철저하게 15세기 초 조선의 농업 상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농사직설』에는 벼농사에 대한 항목이 실려 있다. 그 속에 파종법(播種法), 즉 씨뿌리기에 관한 항목이 있는데, 두 가지 방식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앙법(移秧法) 즉 모내기법이고, 다른 하나는 직파법(直播法)이다. 15세기 초만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오늘날 동남아시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방식이 모내기법과 함께 사용되었다. 주목할 것은 『농사직설』에는 모내기법과 직파법에 알맞은 경작지(耕作地) 유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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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
『농사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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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에서 직파법에 알맞은 경작지로 제시된 곳은 “연수원비고수전(連水源肥膏水田)”175)『농사직설(農事直說)』 종도(種稻).이고, 모내기에 알맞은 경작지로 제시된 곳은 “수우한불건처(雖遇旱不乾處)”176)『농사직설』 종도.이다. 즉, 이 책은 직파에 적당한 경작지로 ‘수원(水源)에 닿아 있고 비옥한 논’을, 모내기에 적당한 경작지로 ‘비록 가물 때에도 마르지 않는 곳’을 제시하였다. 이런 지역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할까? 한반도 지형과 15세기 당시 수리 기술 및 설비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직파법의 경작지로 제시된 곳은 산골짜기의 계곡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가뭄이 들어도 좀처럼 끊어지는 일이 없다. 또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중에 농사에 유익한 각종 성분들을 운반하기 때문에, 이런 물을 공급받는 논이 비옥할 것임은 당연하다.177)김상호, 「조선 전기의 수전 농업 연구」, 『학술 연구 조성비에 의한 연구 보고서』 인문 과학계 1, 문교부, 1969. 실제로 18세기 중반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비옥한 곳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평야 지대 논이 아니라, 지리산 주변 경작지였다.

모내기에 적당한 곳으로 제시된 곳은 수리 안전답(水利安全沓)이나 비옥한 곳은 아니었다. 『농사직설』은 모내기법에 대해 “이 방법이 제초에는 편리해도, 큰 가뭄을 만나면 농가에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수리 안전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이 책의 비료 쓰는 법을 설명한 항목에 따르면, 모 낸 곳에 쓰는 비료 종류는 척박한 땅에 쓰는 비료였다. 이것은 모내기를 하는 곳이 비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모내기법에 적당한 곳으로 제시된 곳의 경작지 조건은, 수리 안전답은 아니지만 심한 가뭄이 아니면 대체로 습기를 유지할 수 있고, 토질은 그리 비옥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졌지만 『농사직설』의 내용에 비추어 보아도, 조선 전기에 벼농사의 양적 비중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직파가 되었든 모내기가 되었든, 벼농사에는 어쨌든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수리 안전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08년 당시 논의 총면적 중, 수리 안전답 비중은 불과 17.5%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178)이여송, 「조선 수리 사업의 발전 과정」, 『식은 조사 월보』, 조선식산은행 조사부, 1946. 이 수치조차 18세기 이후 벼농사의 중요성이 높아져서 수리 시설이 늘어난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상황을 생각한다면,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경작하는 면적의 비중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을 것이다. 또 『농사직설』의 내용에 따르면 모내기법이 직파법보다 널리 이용되었던 경종법(耕種法)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즉, 조선 전기에 벼농사는 모내기법보다는 직파법이 중심이었고, 이 직파법의 경우도 물 이용 문제 때문에 널리 확산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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