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5장 분단과 근대화 그리고 쌀의 의미
  • 3. 미 잉여 농산물 원조, 쌀과 밀의 다툼
허은

1945년 38도선 분할과 이후 분단 체제의 고착은 정치적 분단뿐만 아니라 경제적 분단을 의미하였다. 일제의 지배 정책에 따라 북한에는 광물 자원과 동력 자원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 공업이, 남한에는 미작 지대(米作地帶)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중심이 되는 극히 대조적인 경제 지역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분할은 미소 분할 점령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분단에 따른 남북한 경제 지역의 분리는 남한을 약간의 경공업 지대를 포함한 쌀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업 국가로 만들었다.325)박동묘, 「한국 경제와 미작농」, 『사상계(思想界)』 20호, 사상계사, 1955 : 『농정사 관계 자료집』 4집, 270쪽.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은 농업 중심의 전형적인 제1차 산업 국가였다. 국민 소득의 약 절반이 농업 부문에서 발생하였으며 대다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였다. 농가 인구는 1967년까지 정점에 달하였다가 이후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전체 대비 농가 인구가 50% 이하로 떨어진 해는 1969년이었다.326)한도현, 「1960년대 농촌 사회의 구조와 변화」, 『1960년대 사회 변화 연구: 1963∼197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9, 128∼129쪽.

1960년대 후반 농민들이 본격적으로 농촌을 떠나기 전까지 쌀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농경 문화가 우리나라의 의식과 생활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촌향도(移村向都)를 통해 도시로 흡수된 노동 인력이 농촌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상당기간 유지하였을 것이 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화 과정에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생활 양식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조 경제와 고도 산업화 과정에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생활 양식은 순탄한 길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쌀농사와 물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논물 싸움, 기우제(祈雨祭) 등은 논농사가 낳은 문화의 일면이다. 쌀농사에서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은 ‘강우(降雨)’와 ‘관개(灌漑)’로 공급한다. 쌀과 밀의 생산 방식과 경작 지대는 크게 지리적으로 구분되었고, 우리나라의 주된 양식은 빵이 아니라 밥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생각할 때 주식으로 밥을 부식으로 반찬을 머리에 그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쌀이 떨어졌을 때 주식의 자리를 일시 메웠던 것은 보리였다. 밀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다음 인용문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쌀을 주식으로 삼는 우리 음식 문화의 일단을 보여 준다.

깊은 농산어촌을 찾아 들어가면 7, 8세 되는 어린아이들이 밥을 큰사람보다도 더 많이 먹으며 숨도 잘 쉬지 못하면서도 또 밥투정만 하며 영양 편중으로 말미암아 갈증이 나며 저녁때에 해가 지자마자 한 치의 앞도 분간하지 못하고 눈뜬 소경이 되어 일생을 마치는 것은 참으로 어머님의 중요한 책임이다. 이러한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않게 확실한 식생활의 지식을 파악하며 개선해 가야한다는 말이다.327)김성제, 『농사와 농촌』, 대한 농회, 1949, 35쪽.

쌀과 보리를 주 식량으로 삼는 우리나라의 식생활에 미국산 밀로 만든 빵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원인은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를 통한 밀과 밀가루의 대량 유입에 있었다.

