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5장 분단과 근대화 그리고 쌀의 의미
  • 4. 보릿고개를 넘어, 녹색 혁명과 통일벼
허은

한때 농촌 실태 조사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쓰였던 용어가 보릿고개 또는 춘궁기(春窮期)였다. 1960년대까지 매년 5월경 농촌에는 양곡이 다 떨어져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았다. 1정보(3,000평) 미만을 경작하는 영세농들에게 보리 수확 전의 5월 보릿고개와 쌀 수확 전의 가을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이 시기 영세농은 순전히 채식(菜食)과 미음으로 연명하고 부농에게 ‘셋가리’(장리쌀)를 빌려 가족의 생계를 연명하였다. 장리쌀은 쌀 한 말을 빌렸을 경우 보리 수확 후 두 말로 갚아야 했다. 심지어 일부 농가는 빌려다 먹은 장리쌀이 너무 많아 수확량의 전부를 가지고도 갚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처한 빈농은 수개월을 두고 노임으로 부채를 청산하였다. 보리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한 농가는 가을에 다시 절량기(絶糧期)를 맞았는데, 봄철에 겪었던 고통을 음력 6, 7월에 반복하는 것을 ‘칠궁(七窮)’이라 불렀다.

수많은 농민이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의 굶주림에서 탈출하지 못하였던 이유를 이들 개개인의 능력 부재로 돌릴 수만 없다. 농가 경제의 궁핍은 구조적인 측면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농가 경제를 고질적인 악순환에 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출발점은 농지 개혁(農地改革)이었다. 농지 개혁의 취지는 종래의 일제 식민 지배 정책이 만들어 놓은 가혹한 수탈 관계를 청산하고 이를 통해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농업 생산을 증대하고 농촌 사회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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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 개혁법 해설』
『농지 개혁법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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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50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실시된 농지 개혁이 이와 같은 취지를 충족시켰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히 ‘농민의 경제 자립’이란 측면에서 볼 때 농지 개혁은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농업 생산과 농가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경지 면적을 우선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농지 개혁은 1정보 미만의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수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지 개혁 이전에 5반보(1반보=300평) 미만의 농가 호수가 전체 농가 호수의 38.8%이고 1정보 미만은 전체의 73.2%였다. 그런데 농지 개혁 이후에는 더욱 영세화가 촉진되어 농지 개혁 1년 뒤인 1951년에는 5반보 미만이 3.9% 증가하여 42.7%가 되었고, 1정보 미만은 5.3% 증가하여 78.5%에 달하였다. 이에 1950년대 한 연구자는 “농지 개혁은 농민 경제의 자립을 촉구할 전제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농민 경제의 파탄을 가져올 전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353)고영경, 「소농의 몰락과 대농화 경향」, 『식량과 농업』 2권 8호, 식량과 농업사, 1958, 39쪽. 농지 개혁 후 단위(300평당) 농업 생산고는 개혁 전인 1948년 생산고를 따라잡지 못하였다.

한편 분배 받은 농지에 대한 지가 상환(地價償還)과 토지 소유에 따른 토지 수득세의 과도한 부담은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특히 6·25 전쟁 기간에 제정된 임시 토지 수득세법(臨時土地收得稅法)은 토지의 산출량을 기준으로 하여 현물인 쌀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 였다. 이는 종전 지세율에 비해 5∼10배의 세율 인상 효과가 있었고, 국가 총 조세 수입의 70∼90%를 차지하였다.354)이대근, 앞의 책, 174쪽. 실로 무거운 조세 부담과 적자만을 낳은 영농 조건은 농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얻은 영세농을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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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총 농가 호수가 약 220만 호로 잡혔는데, 같은 해 5월 말 절량농가(絶糧農家) 추정 인구가 약 110만 호였다. 보릿고개 때 절량농가가 총 농가 호수의 절반이 넘었다는 말이다. 이 시기 가난한 농민은 벼를 수확하기 이전에 이른바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을 빌어 미리 팔아 버렸다. 막대한 농가 부채를 지고 있던 농민은 벼 수확기까지 늘어나는 이자를 감수하며 기다릴 수 없었고, 또한 수확기까지 기다리더라도 쌀을 그대로 지가 상환, 임시 토지 수득세, 각종 잡부금 등으로 지불하여야 했다. 따라서 농민은 벼가 논에 서 있는 상태로 고리채 업자들과 채무 상환 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355)이대근, 앞의 책, 212쪽. 국가가 요구하는 세금과 상환액을 대기에도 허덕거렸던 영세농이 농업 생산성을 높여 보릿고개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농촌 실태는 나아지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경상북도의 절량농가는 약 10만 호에 달하였는데 이는 경상북도 내 전체 농가 호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수치였다. 끼니를 연명하기 위해 산나물을 캐다가 실족사를 한 농민의 안타까운 소식이 신문 사회면의 한구석을 여전히 차지하였다.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였던 절미와 혼·분식은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 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책은 분명 아니었다. 이에 정부는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식량 증산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였다.

