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4. 벼농사 확대의 사회적 결과
  • 자연 환경의 역습
이정철

18세기에 조선은 성공적으로 인구압에 대처해 나갔다. 이미 사용할 수 있는 농업 자원을 거의 사용하였으면서도 조선시대 어떤 시기보다 빠른 인구 증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원 고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자 증가된 인구는 더 많은 연료와 목재를 필요로 하였다. 또 땅에 대한 수요는 화전 등 산림(山林)에 대한 과도한 개간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양상은 산림 황폐화로 귀결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농업 생산성의 하락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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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개간 모습
화전 개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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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증가에 의해 임야 그 자체 및 임야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산림이 헐벗고 농업 생산성이 하락하는 현상은 전근대 농업 사회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종의 생태학적 병목 현상이다.215)이우연, 「18·19세기 산림 황폐화와 농업 생산성」, 『경제 사학』 34, 경제사학회, 2003, 31쪽. 산림 황폐화에 대해서는 주로 이우연의 정리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생산 활동의 증가가 자연 자원에 대한 고갈로 이어지고, 그렇게 초래된 고갈이 다시 생산 활동을 방해하는 상황을 뜻한다.

산림 황폐화는 크게 세 가지 경로로 농업 생산성을 하락시킨다. 첫째, 산림 황폐화는 나무나 풀의 뿌리가 지표면을 붙들고 있는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 기능이 약해졌을 때 집중 호우를 만나면, 흘러내린 흙더미가 계곡을 거쳐서 하류로 운반된다. 그 결과 하천 폭은 넓어지고 강바닥은 높아진다. 이것은 다시 하천 범람과 제방 붕괴로 이어진다. 산림 황폐화가 하천의 배수 기능을 약화시켜서 경작지에 피해를 미치는 것이다. 둘째, 조선의 제언은 산골짝이나 산 아래 있는 유형과 평지에 있는 유형으로 나뉘었는데, 다수는 산골짝이나 산 아래 있었다. 산곡형(山谷形)은 산 밑에 자리를 잡고 있어 만들기 쉽고 계곡물을 이용하는 데 편리한 반면, 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에 취약하였다. 따라서 산림이 황폐해질 때 산곡형 제언은 더욱 쉽게 그 기능을 잃었다. 이렇듯 산림 황폐화는 수리 체계의 배수 기능과 저수 기능 모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셋째, 산림이 황폐하면 계곡 경사면이나 산록 구릉 지역에 있는 경작지는 산사태로 쉽게 매몰된다. 흘러내리는 흙이 경작지를 덮쳐 경작지 자체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18·19세기에 조선은 잦은 가뭄과 홍수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조선이 겪었던 가뭄과 홍수의 빈도가 이전 시기보다 잦았었는지를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가뭄과 홍수 빈도가 그 이전 시기와 비슷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시 조선 농업에 미친 영향이 그 이전 시기보다 한층 심각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된다. 앞서 보았듯이 18세기 이후 조선은 경작지 중에서 논이 확대되고 밭은 줄어들었다. 확대된 논에서는 대개 모내기로만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렇듯 조선 농업 자체가 모내 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기에, 가뭄 피해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다양한 기술 개발을 통해 물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고 해도, 벼농사나 모내기는 궁극적으로 물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또 19세기에 잦았던 홍수 피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이전 시기와 비슷한 정도로 비가 왔어도, 앞서 설명한 이유로 홍수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요컨대 18·19세기에 조선은 가뭄과 홍수에 의한 잦고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조선이 인구압을 돌파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들이 불러온 자연의 역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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