전쟁 직전 대일 미곡 수출까지 단행할 정도로 남한의 식량 생산량은 상당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 았다. 전쟁 상태에서 쌀 생산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였다. 1949년도를 100으로 할 때 곡물 생산 종합 지수가 1950년 96에서 1951년 72로 뚝 떨어졌다. 전시 기간 내내 식량 사정은 악화되어 갔다. 1953년 정부는 부족한 양곡을 보충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제 연합(國際聯合)으로부터 원호 양곡 33만 톤을 공급받고, 한국 재건단의 원조 자금에서 11만 톤의 양곡을 수입하며, 그래도 부족한 수량 53만 톤을 정부 보유 외환으로 구입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계획은 전시 열악한 식량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328)원용석, 『전란하의 농업 경제』, 삼화출판사, 195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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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하의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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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 수급량 중에서 도입 양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1년 7.7%에서 1952년 15.4%로, 1953년에는 30.5%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952년에 쌀 생산이 유례없는 흉작이었고, 1953년에 외국에서 대량의 양곡을 수입하였다. 이 와중에 1953년 보리 생산이 대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리를 대량 수입해 농촌에서 보리를 수확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329)이대근, 『한국 전쟁과 1950년대의 자본 축적』, 까치, 1987, 183쪽.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식량 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생산 증대가 수요의 증대를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54년도에 미곡은 전쟁 이전의 생산 수준을 넘어섰지만, 식량 수요량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은 이후 박정희 정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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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양곡을 타려는 사람들
구호양곡을 타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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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제공한 구호 및 식량 원조 물자가 부족한 식량을 메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미군정 및 원조 기구 그리고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원조 농산물을 이용하여 식량 배급, 전시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식량 원조 물자를 곡가 안정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330)김종덕, 『원조의 정치 경제학』,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7, 114∼118쪽.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원조 농산물 도입은 실제 부족량보다 과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는 곡가의 폭락과 농가 경제의 피폐를 가져왔다.

그런데 미국은 잉여 농산물 원조를 제공하면서 원조 농산물 소비를 촉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산 원조 소맥의 판매 대금 중 한국 측 사용분을 전액 국방비에 충당케 하였다. 뒤집어서 보자면 이는 전후 막대한 국방 예산이 필요하였던 우리나라에서 밀 소비를 촉진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안 이었다. 또한 원조 소맥을 실수요자에게 저렴한 환율로 배정하여 소맥 수입을 부추겼다. 이는 원조 소맥의 국내 소비 가격이 낮아져 소비가 증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331)김종덕, 앞의 책, 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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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원조 양곡 입하 환영식과 밀가루 포대
미국 원조 양곡 입하 환영식과 밀가루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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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단체 및 우리나라의 민간단체도 미국 농산물 시장 확대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미국 소맥 협회, 한국 제분 공업 협회, 한국 제과 협회 등이 대표적인 단체이다. 우리나라의 소맥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 미국 소맥 협회는 미국 농무성 산하 해외 농업 서비스국이 주도한 협력 계획에 따라 한국 제분 공업 협회와 한국 제과 협회 등에 식생활 개선을 위한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한국 제분 공업 협회는 1955년 농수산부 산하에 설치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조직으로 소맥 수입에 관한 구매, 운반 및 분배를 독점한 기관이었다. 이 단체는 정부의 수입 다각화에 반대하고 모든 소맥을 계속해서 미국으로부터 구입하기 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할 정도로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였다. 한국 제분 공업 협회는 잡지에 분식 장려를 위한 광고를 실었다.

또한 미국은 한국 제과 협회에 제과 기술과 제과점 경영에 대한 지원을 통해 시장 개척을 도모하였다. 미국은 1973년 한국 제과 학교 설립을 지원하고 이 학교 교사들이 미국 제과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도록 조치하였다.332)김종덕, 앞의 책, 198∼199쪽.

국민의 식생활에 대한 정부의 개입도 쌀 소비 억제와 밀(가루) 소비 확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은 수립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생활 개선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333)생활 개선 운동 관련 부분은 김은경, 『1950년대 가족론과 여성』,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참조.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는 사회부 주도 아래 향후 3년 동안 ‘국민 내핍 생활 실천 운동’을 실시하고자 하였고, 전시 중인 1951년 8월에는 ‘전시 국민 생활 실천 요강’을 천명하여 일반 시민의 생활을 세세하게 통제하고자 하였다. 1951년 10월 19일에는 국민 생활의 간소화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 생활 개선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휴전 후에도 전시 생활 개선법이 폐지되지 않은 채 생활 개선 운동이 지속되었다.334)김은경, 앞의 글, 190쪽.

생활 개선 운동 중에서 식생활 관련 부분은 백미(白米) 소비를 강력히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승만 정권은 ‘쌀 수출’을 거의 유일한 외화 획득 방안으로 주목하였다. 따라서 식량 수급을 자체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쌀 수출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절미(節米)’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은 쌀 수출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들의 내핍 생활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335)김은경, 앞의 글, 204쪽. 그렇다고 대량 쌀 수출이 된 것도 아니다. 1960년에 3만 톤을 일본에 수출한 정도에 불과하였다(농수산부, 『한국 양정사』, 1978, 660쪽).

