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2. 삼국시대의 밭농사
  • 4∼6세기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
전덕재

청동기시대에는 잡곡을 재배할 때 주로 목제와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따비, 괭이, 칼(刀子), 낫 등을 철제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1호분에서 두 종류의 따비가 출토되었다. 하나는 폭이 좁고 길며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이 좀 더 넓고 짧은 것이다. 둘 다 목제 자루가 끼워져 있으며, 자루와 날은 140도 각도로 휘어진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49)이건무 외, 「의창 다호리 유적 발굴 진전 보고」, 『고고학지』 1, 한국 고고 미술 연구소, 1989. 앞의 것은 두 갈래로 갈라진 부분만을 제외하면, 농경문 청동기에 보이는 따비와 유사하다. 비슷한 모습의 따비가 삼국시대 초기 무덤인 경주 조양동 고분, 울산 하대 고분군, 경남 진주 대평리 유적 등에서도 출토되었다.50)김도헌, 「고대의 철제 농구에 대한 연구-김해·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부산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 김도헌, 「고고 자료로 본 고대의 농경」, 『선사·고대의 생업 경제』, 제9회 복천 박물관 학술 발표회, 2005. 한편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인 다호리 유적과 평북 위원군 숭정면 용연동 유적에서 철제 낫과 괭이 등이 출토되었고, 용현동 유적에서 반달 모양의 철칼이 함께 조사되기도 하였다.51)梅原末治·藤田亮策, 『朝鮮古文化綜鑑』, 養德社, 1947. 청동기시대에 돌로 만들던 괭이, 낫, 반달 돌칼을 초기철기시대에 철로 만들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주는 유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아직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목제나 석제 농기구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목제 괭이가 다수 출토되었고, 4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도 돌도끼, 돌끌, 숫돌과 같은 석제 공구와 아울러 목제 가래, 괭이, 절굿공이 등이 발견되었다. 물론 이 무렵에 사용한 철제 농기구라도 효율성이 낮아서 파종 시기나 수확 시기 등 농사철을 제때에 맞추기 위해서는 집중적이고 집단적인 노동력 투입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사람들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52)2∼3세기경까지 동예 지역에서는 산천을 경계로 하여 저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침입할 수 없었고, 만약 함부로 침입하면 그 벌로 소나 말, 생구(生口, 노비)를 부과한 책화 제도가 남아 있었다. 동예 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관계가 중시되었음을 반영하는 자료이다. 다른 지역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 나라 북방으로서 (중국의) 군(郡)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에는 그런 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노비와 같이 서로 모여 산다.”라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기록을 통하여 삼한 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관계가 중시된 실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전덕재, 『한국 고대 사회 경제사』, 태학사, 2006, 242∼144쪽).

확대보기
따비와 낫
따비와 낫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철제 농기구
철제 농기구
팝업창 닫기

