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을 내면서
한정수

“농사, 거 힘든 걸 뭐 하러 지으려고 그래,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잡고 잘 살어.”

우리는 이런 말을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주위에서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물론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농사는 언제나 고역에 불과한 것이고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려고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도 한번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땀 흘려 재배하고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기 힘들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사무실 근무 등을 주로 하는 도시 생활이 확대되면서 우리는 땅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마찬가지로 그 땅에서 농부들이 피땀 흘려 재배한 농작물의 가치나 농부들의 노력 등에 대해서도 대강 보아 넘길 뿐이다. 그저 대형 마트, 시장, 슈퍼 등에서 진열된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사다 먹으면 족하다. 더더구나 요즘은 방 안이나 사무실에서도 인터넷만 연결하면 전국 각지의 특산물 등을 몇 번의 클릭과 전자 결제를 한 다음 택배로 쉽사리 받아서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마트에 가면 칠레산 포도, 뉴질랜드산 키위, 필리핀산 바나나, 캘리포니아산 오렌지 등등 맛난 세계 각지의 과일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만큼 땅과 환경, 농사와 농부 등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줄어들었다. 농업은 그래도 여전히 국민의 생명, 건강과 직접 연관되는 식량 산업이다. 우리의 관심은 소홀해졌는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는 여전히 중요시하고 있고 농민과 농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물론 세계 무역 체제하에서 지나친 지원은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 시장 개방 압력에 늘 부닥치고 있기도 하다.

아직 농촌은 우리의 현실이자 꿈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월 대보름 때에 꽹과리 풍악 울리면서 사람들 모여 윷놀이, 쥐불놀이 등을 흥겹게 하면서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아지랑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뻐꾸기 정겹게 울 때 이랴 이랴 소 등을 치면서 밭갈이 논갈이 하면서 파종과 모내기로 분주한 곳이다. 우리네 삶과 피땀의 결과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오는 생명의 땅이기도 하다. 농사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탯줄과 같은 생명선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수없이 흘린 굵은 땀방울이 쌓여 이루어 놓은 결과가 바로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인 것이다.

우리의 농업 문화는 이렇듯 파종, 김매기, 수확이라는 삼농(三農)의 업을 짊어진 농부들의 땀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농부들은 때로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오밀조밀 농작물을 심어도 보고, 보(洑)를 막아 관개(灌漑)도 하였다. 힘든 노동을 잊고 즐거움을 찾기 위한 노래와 놀이도 만들어 냈다. 또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은 농민의 안정과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진휼(賑恤) 및 권농(勸農) 정책을 펴 성과를 일구어 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우리의 농업 문화는 땅, 기후 등의 환경 속에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전근대 농민과 그들의 생활과 농사짓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우리의 농업 문화를 짚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을 펴낸 큰 목표이다.

우리나라는 기후대(氣候帶)로 볼 때 냉대에서 온대에 걸쳐 있다. 따라서 추위와 더위의 차가 심하다. 여름에는 열대 같은 더위와 긴 장마, 겨울에는 한대 같은 혹한과 강한 계절풍, 봄과 가을에는 심한 기온의 일교차(日較差)와 변화가 큰 날씨를 경험한다. 최근에는 전반적으로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여름의 강수량이 연 강수량의 약 60%를 차지한다. 또한 지형상 한반도는 남북으로 길어 남북의 기후 차 때문에 작물의 품종이 다르기도 하다.

한반도의 지형은 기본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으며 하천은 평탄하게 발달해 있지 않다. 비교적 높은 해발 500∼1,000m의 산지는 국토의 약 20%에 불과하고, 해발 200∼500m의 낮은 산지가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하천은 길이에 비해 발원지(發源地)의 해발 고도가 높아 경사가 급하다. 또한 유역 면적이 좁다. 하상 경사가 급한 데다가 유역 면적이 좁으므로 집중 호우 때는 홍수가 빈발하는 반면 지속 기간은 짧은 편에 속한다. 주요 평야는 대개 큰 강을 끼고 그 하류에 발달되어 있다. 하천 하류의 넓은 들 주변에는 작은 평야라 할 구릉지(丘陵地)가 나타나기도 한다.