백미 절약과 함께 혼·분식(混·粉飾)의 생활화가 강조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막대한 잉여 농산물의 소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국내 제분업의 활성을 위해서 혼·분식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제분 산업은 1950년대 주력 산업이었던 이른바 ‘삼백산업(三白産業)’ 중에 하나였고, 이와 관련된 안정적인 소비 구조의 확보는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다. 정부는 밀가루 소비를 증대하기 위해 제빵 강연회를 열고, 밀가루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물 제조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식빵이 쌀보다 영양가가 높으며 가사 노동을 줄일 수 있다는 홍보 영화를 제작하여 적극 선전하였다.336)김은경, 앞의 글, 206쪽.

박정희 정권은 혼·분식 장려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337)혼·분식 장려 정책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송인주, 「1960∼70년대 국민 식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양상과 특징」,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참조. 1962∼1963년 가뭄과 병충해로 잇따라 흉년이 들어 곡가 파동이 일어나자 5·16 군사 정권은 분식 장려를 양곡 소비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채택하였다.338)송인주, 같은 글, 10쪽. 군사 정권은 1963년 1월 ‘전국 절미 운동 요강(全國節米運動要綱)’을 발표하였다. 재건 국민 운동 본부의 주관 아래 서울 및 각 도시군(各道市郡)에 식생활 개선 위원회가 설치되어 절미 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339)농수산부, 앞의 책, 402쪽. 유흥업소나 식당 등에서 쌀로 만든 음식 판매를 금지시키고, 농림부 공무원들은 ‘빵·우유로 점심 먹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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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혼·분식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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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혼·분식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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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정부는 식량 증산 정책의 결과 보리 증산이 이루어지자 다시 혼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혼식 장려는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1960년대 후반 1인당 쌀 소비량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을 전후하여 강력한 절미 시책을 실시하였다. 1967∼1968년 병충해로 인한 농사 흉작, 1960년대 말 경제 위기, 1970년대 초 식량 안보 환경의 대두 등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69년 1월 23일 무미일(無米日) 지정을 시작으로 1974년까지 절미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농림수산부와 보건사회부는 혼·분식을 적극 장려하였다. 정부의 혼·분식 강제와 규제는 통일벼 재배로 쌀 자급이 이루어지는 1977년에 가서야 크게 약화되었다.

정부가 미곡 소비 억제를 위한 의지를 강력히 천명한 1969년의 상황과 시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69년 1월 24일 정부는 내무부, 농림부, 보건사회부 장관이 공동 명의로 작성한 ‘식량 소비 억제를 위한 시행 명령’을 고시하며 이를 1월 25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340)『조선일보』 1969년 1월 25일자. 시행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968년 삼남 지방이 막대한 한해(旱害)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1968년 벼를 심은 면적은 평년작에 비해 4.8%, 300평당 평균 수 확량은 평년작에 비해 10.7%나 감소하였다. 그 결과 전체 생산 실적은 1967년에 대비해 11.3%나 줄어들었고, 평년작(1963∼1967)보다는 15%나 감소하였다.

정부가 고시한 미곡 소비 억제를 위한 행정 명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9년 1월 정부 고시 절미 방안341)농수산부, 앞의 책, 479쪽.

① 음식점, 여관(호텔, 여인숙, 합숙소 포함), 요정, 식당(일반 기업체 구내식당 및 열차 식당 포함) 등 모든 음식 판매소에서는 반식(飯食)(탕(湯), 반(飯) 일체)에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혼합 판매하여야 한다. 다만, 병원에서 환자에게 제공하는 식사는 예외로 한다.

② 모든 음식 판매소는 매주 수요일과 토·일요일에 있어서는 11시부터 17시까지 쌀을 원료로 하는 반식을 판매하지 못한다.

③ 관공서 및 국영 기업체(금용 기관 포함)는 일체 쌀을 원료로 하는 반식의 판매를 금지한다.

