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6. 쌀과 사회 체제
  • 쌀과 근대
이정철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전통 시대에 높은 사회적 문화적 수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팽창으로 식민지나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황을 맞이하였던 경우는 흔하지 않다. 서유럽은 18세기까지도 사회적 발전 수준에서 중국을 앞서지 못하였다. 심지어 19세기에 중국이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때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상황이었다.242)여기에 대해서는 군더 프랑크의 앞의 책이 대체적인 윤곽을 그리고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전근대 에 높은 사회적·문화적 발전에 도달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생산적 기반은 높은 농업 생산력, 특히 벼농사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벼농사를 통해 도달한 높은 생산력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근대를 맞이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유럽과 우리나라·중국은 토지의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 능력에서 커다란 차이가 났다. 가장 큰 원인은 쌀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다른 모든 작물에 비해서 월등하였기 때문이었다. 쌀과 밀을 같은 면적에 농사짓는다고 할 때, 쌀은 밀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칼로리를 생산한다. 더구나 쌀에는 다른 작물에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쌀이 대단히 많은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고, 비례해서 생산량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벼농사는 밀농사에 비해서 같은 면적에 대해서 15배 전후의 노동량을 흡수하였다. 이런 쌀의 특성은 농민들이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소출을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거시적으로 쌀은 조선과 명나라 중앙 정부의 봉쇄적(封鎖的) 외교 정책이 통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증산이 없이 장기간 유지된 나라는 없다. 쌀의 이런 측면이 13세기 이후 유럽과 중국의 역사적 진로를 다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다.

13세기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좋았던 시기이다. 10세기 이후 농업의 꾸준한 발전은 13세기에 이르러서 한 정점을 이루었다.243)서유럽 농업사에 대해 개괄한 것으로 다음의 책을 들 수 있다. B. S. 반 바트, 이기영 옮김, 『서유럽 농업사 500∼1850』, 까치 글방, 1999.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쾰른 대성당 같은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물이 바로 이 시기를 전후로 건축되었다. 높은 농업 생산성이 신을 찬미하는 사원 건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14세기에 들어서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농업 생산력은 인구압에 빠르게 위축되었고, 그 결과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을 죽인 페스트가 유행하였다. 페스트는 인구압으로 인해 사람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상대적 과밀 인구가 공공 위생을 악화시킨 결과 나타난 전염병이다. 15세기에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것은 바다 넘어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의 항해(1519∼1522)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서였다. 유럽인들을 먼 바다로 내몰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한계에 따른 생존의 위기였다.

반면에 14세기 중후반에 성립된 명나라나 조선은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국가 정책으로 백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명나라 이전 원나라나 조선 이전 고려가 해상 활동과 상업을 활발하게 전개한 왕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환은 다소 뜻밖이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해금 정책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국가 정책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명나라나 조선이 이러한 정책을 폈고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발전하는 농업 생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꾸준히 증가하는 인구를 농업 생산력으로 계속해서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봉쇄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은 사회 지배층이 농업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유럽의 경우 지배층인 영주(領主)들이 농업을 통해 부양을 받을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찍부터 상업과 관계를 맺었다. 반면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지배층은 기본적으로 지주(地主)로서 존재하였다. 지식인층 역시 사회 경제적으로는 지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국은 조선보다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상인 계층에서 과거 급제자를 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지주였다. 벼농사는 이들이 지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명나라, 청나라와 조선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중국 농업 지대는 밭농사 지대와 논농사 지대로 명확히 나뉜다. 화북(華北) 지방이 밭농사 지대라면 화중(華中), 화남(華南) 지방은 논농사 지대이다. 그런데 논농사 지대인 화중, 화남에서만 지주제가 일반적이었을 뿐, 화북 지방의 농업 경영 형태는 소규모 자영농 중심이었다.244)여기에 대해서는 각각 화북 지방과 양쯔강 델타 지역을 다룬 Philip Huang의 저서 두 권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The peasant family and rural development in the Yangzi Delta, 1350∼1988, Standford U.P., 1990 ; The peasant economy and social change in north China, Standford U.P., 1985. 이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 북부 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하면 조정 관리들은 북부 지방에 양반이 없다는 것에서 근본적 이유를 찾았다.245)김성우,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461쪽. 양반의 거주와 민란 발생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별도로 밝혀야 할 문제이지만, 밭농사 지대인 북부 지방에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되는 양반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논농사가 확대된 삼남 지방에서는 지주제가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경기 북부 이상의 북부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러한 명확한 대비는 논농사보다 생산력이 낮은 밭농사 지대는 지주층을 부양할 만한 생산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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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도의 농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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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과 땅과의 관계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나 중국과 다른 측면을 보 여 준다. 일본 역시 막부 시기 동안 벼농사가 발달하였던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일본은 벼농사에 매우 유리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자, 막부는 전통적 지배층인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무사들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무사들은 막부 명령에 의해서 영주의 성(城) 아래, 즉 후에 도시로 발전하는 곳에 모여 살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전통적 지배층인 무사에서 영주를 보좌하는 관료로 변해 갔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배하던 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고, 영주가 주는 빈약한 녹봉에 의존해 살았다.246)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개괄한 책으로는 야마구치 게이지의 책이 있다(야마구치 게이지, 김현영 옮김, 『일본 근세의 쇄국과 개국』, 혜안, 2001).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의 지배층이 지주로서 존재하였던 것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배층은 일본의 지배층에 비하여 땅과 관련된 사회적 존재 방식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서구가 등장하였을 때, 이에 대한 경각심의 정도나 대응의 신속성에서 극명한 차이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중앙 정부의 정치적 환경은 농촌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사회 경제적 환경이나 의식 세계와 거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농촌에 사는 지배층은 시끄럽고 복잡한 일은 수도(首都)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들의 물적 기반인 땅에는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던 것도 사실이었다. 바로 이것이 땅을 차지하였던 자들이 보수적인 이유이다. 반면에 자기 소유 땅이 없이 영주가 주는 충분치 않은 녹봉에 의존하였던 일본 하급 무사들은 서구의 등장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런 차이는 서구의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이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배층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 너무 늦게 반응하였거나 그들과 타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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