어쨌든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 등을 놓고 본다면 전체적으로 농경에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역적 특색을 갖는 농경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농경을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읍락(邑落)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농경을 하면서 자기 소유의 토지 경작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곧 농사는 주된 식량 생산 기반이 되었다. 더불어 국가는 그러한 농업 생산력을 안정·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민들 역시 생계와 신분 상승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농사 기술은 이러한 농민과 국가의 역할이 다각화되고 많아지면서 향상되어 갔다. 농지 개간은 산간(山間), 해택(海澤), 도서(島嶼) 등지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전근대 사회의 농민과 그들의 생활, 그리고 농사짓기는 바로 한반도의 기후 및 지형 환경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각 시대의 국가와 농민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불을 놓아 잡초 제거와 밭갈이를 대신하는 화경(火耕)을 기초로 석제와 목제 농기구를 가지고 조, 기장, 피 등 주로 잡곡을 재배하였다. 생산성은 매우 낮았다. 때문에 채집(採集), 어로(漁撈), 수렵(狩獵)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보리, 밀, 콩 등 다양한 잡곡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도 보급되었다. 농경문 청동기(農耕文靑銅器)의 문양이나 진주 대평리 유적의 경작 유구(遺構)를 통하여 당시 경작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경작지에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비교적 넓은 이랑에 조파(條播)하여 잡곡을 재배하였다.

청동기시대 농경에서의 커다란 변화는 벼농사의 보급이었다. 여주 흔암리 유적을 비롯하여 여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탄화미(炭化米) 및 볍씨가 박힌 토기가 발견되었고, 울산시 무거동 옥현 유적과 논산 마전리 유적 등에서 당시의 수전(水田)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에 한반도 중·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 철기가 보급되면서 일부 농기구를 철제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삼국 초기까지 농기구의 효율성이 높지 않았고 보급도 제한적이었다.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확대되었다. 이때에 갈이 도구로 U자형 따비가, 수확 도구로 낫이 널리 이용되었다. 이 밖에 철제 괭이나 쇠스랑 등도 농사에 쓰였다. 우경(牛耕)은 축력(畜力)을 이용하여 갈이 작업을 하는 것으로 농업 기술상의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우경을 이용하여 2세기 중·후반부터 우경으로 농사를 지었다. 신라와 백제는 4∼5세기경에 우경을 농사에 활용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고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수리 시설을 확충한다든가, 농민 안정을 위한 진휼 등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향상된 제방 축조술을 기초로 거대한 수리 시설을 건립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이다. 거대한 수리 시설을 건설함 에 따라 경사지를 비롯한 건전(乾田) 지역이 수전으로 널리 개발되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농업에 대한 전반적 인프라 즉 이념이나 권농 정책, 제도, 지원 시스템 등이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농민들은 나름대로 농사의 때를 파악하고 작물 돌려짓기를 핵심으로 하는 작부(作付) 체계나 노동력 동원 방식을 개선하면서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안정되지 못한 면이 있었고 특히 일부 지배층의 침탈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업과 농민에 대한 전반적 지원 시스템의 마련이 필요하였다. 고려 왕조 이후 이에 대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농업이 산업 기반의 중심이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도 농업 중심의 정책을 위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왕조시대에는 이것이 정치 이념과 정책의 기본 기조였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왕정(王政)에서 우선해야 하는 바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즉, 중농(重農)의 이념을 가지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즉 애민(愛民)의 마음을 항상 가슴에 담으면서 권농 정책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물론 농민들은 새로운 농사 기술을 권장하거나 저수 관개 시설을 만들고 수리하거나 농사 때에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다른 잡역(雜役)에 동원하지 않거나 종자(種子)를 제공하거나 농기구와 농우를 제공하거나 황무지, 묵은 땅 등을 개간하거나 연해지(沿海地) 등을 개척하거나 하는 등의 권농 정책에 힘입어 농업 생산력의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산간을 개간하는 일이 많았고,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연해 지역이나 도서 지역의 개간 역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천방(川防)이나 제언(堤堰) 축조가 늘어나면서 벼농사가 확대되었다. 수경 직파법(水耕直播法), 건경 직파법(乾耕直播法) 등이 벼농사에 이용되었고 이앙법(移秧法)도 조심스레 보급되었다.