④ 엿 제조 업소에서는 물엿 제조 원료에 고구마, 감자류와 그 전분 및 국내산 옥수수 외의 양곡은 사용하지 못한다.

⑤ 해당 업소에서 상기 준수 사항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양곡 관리법 제22조 및 제23조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행정 처분한다.

   가. 반식 판매 업소 및 관공서·국영 기업체 구내식당

     ▶ 연1회 위반 시: 10일간 영업 정지

     ▶ 연2회 위반 시: 30일간 영업 정지

     ▶ 연3회 위반 시: 영업 허가 취소

   나. 엿 제조 업소

     ▶ 연1회 위반 시: 경고

     ▶ 연2회 위반 시: 사직 당국에 고발

이 밖에도 정부는 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쌀에 대한 보리의 상대 가격을 인하하는 가격 정책을 취하였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에는 쌀에 대한 보리의 상대 가격이 쌀값의 약 72.4%정도로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보리쌀에 의한 쌀의 소비 대체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제2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 중에는 보리쌀의 상대 가격이 쌀값의 59% 수준으로 낮아졌다. 보리 저가 정책은 보리쌀의 소비 증대와 쌀의 소비 절약을 이루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342)농수산부, 앞의 책, 480쪽.

1969년 보건사회부에서 위촉하여 연구 발표된 분식 조리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각 시도의 부녀 회관, 부녀 교실에서는 제빵 강습회, 요리 강습회가 항시적으로 열렸다. 보리가 많았던 농촌에서는 밀가루 음식을 장려하기보다 쌀과 보리의 혼식이 강조되었다.343)송인주, 앞의 글, 11쪽.

정부의 혼·분식 정책에 호응하며 식생활 개선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민간단체가 한국 부인회였다. 한국 부인회는 1971년 8월 6일 혼·분식 식생활 개선을 위한 전국 주부 궐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농림부 장관 그리고 주부 3,000여 명이 참여하였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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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 개선 무료 조리 강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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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기 대회에서 주부 대표들은 혼·분식 장려를 통해 연간 100만 톤의 외국 쌀을 수입해야하는 상황을 극복하자고 주창하였다. 한국 부인회는 혼·분식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으로 ① 밥에 15% 이상의 잡곡을 섞고, ② 1주 3회 이상의 분식을 하며 ③ 혼·분식을 하지 않는 요식 업체에 서는 사먹지 않을 것 등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혼·분식 장려를 위해 국민학교 아동에 대한 급식 확대, 혼·분식 식품에 대한 세금 인하 등을 통해 혼·분식을 제도화할 것을 건의하였다.344)『조선일보』 1971년 8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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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식 분식 실천 궐기 대회
혼식 분식 실천 궐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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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인회의 건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혼·분식을 확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안은 학생들의 식생활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쌀보리 혼식을 강제하고 빵 집단 급식을 시행해 나갔다. 학교 급식은 1972년까지 미국의 원조 물자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도입 밀가루의 주된 소비 창구였다. 학교 급식은 어린이들의 영양과 체위 향상에 일조하였지만, 이는 동시에 우유나 빵에 친근한 어린이들을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식량 원조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였다.345)송인주, 앞의 글, 30쪽.

하지만 이 시기 학교 급식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혼·분식 이행이 아니라 혼·분식 자체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결식아동(缺食兒童)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데 있었다. 1972년 4월 문교부는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혼·분식 이행 정도를 집계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이행 정 도의 수치보다 전체 조사 대상 139만 4164명 중 국민학생의 30%인 313만여 명이 점심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은 학생 중 상당수는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형편의 학생들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체 국민학생의 67%가 혼·분식을 이행하였다. 중학생의 혼·분식 이행 정도는 국민학생보다 훨씬 높았다. 전체 조사 대상 학생 394만 6509명 중 90%에 달하는 학생이 혼·분식을 이행하였다. 결식아동은 국민학생보다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여전히 31만 9095명이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은 학생이었다.346)『조선일보』 1972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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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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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가 혼·분식 장려를 위해 흰쌀밥만을 즐겨 먹는 것은 ‘어리석은’ 습성이며, 육체적 인격적 결핍을 초래한다고 선전한 점이 주목된다.

