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3.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수전
  • 수전 농법의 발달
전덕재

충남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 유적의 백제시대 논 유구에서 고랑과 이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웅진시대 백제 논 유구인 제3 경작면에서 논둑 시설과 발자국이 확인되었고, 아울러 고랑과 이랑의 흔적으로 보이는 약간의 굴곡이 발견된 것이다. 3세기 말∼4세기 전반 이후에 조성된 제2 경작면의 수전면 내에서도 고랑과 이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부여 서나성(西羅城) 유적, 대구 동천동 유적, 울산 어음리 유적, 창원 반계동 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140)곽종철, 「우리나라의 선사∼고대 논밭 유구」, 『한국 농경 문화의 형성』, 학연 문화사, 2002, 55∼56쪽. 종래에는 동일 경작면에서 수전과 아울러 고랑 및 이랑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논밭의 반복 전환 이용의 흔적, 즉 조선시대의 ‘회환 농업(回還農法)’이나 함경도 길주 평야에서 수백 년 이래 수도작(水稻作)과 조, 콩 등의 잡곡 농사를 일정한 차례에 따라 교대하는 윤작 농법(輪作農法)과 관련지어 이해하였다.141)앞의 약보고서(2001) ; 곽종철, 앞의 글, 2002, 57∼65쪽 ; 양기석, 앞의 책, 2005, 116쪽. 그러나 논 유구에 고랑과 이랑이 있다는 흔적만으로 그것을 논밭 전환 이용, 즉 윤작 농법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논 유구에 고랑과 이랑이 존재한 사실과 관련하여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 “수륙 겸종(水陸兼種)을 행하였다.”고142)『수서(隋書)』 권94, 열전(列傳)82, 신라(新羅). 전하는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이것 역시 논농사와 밭농사를 해마다 교대로 시행하는 윤작, 즉 ‘회환 농법’과 관련지어 이해하였다.143)김용섭, 「농서집요(農書輯要)의 농업 기술」, 『조선 후기 농학사 연구』, 일조각, 1992. 그러나 ‘수륙 겸종’은 한 해에 수종(水種)과 육종(陸種)을 아울러 행한 관행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다.144)종래에 ‘수륙겸종(水陸兼種)’을 윤작법과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이는 단지 중국인들이 신라에 밭농사와 논농사가 공존한 사실을 개략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김기흥, 「신라의 ‘수륙겸종’ 농업에 대한 고찰」, 『한국사 연구』 94, 한국사 연구회, 1996). 이는 고대의 수전 농법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을 것인데, 특히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고랑에다 파종하는 것으로 알려진 건경 직파법(乾耕直播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건경 직파법은 곰베(礌木)로 논의 흙덩어리를 분쇄하고 써레로 토양을 평평하게 정지하여서 파종처를 숙치(熟治)한 다음, 볍씨(晩種) 1두를 숙분(宿糞)이나 요회(尿灰) 1석과 잘 섞어 족종(足種)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 로 고랑과 이랑을 조성하고, 고랑에 볍씨를 파종하여 밭작물과 같이 키우다가 우기(雨期)에 빗물을 담아 일반 수도(水稻)와 같이 키웠다고 알려졌다.145)건경 직파법에 대하여 염정섭, 「수전 경종법의 양상」, 『조선시대 농업 발달 연구』, 태학사, 2002와 이태진, 「건경직파(乾耕直播) 도작(稻作)과 도휴·무종수전(稻畦·畝種水田)」, 『한국 사회사 연구-농업 기술 발달과 사회 변동-』, 지식 산업사, 1986이 참조된다. 건경 직파법은 아시아 지역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도작법(稻作法)이었다.146)문중양, 「조선 수리학의 전사」, 『조선 후기 수리학과 수리 담론』, 집문당, 2000, 65쪽. 그러나 수경 직파법(水耕直播法)에 비하여 숙치와 김매기에 상당한 노동력이 소요되고, 또 묘의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가뭄이 들면 쉽게 말라 버리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에 곽유(郭瑜)는 수종(水種)에 힘쓰도록 적극 독려하기도 하였다.147)『세조실록』 권9, 세조 3년 9월 을유, 곽유(郭瑜)의 상서(上書). “粳稻之性 旱耕水種 則其根已深 故雖有旱而不枯 幸有雨露 終見收成. 乾種之 則根不深入 故遇旱則枯. 故水種不可不務也” ; 염정섭, 앞의 글, 2002, 44∼45쪽.