4세기 이후에 철기 제작 기술의 발달로53)4세기 초부터 주조와 단조 방법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경성(硬性)·전성(展性)을 지녀 충격에 강하고 날 부분이 예리한 농구의 생산도 가능하였고, 경주시 황성동 제철 유적은 제철(製鐵)-주조(鑄造)-제강(製鋼)-단야(鍛冶)의 일괄 공정을 갖추어서 철제 도구를 대량으로 생산하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철제 농기구의 개량이 촉진되고, 보급도 확대되었다.54)東潮, 「朝鮮三國時代の農耕」, 『橿原考古學硏究所 考古學論集』 4, 奈良縣立橿原考古學硏究所, 1979 ; 김광언, 「신라시대의 농기구」, 『민족과 문화』I, 정음사, 1988 ; 김재홍, 「신라 중고기의 촌제(村制)와 지방 사회 재편」, 『한국사 연구』 72, 한국사 연구회, 1991 ; 이현혜, 「4∼5세기 신라의 농업 기술과 사회 발전」, 『한국 상고사 학보』 8, 한국 상고사 학회, 1991 ; 앞의 책 ; 천말선, 「철제 농구(鐵製農具)에 대한 고찰-원삼국·삼국시대 분묘 출토품을 중심으로」, 『영남 고고학』 15, 영남 고고학회, 1994 ; 김도헌, 「고대의 철제 농구에 대한 연구-김해·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부산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이때는 주로 중국에서 사(耜)라고 부르는 농기구와 유사한 형태에다 U자형 따비 날을 결합시킨 농기구로 갈이 작업을 수행하였다. 목사(木耜)는 목뢰(木耒)의 날 부분을 편평(扁平)한 판상 날로 만들어 삽과 같은 모양을 한 농기구이다. 이것에 철제의 따비 날을 접합하여 만든 농기구를 일반적으로 U자형 따비라고 부른다. 크기는 대부분 길이 약 15∼20㎝ 안팎, 너비 15∼20㎝로 삽, 가래, 괭이 등의 용도로 쓰기도 하나 주로 땅을 일구는 용도로 사용하였다.55)김광언, 앞의 글, 50∼53쪽. 현재의 모습으로 추정해 보면, 손 잡이와 더불어 밭을 갈 때 발로 힘을 주어 누를 수 있는 횡목을 가로 끼워 만든 자루의 끝, 즉 삽과 같이 생긴 부분에 U자형 따비 날을 부착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가로 끼운 손잡이를 옆으로 돌려 흙을 떠엎은 뒤에 뒤로 물러나면서 땅을 일구는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U자형 따비로 밭갈이를 하면서 날이 좁고 긴 따비 종류보다 더 많은 양의 흙을 떠엎는 것이 가능하였고, 그에 따라 갈이 작업도 효율성이 배가되었다. 여기에다 철제 괭이와 쇠스랑의 보급도 확대되었다.

확대보기
U자형 따비 도면
U자형 따비 도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따비 날 도면
따비 날 도면
팝업창 닫기

이 시기에는 낫의 보급으로 수확 도구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압록강 중류, 두만강 유역 등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지에서 철제 칼과 낫이 함께 출토되었다. 다호리 고분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낫은 삼국시대 초기의 유적에서 소량으로 출토되다가 4세기 초 이후의 한반도 전역에 걸친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상도 지역에서는 4세기 초 이후에 수확 도구로 낫을 널리 사용하였다.56)이현혜, 앞의 글, 1991 ; 앞의 책, 54쪽. 더욱이 낫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날이 곧게 뻗은 형태의 것과 약간 곡선을 이룬 형태의 것으로 크게 나뉘는데, 전자는 날과 나무자루가 직각으로 연결되어 곡식을 수확할 때에 주로 사용하였고, 후자는 날 부분 전체가 곡선을 이루거나 뾰족한 날 끝 부분만이 안으로 약간 구부러져서 수확뿐만 아니라 초목을 벨 때에도 썼다. 특히 후자와 같은 종류는 곡물이 미끄러지지 않고 구부러진 부분에 힘이 집중되어 곡물을 매우 효과적으로 절단할 수 있다. 또 날 끝 부분이 뾰족하고 안으로 구부러져 다른 한 손이 다칠 염려가 없고, 작업할 때에 곡물 사이로 잘 헤집고 들어가 작업 능률을 높여 주었다.

반달 돌칼이나 철제 칼은 이삭을 하나씩 자르는 도구이다. 그래서 많은 양을 한꺼번에 수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수확하는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 때문에 자칫 수확 시기를 놓쳐 이삭이 땅에 떨어지고, 또 완전히 익기 전에 수확하여 곡물 건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비록 작황이 좋더라도 그 기간 동안에 적잖이 썩어서 버리게 된다. 그러나 낫을 사용함으로써 한꺼번에 여러 포기를, 그것도 줄기째 벨 수 있어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수확기에 노동력의 절감이 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벼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짚은 수확한 뒤에 가축의 사료, 연료, 퇴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수공업 재료로도 활용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확대보기
각 지역에서 발견된 낫
각 지역에서 발견된 낫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각 지역에서 발견된 낫
각 지역에서 발견된 낫
팝업창 닫기

4세기 이후 U자형 따비(갈이 작업), 괭이, 쇠스랑(정지 작업과 중경 제초 작업), 낫(수확 작업)의 보급에 따라 농업 생산 기술에서 진전이 있었지만, U자형 따비 역시 인력을 기초로 밭갈이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우경은 인력 대신 축력을 이용하여 밭갈이를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농업 기술의 진전이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가 일찍부터 우경으로 밭갈이를 하였다.