첫째, 흰쌀 편식으로 인한 체질의 산성화가 많은 보건상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둘째, 심리적으로 끈기와 침착성이 결여되며 소극적인 성격으로 기울어진다. 셋째, 대뇌 변질증을 일으켜 판단력이 흐리고 지능이 저하될 우려가 많다.347)문교부, 『실과』 교사용 지도서, 1975, 87쪽 ; 송인주, 앞의 글, 32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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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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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는 혼·분식의 필요성을 단순히 보건 건강 차원에서만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개개인의 인격 형성과 연결시켜 선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홍보는 과학적 근거도 없이 분식 장려를 관철시키려는 논리에 불과하였다.348)송인주, 앞의 글, 32∼33쪽.

원조나 수입 밀가루를 활용한 식품을 먹는 것이 흰쌀 편식에서 오는 건강상의 문제를 보완해 주는 제대로 된 방책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수입 밀가루는 방부제와 표백제에 절어 있고, 밀가루는 식물성 식품 가운데 가장 많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음식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이 주식으로 먹는 빵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설탕과 버터와 소금으로 범벅이 된, 달고 부드러운 빵이 아니라 신선한 재료로 구워 낸 거칠고 달지 않은 빵이기 때문이다.349)농민신민 편집국, 『쌀을 말한다』, 2005, 230쪽.

쌀은 또한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쌀과 관련된 농경 문화와 식생활은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간주되었다. 냉전 체제 아래서 근대화 달성을 지상 과제로 여기고 그 전범으로 서구와 미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 문화를 민족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인 요소로만 파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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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가루 죽
옥수수 가루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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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대표적인 농업 연구자 중의 한 명이었던 박동묘(朴東昴)는 “소맥(밀)은 자연 조건의 제약을 적게 받는 까닭에 소맥 농민은 비옥한 경지를 따라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취적인 정신력을 배양”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예로 옥수수 농업과 신대륙 개척으로 배양된 미국 농민의 ‘투쟁적인 식민 정신’ 들었다.350)박동묘, 「쌀과 밀의 논쟁—미작 경제와 소맥 경제—」, 『산업 경제』 30호, 대한 상공 회의소, 1955 : 『농정사 관계 자료집』 4집, 271쪽.

반면에 한국의 관개수를 이용한 쌀농사는 입지 이동을 지극히 곤란하게 만들며 농민은 관개 시설과 더불어 조상 대대로 경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소맥 농민과 생산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농업 형태의 차이는 우리나라 농민의 보수적인 생활 태도를 낳았다는 것이다.351)박동묘, 앞의 글 : 『농정사 관계 자료집』 4집, 271쪽.

박동묘는 쌀과 밀의 경제적·문화적 차이를 쌀과 밀의 논쟁 형식을 빌려 언급하였는데, 쌀과 밀의 문명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지적한 다음 글은 흥미롭다.

눈을 감고 생각하면 나(밀)의 일생도 험악한 걸음이었다. 한때는 자네의 입장을 부러워한 적도 있고 나의 결점을 비관한 때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나의 결점은 구미의 경제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현재와 같은 찬란한 문명을 갖게 하였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쌀의 문명(Rice Civilization)’인 아세아 문명보다 ‘밀의 문명(Wheat Civilization)’인 서구 문명이 월등하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원래 소아세아 출신이다. 나는 성격이 사나워서 기후에 대한 적응력이 크며 중위도 지대면 거의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추운 지대에서는 춘맥으로서, 더운 지역에서는 춘동맥으로서 이중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량이 많으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 점이 나와 특히 다른 점이다. 자네는 물속에서 잘도 참는다.352)박동묘, 앞의 글 : 『농정사 관계 자료집』 4집, 334쪽.

박동묘는 서구 문명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다음 그 원인을 농경 문화의 차이에서 찾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가 서구의 문화적 지배 담론(支配談論)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쌀을 통한 그의 문화적 구분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동양에 대한 ‘타자화’와 궤를 같이하며, 우리나라의 농민을 인습적이며 보수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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