이앙법 보급은 장단점이 있었다. 천수답(天水畓)이 많은 관계로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는 실농(失農)의 위험성이 높았다. 그러나 관개 시설 구비 등으로 물 문제가 해결될 때는 이앙법의 효과가 뛰어났다. 벼농사에서 이앙을 하지 않고 직파를 행하였던 조선 중기의 양반 지식인 오희문(吳希文)은 밭농사에서는 보리, 조, 콩 등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앙으로 벼를 재배한 17세기 인물인 이담명(李聃命)은 보리, 조, 콩, 면화까지 농사를 지었다. 오희문은 늘상 제초 등의 문제로 일손 부족 사태를 겪었으나 이앙법을 행하였을 때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적었다. 따라서 이앙법의 확산 보급은 하나의 추세가 되었다.

밭작물 재배법에서는 그간 이랑에 파종하여 재배하던 농종법(壟種法)에서 고랑에 파종하는 견종법(畎種法)이 확대되었다. 17세기를 전후한 때의 변화였다. 농종법을 적용하는 큰 이유는 여름철 우기(雨期)에 빗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랑에 파종하고 고랑으로 배수를 하기 때문에 가뭄이 올 경우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를 보완하면서 수확을 높여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견종법이었다. 그것은 고랑에 밭작물을 파종하고 곡식이 어느 정도 자라면 이랑 부분의 흙으로 곡식의 뿌리 부분을 덮어 주는 북주기 작업이 핵심이었다. 북주기를 해주지 않을 경우 여름철 장맛비에 작물은 썩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농업 생산력 증진을 위한 국가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우리 농업 기술을 정리하여 효율적 농법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잇따라 국가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농서(農書)를 편찬하였다. 『제민요술(齊民要術)』, 『농상집요(農桑輯要)』 등 중국의 농서를 이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농사직설(農事直說)』, 『금양잡록(衿陽雜錄)』 등 우리의 농업 기술과 농업 현실을 담은 농서의 편찬과 보급이 이를 말해 준다. 국왕은 가뭄 등 재해가 오면 신료와 지방에 좋은 방안을 구하는 구언교(求 言敎)를 내렸다. 조선 후기에는 이에 따라 각 지역별로 『천일록(千一錄)』과 같은 농서 편찬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지방관의 적절한 권농 정책 역시 한몫을 하였다. 지방관은 일정 기간 국왕의 위임을 받아 지방을 통치하였다. 그들은 지방을 발전시키고 지방민을 교화할 의무를 지고 있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권농(勸農)이었다. 농민 역시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새로운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적절히 때에 맞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의 이상은 물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실현이었다. 말하자면 자영농(自營農)이자 부농(富農)이 되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밭농사, 논농사 등에 다양한 농법을 적용하였다. 곡물이나 채소류, 과실수, 닥나무 등을 재배하여 농사의 다양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자 상품 작물(商品作物)의 재배가 늘어났다. 작물 재배의 집약화·다각화가 전개된 것이다. 면화, 모시, 담배, 인삼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곡식 농사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다만 경지 면적의 축소로 인한 수입 감소 부분을 상품 재배 작물을 통해 만회하려 한 것이었다.

고려 및 조선 사회에서는 유통 경제가 이루어짐에 따라 화폐 사용을 시도하였으나 그리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 지방 장시(場市)가 열렸다. 즉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米), 면포(綿布) 등을 중심으로 포화(布貨) 경제가 성립되었고, 종이돈인 저화(楮貨)를 쓰기도 하였다. 유통 경제가 발달하자 농민들도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될 수 있었고 부자가 되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지배층의 다양한 경제적 강제에 시달렸다. 이중 삼중으로 부과되는 각종 세금을 내야 했고, 지주 전호제(地主佃戶制)가 시행될 때는 높은 소작료를 지불하여야 했다. 정부가 토지 및 조세 정책 등을 통하여 이러한 것을 제한하지 못하거나 농민들 스스로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고리대금(高利貸金)을 쓰게 될 경우 이들 농민의 신분 추락은 끝없는 것이 되 었다. 그들은 살가운 고향과 등지고 유리걸식(遊離乞食)하거나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대토지 소유자는 대부분 지배층이었다. 지주 전호제 경영이 확대되면서 권력과 자금력, 노동력 동원 등에서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른바 농장 경영이 이루어지자 그것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여 원래의 경작자나 소유자를 찾아 돌려주는 전민변정(田民辨定)의 차원을 넘어 사전 혁파론(私田革罷論)이나 새로운 토지론 등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시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인구 증가가 눈에 띄게 이루어졌고 전답도 늘어났다. 적어도 17세기를 전후한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 양안(量案)을 보면 대토지 소유는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재산을 상속할 때 자녀가 고르게 물려받는 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이 그 원인 중 하나였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토지 소유가 영세(零細)해지는 것을 우려한 양반 지주들은 종법(宗法) 질서에 의탁하여 남녀 차등 상속(男女差等相續) 관행을 정착시키기도 하였다. 장자 우대 상속제를 도입함으로써 종가형 지주가 출현하기도 하여 대토지 소유 감소 추세는 늦춰졌다.