지금까지 고구려 지역에서 보습이 여럿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지안(集安) 유림향(楡林鄕) 지구촌(地溝村) 칠보구(七寶溝) 남산(南山) 출토 보습,57)集安縣文物志編纂委員會, 『集安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209쪽 ; 이현혜, 「한국 고대의 여경(犁耕)」, 『국사관 논총』 37, 국사 편찬 위원회, 1992 ; 앞의 책, 176∼177쪽. 지안 태왕릉(太王陵) 서측(西側) 출토 보습,58)集安縣文物志編纂委員會, 앞의 책, 209∼210쪽 지안 동대자(東臺子) 건축 유지(建築遺址) 출토 보습,59)集安縣文物志編纂委員會, 앞의 책, 209∼210쪽 푸순(撫順) 고이산성지(高爾山城址) 출토 보습,60)撫順市文物工作隊, 「遼寧撫順高爾山古城址調査簡報」, 『考古』 1964-12, 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 여호규, 『고구려성』 Ⅱ-요하 유역편-, 국방 군사 연구소, 1999, 154∼155쪽 ; 1963년도 발굴에서 보습 두 개와 볏 한 개를 발견하였다. 보습 가운데 하나는 주조품으로 삼각형이고, 앞면은 평평하고 곧은 반면 뒷면 중앙에 돌기가 있어 삼각형 홈을 이루고 있다. 앞면이 뒷돌기에 비해 조금 긴 편인데, 양면에 삼각형 구멍이 한 개씩 있다. 길이 34.5㎝, 상단의 너비 32㎝, 높이(앞뒤 너비) 7㎝, 홈의 깊이 18㎝이다. 다른 하나의 보습 형태도 이와 비슷한데, 날 부분만 남아 있다. 한편 볏은 주조품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타원형에 가까운 편인데, 앞면은 활처럼 휘었고, 뒷면은 불룩 튀어나왔으며,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길이 42㎝, 너비 30㎝, 두께 0.6㎝이다. 청원(淸原) 영액문(英額門) 산성자(山城子) 남파하(南坡下) 출토 보습,61)陳大爲, 「淸原縣英額門山城子調査記」, 『遼寧文物』 1982-3, 1982 ; 여호규, 앞의 책, 202∼203쪽 ; 여기서 출토된 보습은 길이 27㎝, 너비 20㎝, 입구 두께 6㎝이다. 평양시 상원군 고구려 석실분 출토 보습,62)리명관, 「평양시 상원군 일대의 고구려 무덤 조사 발굴 보고」, 『조선 고고 연구』 1986년 3기, 사회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1986.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남평양 유적 출토 보습,63)손영종,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1990, 274쪽. 여기서 출토된 보습의 길이는 80㎝, 너비는 60㎝였다고 하였다. 아차산 제4 보루 유적 출토 보습64)서울 대학교 박물관 등, 『아차산 제4 보루-발굴 조사 종합 보고서-』, 2000.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지안 지역에서 몇 개의 보습이 더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고,65)集安縣文物志編纂委員會, 앞의 책, 209∼210쪽. 여기에 1960년과 1965년에 집안 고구려 유지에서 보습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한편 이현혜, 앞의 글, 1992 ; 앞의 책, 178쪽에서 집안현 박물관에 여러 개의 보습이 소장되어 있다고 언급하였다. 또 평양 근처의 정릉사(定陵寺) 터 우물 유지에서도 보습과 볏이 발견되었다.66)손영종, 『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1997(백산 자료원. 1998), 7쪽.