1964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범국민적 일대 증산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3월 13일 농촌 진흥청 대강당에서 개최된 ‘전국 식량 증산 연찬 대회’에서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식량 자급자족의 달성을 강조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식량 사정의 긴박성과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수요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1965년을 기점으로 5년에서 7년 이내에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장기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 안은 같은 해 8월 산업 증산 대책 본부 회의에서 수정되어 ‘식량 증산 7개년 계획 수정안’으로 확정, 공표되었다. 수정안에서 정부는 1968년까지 식량 자급을 달성하고 1969년부터는 잉여 양곡을 해외로 수출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였다.356)농수산부, 앞의 책, 393쪽.

<표> 1967∼1971년 양곡 자급률 추이
단위 : 천M/T
연도 생산량(A) 수출량 수입량 소비량(B) 자급률 A/B(%)
1967 6,947 4 1,100 8,014 86.7
1968 6,486 3 1,497 7,978 81.3
1969 6,307 6 2,389 8,577 73.6
1970 7,097 5 2,115 8,825 80.5
1971 6,842 11 2,883 9,861 69.4
✽농수산부, 『한국 양정사(韓國糧政史)』, 1978, 438쪽.

하지만 식량 자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표 ‘1967∼1971년 양곡 자급률 추이’에서 볼 수 있듯이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자급률은 오히려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이 추진되던 1960년대 후반은 식량의 완전 자급을 이루지 못하고 재해피해나 소비 증대에 따라 자급률이 급격히 낮아지는 모습을 반복하였다. 예측을 훨씬 상회하는 양곡의 수요 증가와 생산 증대의 상대적 부진으로 1964년에 천명하였던 식량 자급화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 들어 쌀의 품종 개량을 통한 식량 자급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농산물 수급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급변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가 식량 자급을 달성하고 있지 못하였던 1967년부터 1971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식량 수급이 과잉 공급을 보였던 시기였다. 1967년도에는 소련, 인도, 유럽, 미국 등 거의 모든 나라가 풍작을 기록하였다. 이 무렵부터 일본에서 미곡의 과잉 현상이 나타났고, 유럽에서도 농산물 과잉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곡물 재고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급속히 누적되었으며, 선진국은 과잉 농산물 처리에 부심하게 되었다. 미국은 생산 조정을 계속 실시하였고, 캐나다도 1970년부터 생산자의 생산 조정을 지향하여 정부 개입에 의해 약 50%에 달하는 휴경(休耕)을 실시하였다.357)농수산부, 앞의 책, 419쪽.

그러나 1971년까지 지속되었던 세계적인 식량 과잉 기조는 주요 수출국의 곡물 생산 억제와 세계적인 이상 기후 내습, 국제 곡물 시장에서 소련과 중국의 곡물 대량 매입 등으로 급변하였다. 1972년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이상 기후 현상으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주요 곡물 수출국은 물론 소련, 중국,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국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72∼1973년도 세계 곡물 생산량은 전년 대비 3%가 감산되어 전후 최대의 감산율을 나타내었다.358)농수산부, 앞의 책, 486쪽.

