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3. 일제의 전쟁 수행과 조선의 쌀
  • 조선 총독부의 농촌 통제 정책과 농촌 사회
  • 농가 경제 상황
김윤희

산미 증식 계획의 실시로 쌀 단작형 농업 구조로 재편된 조선 농촌에서 농업 공황으로 인한 쌀값 하락은 농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조선 농회가 1930년에서 1932년까지 3개년에 걸쳐 경기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평안남도, 함경남도의 다섯 개 도에서 실시한 농가 경제 조사에 의하면, 자작농 은 연간 평균 65엔, 자·소작농은 10엔, 소작농은 32엔의 적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가 수지 적자로 농촌에서는 한 뼘의 토지도 경작할 수 없는 몰락 농민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고, 조선 총독부의 조사 통계에서도 1927년부터 화전민(火田民)이, 1933년부터 농업 노동자가 따로 조사될 만큼 몰락 농민층이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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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 주택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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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 주택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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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전반적 몰락은 식민지 지배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으므로 조선 총독부는 농가 경제의 안정을 위한 농업 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지주 소작 관계에서 지주의 자의적인 개입을 제한하는 소작 관계법을 제정하고 농가 경제의 안정을 위한 ‘농가 경제 갱생 계획’과 자작 농지 설정 사업, 부채 정리 사업이 실시되었다. 여기에 쌀값이 점차 회복되면서 가파르게 상승하던 소작농의 비율이 정체되고 자작농, 자·소작농의 비율도 이에 비례하여 정체되었다.

조선 총독부에서 1933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농가 경제 갱생 계획’ 지정 농가의 경제 상태 조사에 따르면 쌀 상품화를 통한 영농 수입의 증가로 농가 경제 수지가 상당히 호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사비 지출 비중이 거의 그대로 있거나 감소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비의 증가보다는 절약과 내핍의 결과였다. 1936년 1인당 식량 소비량은 1.435석으 로 1933년의 1.396석에 비하면 다소 증가하였지만, 농업 공황 이전인 1928년 1.597석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었다. 1920년대에 비해 1930년대는 농민층의 몰락 현상이 주춤해졌지만, 이것이 곧 농가 경제의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계에 이른 농가 경제 수지를 소비 억제를 통해 겨우 유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쌀의 1인당 소비량은 1936년 0.387석으로 일제강점기 중 가장 적은 소비량을 기록한 이래 1940년 0.7761석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다시 0.5528석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1인당 전체 식량 소비량과 비교해서 쌀의 소비량은 전반적으로 50%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식량 공출을 실시하였다. 쌀 생산량에 대한 공출량은 1941년의 42%에서 1944년 64%로 급증하였다. 맥류 공출량 또한 1941년에는 총생산량의 15%였으나 1944년에는 37%에 달하였다. 더욱이 공출 대금은 생산비 수준에도 못미쳤고, 그것조차 각종 명목의 강제 저축으로 공제되었기 때문에 농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강제 저축은 실질적으로 농가 경제의 큰 부담이 되었다. 1인당 저축액은 1937년 5.65엔에서 1943년에 57.82엔으로 5년 동안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1938년 농가 소득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의 수입 총액은 214엔 정도, 자·소작농은 322엔 정도인데 여기에서 영농비, 공과금, 가사 지출비, 그리고 1호당 평균 농가 부채에 따른 원리금 상환 비용 등을 빼면 소작농은 28.29엔, 자·소작농은 49.12엔 정도가 남았다. 그런데 1938년 1호당 평균 저축액이 63엔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이들이 스스로 저축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농가 저축액이 크게 증가한 데에는 조선 총독부에 의한 강제 저축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농민들에게 농림 수산물의 공출 대금을 비롯한 모든 소 득에 대해 예외 없이 원천적으로 소득의 일부를 강제적으로 저축하게 하였다. 1941년 쌀 공출 매수 대금에서 강제 저축액으로 떼어 간 액수가 지불 대금의 13.5%였던 것이 1943년에는 26.6%로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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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저축 목표액은 일본 대장성이 일방적으로 정하여 각 도와 군에 할당하였다. 1937년 이후 종전 때까지 강제 저축액은 80∼90억 엔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같은 기간 조세액 총액의 네 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더구나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은행권이 남발되어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예금 금리는 오히려 인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축액의 급증은 저축이 얼마나 강제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함과 동시에 자산의 가치 하락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소작농이나 자·소작농에게 할당된 강제 저축액은 고소득층에 비해 적었지만, 이들의 낮은 소득 수준에 비하면 커다란 부담이었다. 소작농과 자·소작농은 할당된 저축액을 마련하기 위해 오히려 영농 지출비와 생활비를 줄였고, 이 때문에 그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히 추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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