확대보기
보습
보습
팝업창 닫기

이 가운데 지안 유림향 지구촌 칠보구 남산에서 출토된 보습은 단면이 V자형을 이루는 것인데, 쟁기의 목제 날 가장자리를 철제로 보강하는 부속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보습은 중국에서 비교적 초기에 사용된 형식으로, 고구려에서도 이른 시기에 우경이 도입되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67)이현혜, 앞의 글, 1992 ; 앞의 책, 176∼177쪽. 실제로 후한(後漢) 때 요동 지역에서 우경으로 밭갈이를 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고,68)『제민요술(齊民要術)』 경전(耕田) 제1(第一). 今遼東耕犁 轅長四尺 廻轉相妨 旣用兩牛 兩人牽之 一人將耕 一人下種 二人挽耬 凡用兩牛六人 一日纔種二十五畝 其懸絶如此. 이 부분은 최식(崔寔)의 『정론(政論)』에서 인용한 것인데, 후한 때에 그가 요동 태수를 역임하였다. 위의 사실은 그가 요동 태수로 재직할 때 본 모습을 적은 것이라고 짐작된다. 또 안악 3호분(357)의 벽화에 보이는 코뚜레를 한 소는 4세기에 소를 순복(馴服)시키는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려 준다. 이들 자료로 비추어 볼 때, 늦어도 후한 말엽에는 고구려에서도 우경으로 밭갈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확대보기
안악 3호분의 외양간
안악 3호분의 외양간
팝업창 닫기

고구려의 보습은 대부분 무상려(無床犁)에 부착한 것이다. 다만 지안 태왕릉 서측에서 출토된 보습은 평면이 설형(舌形)에 가까운 삼각형이고, 양변이 날로 쓰인 형태의 대형 보습으로 유상려(有床犁)에 부착한 것이다. 유상려는 쟁기의 자부지와 L자형을 이루도록 별도의 목제인 상(床, 또는 저(底))을 맞추어 그 끝에 쇠 보습을 끼운 형태이다. 이것은 일정한 깊이 이상을 갈 수 없도록 설계하여 적은 힘으로 넓은 면적을 갈 수 있었으므로 갈이 면적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이는 황토 지대의 특성에 적합한 형태인데, 후한대에 널리 쓰였다.69)이현혜, 앞의 글, 1992 ; 앞의 책. 태왕릉 서측에서 출토된 보습의 사례를 통하여 고구려에서 무상려나 유상려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흙을 부수고 이랑을 짓고 보습 위로 올라온 흙을 떠엎어 옆으로 넘기는 역할을 한 볏도 정릉사 터와 푸순 고이산성 유지에서 발견되었다.

확대보기
화상석에 보이는 유상려
화상석에 보이는 유상려
팝업창 닫기

502년(지증왕 3)에 “(신라에서) 처음으로 우경을 이용하였다.”라고 『삼국사기』에 전한다.70)『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4, 지증왕 3년 3월. 이 기사는 이때 신라에서 우경으로 처음 밭을 갈았다는 의미라기보다 국가 차원에서 우경을 널리 장려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71)이춘녕, 「한국 농업 기술사」, 『한국 문화사 대계』 Ⅲ, 과학 기술사, 1968, 36쪽.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황우(黃牛)에 전기(田器)를 달고 전사(田舍)로 가려 한다.”라는 기사가 보이는데,72)『일본서기(日本書紀)』 권6, 수인 천황(垂仁天皇) 2년. 是歲一云 初都怒我阿羅斯等 有國之時 黃牛負田器 將往田舍. 한편 위의 기록에 나오는 도노아아라사등과 동일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야국의 왕 아리사등(阿利斯等)이 『일본서기』 계체 천황 23년(522)조에 나온다. 이로 보아 이 기록은 6세기 정도의 사실을 앞으로 끌어 올려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6세기 가야의 사정을 말해 주는 자료로서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우경이 보급되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추정은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서 출토된 보습을 통해서도 보완할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 유적으로 보이는 경기도 가평군 이곡리 유적에서 보습을 주조할 때 쓰인 보습 형틀과 길이 29㎝의 보습이 발견되었다.73)최무장, 「이곡리 철기시대 주거지 발굴 보고서」, 『인문 과학 논총』 12, 건국 대학교 인문 과학 연구소, 1979, 121쪽.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 사이에 고구려 군사 요충지였던 서울 구의동 아차산 제4 보루에서도 V자 형의 홈이 파여 있는 보습이 발견되었고,74)최종택, 「구의동 유적 출토 철기에 대하여」, 『서울 대학교 박물관 연보』 3, 서울 대학교 박물관, 1991. 구의동 유적에서 철제 보습이 4점 발견되었다고 보고하였다. 6세기 전반의 진주 옥봉 7호분에서도 너비 27㎝의 보습이 출토되었다.75)定森秀夫 外, 「韓國慶尙南道晉州水精峰2號墳·玉峰7號墳出土遺物」, 『伽倻通信』 19·20合, 伽倻通信編輯部, 1990.