이에 미국을 위시한 식량 수출국은 국내 물가 안정과 곡물 재고 확보를 위해 농산물 수출을 제한 또는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73년 6월 미국의 대두(大豆)의 수출 규제 조치는 세계 유지(油脂) 시장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다른 식량 수출국의 수출 규제를 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1973년 이래 기상 이변과 ‘자원 내셔널리즘’의 대두 속에서 식량의 무기화 경향이 더불어 나타났고, 전략 물자로서 식량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부 각되었다.359)자원 내셔널리즘은 1973년 말의 유류 파동(oil shock)을 말한다. 중동 여러 나라의 석유 가격 대폭 인상 조치는 비료의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 사태를 유발시켜 곡물 증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농수산부, 앞의 책, 488쪽).

<표> 1967∼1971년 미곡 자급률 추이
단위 : 천M/T
연도 생산량 수출량 소비량 자급률
1967 3,919 113 3,954 99.1
1968 3,603 216 3,822 94.3
1969 3,195 755 3,946 81.0
1970 4,090 541 4,394 93.1
1971 3,939 907 4,777 82.5
✽농수산부, 『한국 양정사』, 1978, 438쪽.

같은 시기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식량 수입을 증대하는 상황이었다. 1960년대 초 500∼600천M/T에 불과하였던 양곡 도입량은 1960년대 말 2,000천M/T을 초과하였고 주곡인 쌀도 1966년 이후 계속 도입되어 1970년에는 590천M/T에 달하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외화 부담의 가중을 의미하였다. 1973년 이후 발생한 세계적인 식량 파동은 식량 증산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다.360)농수산부, 앞의 책, 498쪽. 이에 정부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72∼1976년) 동안 농업 정책의 최우선 과제를 주요 농산물의 증산과 주곡인 쌀의 자급에 맞추었다.

다수확(多收穫)을 위한 벼 품종 개발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6년(융희 1) 경기 수원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권업모범장은 재래종의 수집·평가와 일본에서 도입한 품종의 적응성 평가 등 수량을 높이는 연구에 집중하였다.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은 관개수가 잘 되는 곳에서는 잘 자랐지만 천수답(天水畓)에서는 생존 능력이 떨어지는 단점을 보였다. 반면, 재래종은 메마르고 염분이 함유된 경지에서도 탁월한 발아 능력을 보이고 싹이 나온 뒤부터 추수 시점까지의 기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었다.361)홍금수, 「일제 시대 신품종 벼의 도입과 보급」, 『대한 지리학회지』 제38권 1호, 대한 지리학회, 2003, 51쪽. 쌀 수확량은 재래종 이 10a당 240㎏ 내외, 도입 품종이 320∼36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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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시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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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후와 풍토에 알맞은 육성 품종 개발 사업은 1915년 인공 교배가 처음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본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한 뒤부터 신품종 개발에 보다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32년에는 국내 최초 육성 품종인 ‘남선 13호’가 탄생해 1940년대부터는 당시 전체 벼 재배 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 품종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국내 육성 품종의 보급은 점차 확대되어 1960년대에는 전체 벼 재배 면적의 7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품종 개발 목표의 최우선 순위도 수량성(數量性) 증대였으며, 내도복성(耐倒伏性)·내비성(耐肥性)·내병성(耐病性) 등 재배 안전성이 그다음 목표였다. 육성 품종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재래종이나 도입 품종보다 다소 향상되었지만 국민들의 절대 빈곤을 해결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362)농민신문 편집국 편저, 앞의 책, 66쪽.

국민 누구나 세 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통일계 품종의 출현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전통적인 자포니카(japonica) 품종과 열 대 지방의 인디카(indica) 품종 간의 원연 교잡(遠緣交雜)에 성공, 1971년에 준단간직립초형(準短稈直立草形)의 통일계 품종이 첫선을 보였다. ‘IR677’이라 부른 통일벼(정식 이름은 IR667-98-1-2)는 농촌 진흥청 연구원들이 필리핀 국제 미작 연구소(國際米作硏究所)의 지원을 받으며 헌신적인 노력과 연구를 기울인 결과 육성한 품종이었다.363)『조선일보』 1975년 10월 17일자.

