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3. 벼농사와 노동력
  • 벼농사의 자연 환경
이정철

우리나라 사람치고 우리 자연 환경이 벼농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를 제외하면, 도시를 벗어나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대부분 벼농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늦가을 추수를 끝낸 들녘의 적막한 풍경조차 매우 한국적인 풍경 중 하나이다. 하지만 실제로 벼의 생육 조건을 놓고 볼 때, 벼농사가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에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벼는 상온으로 섭씨 13도 이상 되어야 생장할 수 있고, 재배 기간 중에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현재 조선시대 연평균 기온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연평균 기온이 섭씨 13도 안팎이다. 평균적으로 지금이 옛날보다 더워졌다는 상식을 감안하면, 기온상 조선은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더구나 봄철에 모내기를 할 때 반드시 물이 필요한데, 요즘도 그렇듯이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봄 가뭄이 잦았다.

실제로 조선은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상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 모내기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됐을 때도, 그것은 남부 지방 일부에 한 정되었다. 19세기 초 순조 때만 해도, 임진강 이북에서는 벼농사 자체가 어려웠다. 중부 지방 위쪽으로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벼농사의 한계선은 만주와 러시아 땅 타슈켄트(Tashkent)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1937년 스탈린이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면서, 이 지역까지 벼농사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벼농사를 짓는 데 유능한 민족인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200)이규태, 『한국인의 밥상 문화』 1, 신원문화사, 2000, 112쪽. 우리나라 사람의 이런 능력은 18세기 이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벼농사를 확대시켰던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다. 조선 후기에 벼농사가 농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우호적인 자연 조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기보다는 사회적 필요의 결과였다. 심지어 중앙 정부의 우려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투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조선의 논과 벼농사는 조선 농민의 역사적 투쟁의 성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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