6세기 이전 경상도 지역의 고분과 유적에서 보습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 우경이 도입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신라에게 선진 문물을 전파한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우경을 농사에 활용한 점을 고려하면, 5세기경에 신라에도 우경이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3세기 무렵 진한 지역에서 우마(牛馬)가 끄는 수레를 탔고, 438년(눌지마립간 22)에 우거(牛車)의 사용법을 널리 가르치는 등 이른 시기에 신라에서 소를 순복시키는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5세기에 신라에 우경이 보급되었다고 한다면, 백제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기나 그보다 이른 시기에 우경을 농사에 적극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76)양기석, 앞의 책, 2005, 89쪽에서 4세기 이후부터 백제에서 철제 보습을 제작하여 우경에 활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우경이 보급된 시기에 사람이 쟁기를 끄는 인력경(人力耕)도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반 농민들은 우경에 필요한 소와 쇠보습을 모두 갖추기가 어려워 주로 인력경으로 밭을 갈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한대(漢代)에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인력경을 널리 보급한 실례가 참조되며,77)백성들에게 서로 힘을 써서 쟁기를 끌도록 가르치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밭을 갈 경우에 하루에 토지 30회(畮)를 갈 수 있었고, 적은 사람들을 데리고 밭을 갈 경우에는 하루에 토지 13회를 갈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토지가 많이 개간되었다(『한서』 식화지 4상). 실제로 이를 입증해 주는 자료가 바로 강원도 안변군 용성리의 신라식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에서 발견된 보습이다.78)량익룡, 「안변 룡성리 고분 발굴 보고」, 『문화유산』 1953-4, 사회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53 ; 이현혜, 앞의 글, 1992 ; 앞의 책, 181∼182쪽. 이것은 길이 약 24㎝, 폭 10㎝ 정도의 소형이어서 우경보다는 인력경에 썼다고 보기 때문이다.79)김광언, 앞의 글, 1988, 48쪽.

확대보기
보습 도면
보습 도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보습 도면
보습 도면
팝업창 닫기

4∼5세기부터 농민들은 U자형 따비, 우경과 인력경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밭을 갈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부, 정치적 지위 등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좌우되었다. 다만 전반적인 추세는 인력경과 우경의 이용이 확대되었을 것이다. 갈이 작업에 우경을 이용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의 증대와 더불어 토지 생산성의 증대를 꾀할 수 있었다. 토지 생산성의 증대는 깊이갈이나 개간의 확대를 통하여 수확량의 증대를 꾀한 측면을 의미하고, 노동 생산성의 증대는 축력을 이용하여 밭을 갈아 결과적으로 노동력의 절감 효과를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우경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에서 개별 가호 단위의 농업 경영 방식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농업 생산에 기초한 읍락 사회를 해체시키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였다.80)우경의 이용 결과 농업 생산에서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전덕재, 앞의 책, 2006, 96∼99쪽이 참조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