이 품종은 다수확 품종으로 이름난 필리핀의 IR8에다 성숙이 빠른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품종 ‘유까라’ 그리고 대만 품종인 ‘대중재래 1호’를 인공적으로 교배시켜 이를 6대에 걸친 검토를 거친 뒤 그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품종을 선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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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벼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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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의 보급으로 1974년 쌀 생산 3,000만 석을 돌파하고 이듬해인 1975년 쌀의 완전 자급을 달성하는 개가를 이루었다. 지속적인 자급 달성에 이어 1977년에는 인도네시아에 쌀 7만M/T를 대여해 줄 정도로 쌀 증산을 이루었다.364)함영수, 『녹색 혁명의 제 성과와 지속화 문제」, 『농촌 경제』 제1권 2호, 한국 농촌 경제 연구원, 1978, 62쪽.

이 통일계 품종벼는 단위 면적당 쌀 수량성에서 여타 품종을 압도하였다. 10a당 생산량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던 자포니카 계통의 ‘진흥’보다 30% 이상 많았다. 1970년 초반 300㎏에 머물렀던 10a당 벼 평균 수량이 1976년에는 10a당 433㎏에 이르렀다. 1977년에는 10a당 벼 평균 수량이 500㎏에 육박하였고, 이 해 쌀 수확량이 4000만 석을 돌파하였다. 이는 세계 최고 기록인 일본의 447㎏보다 47㎏이나 더 많은 양이었다.

통일벼 보급과 생산이 처음부터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정부가 신품종에 대한 충분한 사전 검토를 하지 않고 ‘오로지 증산’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성급하게 보급한 측면이 있었다. 새 품종을 보급하 기까지에는 최소한 8세대(8년)를 지켜보고 이후 15년까지 결점을 보완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통일벼는 이와 같은 충분한 사전 검토와 적응력 검토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365)노중선, 「‘통일벼’가 준 농민 문제의 교훈」, 『민주 농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1973, 17쪽.

재배 결과 통일벼는 볏짚이 짧아 농가의 주요한 부업인 가마니, 새끼줄 등 고공품 재료로 이용하기에 부적합하였다는 점, 비료 투입이 일반 벼보다 더 많이 요구되었다는 점, 탈곡 과정에서 낱알이 잘 떨어져 전통적인 탈곡 방식을 사용할 때 손실이 컸다는 점, 냉해(冷害)에 약하고 뿌리가 깊이 내리지 않아 논물의 온도가 33도 이상이 되면 적고(赤枯)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 등이 커다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여기에다 밥맛이 떨어졌다는 것도 문제였다.366)노중선, 앞의 글, 17쪽. 한편 통일벼의 확대는 통일벼가 기후 조건의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과 함께 수리 문제에 영향을 받았다. 많은 비료의 투입을 요구하는 통일벼는 수리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했다. 1970년대 초반 수리 전답은 전국 논 면적의 70%를 초과하지 못하였고, 이는 통일벼 확대에 주요한 장애 요인 중에 하나였다(권택진, 「녹색 혁명을 위한 통일벼의 성과와 제한성」, 『농업 경제 연구』 16호, 한국 농업 경제 학회, 1974, 21∼22쪽). 통일벼는 쌀알이 길고 찰기가 적으며 부석부석한 인디카 계통(이른바 안남미)의 IR8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밥맛이 떨어졌던 것이다.367)이에 이후 미질을 개선한 ‘밀양 23호’, ‘밀양 30호’ 등의 후속 품종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단점이 초래한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초기 통일벼 확대를 위해 지방 공무원은 기존 일반 벼를 모두 뽑아 버리고 통일벼를 심도록 강권하기도 하였는데 수확기 농민이 손에 쥔 것은 쭉정이뿐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368)『동아일보』 1972년 10월 2일자. 1971년 벼가 붉게 말라 죽는 적고 현상, 1972년은 한해, 수해, 냉해, 1974년 벼의 줄기와 잎이 갑자기 말라 죽는 입고병(立枯病)과 냉해, 1975년은 잎이 시들어 말라 죽는 급성 위조병(萎凋病)과 벼멸구의 창궐(猖獗) 등, 매년 계속되는 재해 앞에서 통일벼 불가론(不可論)이 제기되었다. 심지어는 농림부에서조차도 통일벼 재배를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벼는 1977년까지 대량 보급되며 쌀 자급이란 목표 달성에 일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벼의 명칭이 지배 권력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농촌 진흥청은 1975년 기존 통일벼(IR667)를 개량하여 논 이모작(二毛作) 재배와 밥맛이 개선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벼에 ‘유신(維新)’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유신’이 도시의 지식인과 학생에게는 독재를 상징 하는 단어였지만, 농촌에서는 신품종에 이름을 붙여 증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새로운 혁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품종은 기존 통일벼보다 수확량이 13%나 많고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이모작이 가능한 품종이었다.369)『조선일보』 1975년 4월 20일자. ‘통일’이나 ‘유신’ 등과 같은 벼 품종명은 지역적 특색이나 전통적 특색을 살린 벼 품종명과 대비된다 하겠다.

