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6. 쌀과 사회 체제
  • 봉건제와 관료제
이정철

어떤 사회나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제한하는 것은 그 사회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전통 농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는 토지였다. 출산에 대한 인위적 조절이 쉽지 않았던 시기에, 사회 발전의 정도는 토지와 인구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은 거의 완전한 의미에서 폐쇄적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토지와 인구의 관계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강력하게 조선 사회 전체를 규정하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조선은 두 가지 대비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하나는 관료제 사회로서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의 모습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지만, 과거에 서구의 봉건제(封建制)와 우리나라·중국의 관료제(官僚制)에 대해서는 거의 정반대로 이해되는 일이 많았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료제를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 유럽 봉건제 이전의 미발달 단계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이후 서유럽이 먼저 달성한 산업 혁명의 힘을 기반으로 아시아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면서 생긴 오해였다. 문제는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도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힘에 위축되어서, 스스로의 과거를 제대로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아시아에서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시아가 마치 역사 발전의 ‘정당한’ 길을 밟지 않은 증거가 되는 듯이 말하였다. 그에 따라 우리나라나 중국의 학자들은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도 봉건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몹시 애를 썼다. 매우 이상한 상황이 빚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료제(최소한 송대(宋代) 이후의 중국과 조선시대의 관료제)는 쌀에 의한 더 높은 생산성과 그로 인해 가능하였던 더 많은 인구가 만들어 낸, 봉건제보다 훨씬 앞선 사회의 산물이었다.239)최근에 서구에서도 이에 대해 종래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연구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Alexander Woodside, Lost Modernities-China, vietnam, Korea, and Hazards of World History, Havard uiversity Press, 2006. 물론 이전에도 엘빈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선구적인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마크 엘빈, 이춘식 외 옮김, 『중국 역사의 발전 형태』, 신서원, 1989).

인류사를 살펴보면 곡물을 주식으로 삼지 않은 문명 사회는 거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곡물 경작은 그 자체가 문명의 시작을 뜻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전통 시대에 농업은 어떤 생산 활동보다 땅에서 단위 면적당 높은 칼로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농업은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였다. 더구나 곡물은 다른 어떤 주요한 식량 형태보다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였다. 이것은 미래를 계획하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농업의 이런 측면은 농업과 농업 이외의 생산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양한 곡물 사이에서도 비슷한 대비가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옛날에도 아시아가 주로 벼농사를 지었던 것에 비해서 유럽은 주로 낙농업(酪農業)과 밀농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런 서로 다른 농업 양상으로 초래된, 아시아와 유럽의 가장 뚜렷이 대비되는 측면은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 능력의 차이였다. 전근대를 통틀어 유럽 전체 인구는 중국 인구의 3분의 2 혹은 절반 이하였다.240)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희재 옮김, 『리오리엔트』, 이산, 2004, 284∼285쪽. 인간 노동력이 가장 큰 생산력의 기초였던 전근대 시기에, 인구수는 해당 사회 자체의 발전 정도와 비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1714년(숙종 40)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조 선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은 지리산 주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볍씨의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은 100배가 넘었다. 이보다는 못하지만 삼남과 경기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30∼40배 정도의 소출은 유지되었다. 이중환은 볍씨 한 말을 뿌려서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고, 10말 이하가 되면 살 수 없다고 말하였다. 농사만 지어서는 살 수 없는 경작 한계지의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을 10배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그는 벼슬 없이 경기 지역으로 물러나면 가문을 보존할 수 없어도, 삼남으로 옮기면 가문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241)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생리(生利). 즉, 녹봉(祿俸)이 없어도, 높은 농업 생산력이 가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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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에 비해서 전근대 유럽의 농업 상황은 무척 달랐다. 유럽에서 농업상의 획기적인 전기는 대개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농업 혁명이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이 다섯 배에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심한 경우 일부 동유럽 지역은 극단적으로 그것이 두 배를 넘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더구나 유럽에서 가장 많이 경작한 밀은 작물 자체의 성분상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영양적인 측면에서, 반드시 고기를 함께 먹어야만 하였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밀농사가 대개는 낙농업과 짝해서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목축을 위해서는 목초지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목초지에서 곡물과 같은 양의 칼로리를 얻으려면, 목초지 면적은 밀 경작지의 10배 가까운 넓이여야 하였다.

18세기 말 영국의 농업 혁명이라는 것도 내용 면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경우에 12세기, 우리나라의 경우에 15세기에 도달한 농업적 발전에 미치지 못하였다. 영국의 농업 혁명은 봄가을 사이에 순무를 심고, 가을에 보리를 파종할 때 클로버 씨를 뿌려서 겨울에 사료 작물을 재배하였던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클로버가 겨울 동안 가축들의 먹이가 되었다. 이것은 유럽적 기준에서 연작(連作) 농업에 성공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곡물 중심의 연작 농업은 유럽보다 300∼600년이나 앞서서 이루어졌다. 앞서 살폈던 『농사직설』은 그것을 증명하는 보고서이다. 유럽에서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이 비약적으로 증대한 것은 산업 혁명에 의한 화학 비료를 사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왜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비해서 유럽이 같은 면적 안에 매우 적은 사람들만 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또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관료제가 발생하였고, 유럽에서는 봉건제가 성립된 가장 기본적인 이유이다. 유럽은 뒤에 절대주의 왕정 시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인구가 조밀해진 이후에야 관료제가 성립될 수 있었다. 관료제는 일정한 영역의 넓이에 어느 정도 인구가 밀집하고, 그들이 정착해 있으며, 그들의 생산이 규칙성을 가져야 발생할 수 있는 제도였다. 세계사를 살펴볼 때, 유목 민족이나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서 관료제를 찾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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