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2. 일제강점기 쌀 생산과 농촌 사회
  • 일본 농법의 보급과 산미 증식 계획
  • 한전 농법에서 수전 농법으로의 전환
김윤희

일본의 농학자들 사이에 조선의 전통적 농법인 한전 농법은 매우 생산성이 낮은 농법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또한 일본 개량 품종에 적합한 농법의 보급을 위해서도 수전 농법의 보급이 절실하였다.

1910년대 개량 품종의 보급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조선 총독부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의 개량과 투입을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실제로 개량 품종의 생산량은 보급 초기 300평당 1.3석 정도였던 것이 1920년대에는 약 1.1석 수준으로 감소 또는 정체되고 있었다. 게다가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쌀 폭동으로 인해 더 많은 조선 쌀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었다.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은 일본 내 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조선 쌀을 증산할 목적으로 실시한 농업 정책이었다. 다량의 비료 투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오던 것이 일정한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산미 증식 계획은 비료 투입보다는 대규모 관개 시설을 설치하여 수전 농법을 보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은 사업 기간을 30년으로 설정하고, 관개 시설을 갖춘 논 40만 정보와 20만 정보의 밭을 논으로 전환할 것을 계획하였다. 여기에 개간과 간척을 통해 20만 정보를 확보하여 총 80만 정보의 농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서 1926년의 제1기 사업에서 43만 정보의 토지를 개량하고 900만 석을 증산하여 460만 석을 일본으로 유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1기 사업의 성과는 당초 계획에 훨씬 못 미쳤다. 1926년까지 개량에 착수한 농지 면적은 9만 7000여 정보로 계획 면적에 약 59%에 불과하였다. 성과가 저조하였던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찾아온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으로 인해 금리가 상승하고 공사비가 크게 증가하여 조선 총독부의 재정 압박이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지주는 토지 개량을 하는 것보다 소작료를 올려 얻은 수익이 더 유리하였기 때문에 산미 증식 계 획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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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조합의 저수지
수리 조합의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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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선 총독부는 제2기 사업의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대규모 토지 개량을 위해 조선 토지 개량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업 대행 기관으로 삼았으며, 수리 조합에 자금을 지원하고 알선하는 방향으로 수리 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조선 총독부는 농사 개량 자금으로 4,000만 엔을 별도로 마련하고 그 중 80%를 화학 비료 구입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여 농사 개량에 중점을 주었다.

그러나 제2기 토지 개량 사업은 농업 공항으로 인해 1934년 중단되었고, 산미 증식 계획 역시 실질적으로 중단된 상태가 되었다. 그 후에도 농사 개량 자금에 대한 융자는 꾸준히 증가하였고, 화학 비료의 투하를 통해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정책은 계속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은 당초 계획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관개 시설을 갖춘 수전의 비율이 22%에서 68%로 증가하였고, 개량 품종의 확대와 화학 비료의 사용으로 생산량은 약 1.4배 증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쌀의 유출량은 다섯 배로 증가하여 생산량 증가율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러나 산미 증식 계획이 실시된 1920년에서 1935년까지 전체 논밭에서 수전 증가율이 한전 증가율에 비해 크게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1920년 155만 정보였던 수전은 1935년 170만 정보로 증가하였고, 같은 기간 한전은 298만 정보에서 321만 정보로 증가하였다. 1920년 경지 면적에서 34.2%를 차지하던 수전 비율은 1935년 34.6%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본다면 밭을 논으로 개량하겠다는 사업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77)朝鮮農會, 「農村不況と農家の轉業」, 『朝鮮農會報』(5月), 1930.

반면, 쌀의 생산을 놓고 본다면 한전에서 수전으로의 전환은 분명히 진행되었다. 1937년과 1938년 쌀을 재배하는 수전과 한전의 면적을 보면 수전은 9만 4000정보였던 반면 한전은 1만 3000정보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쌀의 한전 농법이 거의 사라지고 수전 농법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일제강점기 농업의 특징은 한전 농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던 체계가 수전 농법에 크게 의존하여 쌀 생산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형성된 다양한 곡물의 생산 방식이 일본의 식민지 농업 정책 아래 강제로 비료와 대규모 수리 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벼 단작 농업 구조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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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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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못줄을 이용하여 줄지어 모내기를 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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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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