통일벼는 1978년 이후 연이은 병충해와 재해로 인해 벼 품종으로의 생명력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1978년에는 도열병(稻熱病)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던 ‘노풍벼’ 사태가 빚어졌고,370)‘노풍벼’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신품종 볍씨의 명칭이다. 새로 개발된 이 품종은 단보당 750㎏의 생산량을 거둔다고 보고되었고, ‘기적의 볍씨’로까지 지칭되었다. 하지만 이 품종은 목도열병에 치병적인 약점을 보였고, 정부의 권장에 따라 신품종을 심었던 농가들이 수확기에 농사를 망치는 상황이 속출하였다. 1979년에는 호우와 홍수 및 태풍의 피해를 입었으며, 1980년에는 유례없는 냉해로 흉년이 3년간이나 이어졌다. 이로 인해 통일계 품종에 대한 농민들의 선호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소비자의 요구 또한 자포니카 계통 수준의 미질(米質)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벼 품종 개량의 우선순위도 다수확에서 품질 향상으로 차츰 바뀌게 됐다. 개량된 자포니카 양질 품종으로 ‘동진벼’, ‘화성벼’ 등의 39개 품종이 개발·보급되었고, 통일계 품종은 수확량이 605㎏까지 이른 ‘용주’를 끝으로 연구가 중단돼 1992년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371)농민신문 편집국 편저, 앞의 책, 67쪽.

1990년대에는 본격적인 개방화 시대를 맞아 우리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밥맛이 좋으면서 수확량도 많은 품종 개발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농약을 적게 쓰는 친환경 품종 개발 등에도 많은 노력이 투여되었다. 그 결과 고품질 품종이 무려 54개나 개발·보급됐고 쌀 수량성이 10a당 평균 516㎏으로 향상되었다. 1990년대 개발된 고품질 다수성 품종 가운데 10a당 수확량이 550㎏을 넘는 품종도 ‘화동벼’, ‘수라벼’, ‘새추청벼’, ‘신동진벼’ 등 12개나 되는 등 우리 벼의 품질과 수량성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위기와 통일 이후에 대비한 초다수성 품종 개발에도 노력을 경주하여, 수확량은 10a당 735㎏에 이르는 품종을 새롭게 개발하였다.372)농민신문 편집국 편저, 앞의 책, 67쪽.