한편 많은 농민은 자영농(自營農)에서 소농(小農)으로, 또 빈농(貧農)으로 전락하거나 심하게는 자기 땅을 고리대금에 의해 빼앗겼다. 혹은 투탁(投託), 기진(寄進) 등을 통해 땅 없는 농민이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였고,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생겼다. 재산 상속이 자녀들에게 균등 혹은 차등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토지 소유는 점차 감소되어 갔다. 소작을 병행하거나 고농(雇農)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생계를 꾸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세 소농 즉 빈농의 증가는 어느 시대이건 농업 기반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 생산은 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새싹이 자라나는 즈음에 가뭄이 지속되거나 서리 혹은 우박이 내리면 큰일이었다. 홍수나 태풍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농민 들은 실농하게 되고 자칫 큰 빚을 떠안기 마련이었다. 장기간 지속되면 기근이 드는 것이었고, 게다가 전염병까지 돈다면 그것은 사회 혼란으로 이어져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치닫곤 하였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환곡(還穀), 흑창(黑倉) 등으로 대표되는 진휼 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정부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운 농사를 즐거이 해 나가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기곡(祈穀) 관련 의례를 행하였다. 신라 등에서는 선농(先農)·중농(中農)·후농(後農)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고려시대 이후 원구단(圜丘壇)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종묘에서는 왕실 조상신들에게, 사직에서는 토지의 신에게, 선농단에서는 농사의 신에게, 선잠단(先蠶壇)에서는 농잠의 신에게, 농사와 관련 있는 풍사(風師), 우사(雨師), 뇌신(雷神), 영성(靈星) 등에 제향을 올렸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날짜를 정하여 기곡의 제향을 행하였고 때로는 국왕이 직접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친경(親耕)을 행하여 농사의 모범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백성들 역시 다양한 마을제 등을 통해 풍년을 기원해 나갔다.

그런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자연재해였다.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한 것은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 여기에 대해 정부는 다양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재이(災異) 대책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주된 것은 진휼이고 다른 것은 제사를 통해 하늘과 인간, 그리고 땅이 소통하지 못함을 풀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바로 비가 오기를 비는 행사인 기우(祈雨)를 중심으로 하는 기양(祈禳)의 제사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왕이 중심이 되어 기우나 재액을 없애기 위한 도량(道場)을 열었고, 산천제(山川祭)와 초제(醮祭)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 도량의 횟수는 극도로 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밖의 것은 대체로 올려졌다.

이렇듯 전근대 농민들의 존재 양상과 그들의 생활, 그리고 이들을 지원한 지배층의 노력에 힘입어 농업 생산은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농사 를 짓는 농경지는 산간, 해택, 연안(沿岸) 등으로 개간 확대되었고, 일정 농경지에서 작물 재배를 쉬어 지력(地力)을 회복케 하는 휴한(休閑) 농법은 매년 경작 가능한 상경(常耕) 농법으로 전환되었다. 더구나 작물 재배법이나 시비(施肥)의 개선 등 농법이 새로 개발 적용되면서 노동력은 절감되어 다른 농사에 힘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토지 회복이 빨라지면서 더 많은 작물 재배와 생산성 향상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절감된 노동력과 토지의 회복력으로 농업과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부가 창출되었다. 그것은 때로 인구 증가, 상품 작물의 개발과 교역, 새로운 도시 문화를 낳았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해체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2009년 5월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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