그런데 1970년대의 ‘녹색 혁명’은 정확히 말하면 ‘식량의 자급’이 아 닌, 주곡인 ‘쌀의 자급’ 달성을 이룬 것이다. 이 시기 정부의 식량 정책 목표는 ‘식량 자급’에서 ‘주곡 자급’으로 후퇴하였다. 그 결과 주곡의 자급을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량 자급률은 하락 추세가 오히려 강화되며 식량 수급 정책의 왜곡이 진행되었다. 1965년 93.9%에 달하였던 식량 자급률은 1975년 73%로 저하되었고, 1991년에는 37.5% 수준까지 떨어졌다.373)한국 농어촌 사회 연구소, 『누구나 알아야할 농업 문제 90문 90답』, 창작과 비평사, 1993,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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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이후 농산물 수입량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여, 1980년 수입량은 1965년에 대비하여 26배 이상으로 증대하였다.374)황수철, 「농산물 수입 개방의 배경과 실태」, 『한국 농업·농민 문제 연구』 Ⅰ, 한국 농어촌 사회 연구소, 1988, 348쪽.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기간을 한정하여 볼 때 미곡의 생산은 350만 톤에서 547만 톤으로 크게 증가한 반면, 그 밖의 식량 생산은 302만 톤에서 130만 톤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는 쌀을 제외한 식량 재배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375)황수철, 앞의 글, 361∼362쪽.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식량 문제 또는 요즘 식으로 말해서 먹을거리 문제는 경제학상 비교 생산비의 원리나 (국제) 시장 가격의 원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식량은 크게는 국가 안보와 직결되고, 작게는 개개인의 건강 및 생존이 달려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 식량 수출국이 식량을 언제든지 전략적 무기로 활용할 수 있음은 1970년대에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실이며, 농산물의 안정성이 수출국과 수입국 양국 간에 철저히 검증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농산물의 수입 개방은 국민의 생명을 유해 농산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식량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고려할 때 시장 경쟁의 논리를 농업 경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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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수입 개방 반대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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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문화적 측면에서 쌀 개방의 의미를 살펴보자. 쌀 개방에 반대하여 한편에서는 식량 특히 쌀이 지닌 기능, 식량 주권의 측면, 문화적 정체성의 측면, 환경 친화적 요소가 강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농업도 시장 경쟁 논리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따라서 쌀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견해가 반대 논리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대 논리는 정책 결정자의 수준에서만 제기되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식량 주권, 문화적 정체성 등을 강조하는 것을 시장 경쟁 논리에 근거하여 농민들에 대한 과보호에 집착하는 것이자 애국심에 호소하는 구태의연한 행태로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376)인터넷 댓글 중 실례를 두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헛소리 그만해라 우루과이 라운드 때 농민들 다 죽는다고 난리쳤다. 죽었냐? 칠레와 FTA 체결할 때도 다 죽는다고 난리쳤다. 죽었냐? 경쟁해라. 생산성? 더 좋아진다. 지금 농산물 품질? 우루과이 라운드 때보다 좋아졌잖아? 경쟁에서 지레 겁먹고 정부 욕하지 마라. 우리나라 세계 12권의 무역국이다. 농민 살고 나머지 죽으면 니들이 먹여 살릴 거냐? 농산물 가격 내릴 거냐? 더 올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우리나라 농민들은 중산층 이상에게 팔아먹을 품질의 농사를 해라. 돈 없는 서민들은 싼 외국 농산물 먹을란다. 서로 살아야지!” ② “식량 주권 논리 지겹다. 이 나라의 주권이 식량밖에 없냐? 쌀값이 아무리 비싸도 국내산 사먹어야 주권이냐? 식량도 경제 논리를 따라야 한다. 허구한 날 만약 어쩌구저쩌구 큰일 날 것처럼 하지 마라. 그러면서 왜 국방 투자는 반대하냐? 만약 전쟁나면 어쩌려구? 같은 논리다. 제발 외국인 불러 놓고 권위에 기대는 인터뷰도 그만하자 지겹다. 니네가 얘기하면 끌발 안 서서 그러냐?”

쌀 개방 반대와 식량 주권 확보 주장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 동일한 반응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쌀을 ‘겨레의 혼이자 피와 살’이라고 언급하며, 쌀 개방 반대를 위해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정서를 동원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캘리포니아산 쌀의 밥맛에 길들 여진 이들은 이 쌀을 찾을 수 있다. 반대로 비싸더라도 국내산 무공해 쌀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며, 국내산이냐 수입산이냐를 가리지 않고 저가의 쌀을 찾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쌀은 제과 공장에서 찍어 내는 빵이나 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쌀은 1945년 이후의 현대사만을 놓고 보더라도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우리나라 사람의 생활 및 의식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전통과 근대, 지배와 저항, 빈곤과 풍요, 자립과 종속이 교차하는 한가운데 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는 쌀이 단순히 과거 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여전히 동시대 우리의 삶과 의식 형성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쌀은 매일 식탁에 올라 가족의 유대를 확인하는 수단이 되고 있고, 공동체의 혈연적 유대를 돈독히 하는 제사상에 오르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에 저항하는 문화적 상징으로서, 농민과 도시 소비자를 포함한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모색의 현장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쌀’은 이 모든 의미들의 총합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경제적 논리로 쉽게 재단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밀과 수입산 쌀 또는 정크 푸드가 쌀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문화적 의미까지 대체할 때가 올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문화적 횡적·종적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경제적 생존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음을 의미하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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