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농사직설』에서 벼를 경작하는 방법을 소개할 때에 수경 직파법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이어서 건경 직파법과 이앙법(移秧法)을 소개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수경 직파법이 가장 널리 보급된 작법이었기 때문에 『농사직설』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148)이태진, 「14∼15세기 농업 기술의 발달과 신흥 사족」, 『동양학』 9, 단국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1979 ; 『한국 사회사 연구-농업 기술 발달과 사회 변동』, 지식 산업사, 1986 ; 김용섭,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2(증보판), 일조각, 1991 ; 이호철, 『조선 전기 농업 경제사』, 한길사, 1986 ; 염정섭, 앞의 글, 2002. 여기에 소개된 수경 직파법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수를 끝낸 다음, 수원(水源)이 있는 비옥한 수전을 택하여 추경(秋耕)을 한다. 겨울에 시비(施肥)를 하고 2월 상순에 다시 한 번 기경(起耕)한다. 써레(木斫)로 토양을 평평하게 정지(整地)하고, 쇠스랑으로 흙덩어리를 분쇄한다. 그런 다음 볍씨를 물에 사흘 동안 담갔다가 꺼내 섬(空石)에 넣어 싹이 트도록 한다. 싹이 2푼(分) 정도 자랐을 때 수전에 고르게 뿌리고, 번지(板撈)나 고무래(把撈)를 사용하여 볍씨를 흙으로 덮는다. 그리고 물이 흥건하게 담기도록 관개하고 묘가 자라서 올라올 때까지 새가 먹지 못하도록 쫓는다. 묘가 자라면 여러 차례에 걸쳐 김을 매 준다. 그때마다 배수하고 김매기가 끝나면 관개한다. 또 관개와 배수가 자유로운 곳에서는 제초 작업을 마칠 때마다 물을 완전히 빼내어 묘근(苗根)을 이틀간 햇볕에 쬐어 준다. 벼가 익으면 물을 빼서 벼가 빨리 익도록 한다.149)수경 직파법에 관한 내용은 염정섭, 앞의 글, 40∼46쪽 및 문중양, 앞의 글, 2000, 62∼63쪽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전에다 볍씨를 뿌리면, 벼의 뿌리가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뭄을 만나도 쉽게 말라 버리지 않아 다수확이 가능하고, 반면에 건답에다 직파를 하면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가뭄을 만나면 벼가 쉽게 말라 죽는다. 한편 김매기를 끝낸 후에 수전에서 물을 완전히 빼고 묘근을 햇볕에 쬐어 주는 것은 내풍(耐風)과 내한성(耐旱性)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조선시대 초기처럼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도 수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로 북위시대(北魏時代) 고양 태수(高陽太守) 가사협(賈思勰)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소개된 화이허 강(淮河) 유역의 수도 경작법(水稻耕作法)이 조선시대 초기의 수경 직파법과 유사한 점이 크게 참조된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를 재배하는 토지의 비척(肥瘠)을 따지지 않고 오직 세역(歲易)만을 양호(良好)한 것으로 생각하며, 농지를 선택할 때에 상류에 가까운 농지를 고르고자 한다. 3월에 파종하는 것을 상시(上時)로 여기고, 4월 상순에 파종하면 중시(中時), 4월 중순에 파종하면 하시(下時)로 간주한다. 먼저 물을 논에다 관개하고 열흘 후에 육축(陸軸, 뾰족한 가시가 달린 롤러)으로 10여 차례 두루 정지한다. 농지의 숙치가 이루어진 후에 종자를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사흘 동안 물에 담가 둔다. 그런 다음 물에서 꺼내어 물기를 제거하고 초천(草, 풀이나 대나무로 엮은 원형의 용기) 안에 넣는다. 사흘이 지나 싹이 2푼 정도 자라면, 1무당(畝當) 3승(升)을 손으로 파종하고 사흘 동안 사람으로 하여금 새를 쫓게 한다. 묘가 길이 7∼8촌 정도 자라면 진초(陳草, 묵은 잡초)가 다시 일어나는데, 낫을 침수(沈水)시켜 그것들을 베어 내면 잡초는 모두 썩어 문드러져 죽게 된다. 벼가 점점 자라면 또 다시 김을 매고, 그것이 끝나면 물을 빼서 묘근(苗根)을 햇볕에 쬐어 튼튼하게 한다. 이 후 때에 따라 논의 건습(乾濕)을 헤아려 관개하다가 장차 벼가 익으면 또 물을 뺀다. 서리가 내리면 수확한다. 북토 고원(北土高原)의 경우 본래 피택(陂澤)이 없으므로 물가의 굽어 들어간 곳을 따라 밭을 일군다. 2월에 얼음이 녹아 토양이 건조해지면, 불을 놓고 기경한다. 이어서 곧바로 물을 관개하고 열흘 후에 흙덩어리가 진흙과 같은 상태로 변하면, 써레로 땅을 고른다. 파종하는 방법은 전과 같다. 이미 7∼8촌이 자라면 벼를 뽑아서 다시 심는다. 그리고 관개를 하여 잡초를 제거하는데, 전과 똑같이 한다.150)가사협(賈思勰), 『제민요술(齊民要術)』 권2 수도(水稻) 제10(第十). “稻, 無所緣 唯歲易爲良. 選地欲近上流<地無良薄, 水淸則稻美也>. 三月種者爲上時 四月上旬爲中時 中旬爲下時. 先放水 十日後 曳陸軸十遍<遍數唯多爲良>. 地旣熟 淨淘種子<浮者不去 秋則生稗>. 漬經三宿 漉出內草篅<市市規反中裛之> 復經三宿 芽生 長二分 一畝三升擲. 三日之中 令人驅鳥. 稻苗長七八寸 陳草復起 以鎌侵水芟之 草悉膿死. 稻苗漸長 復須薅<拔草曰薅 虎高切> 薅訖 決去水 曝根令堅. 量時水旱而漑之 將熟 又去水. 霜降穫之<早刈米靑而不堅, 晩刈零落而損收>. 北土高原, 本無陂澤. 隨逐隈曲而田者. 二月 冰解地乾 燒而耕之 仍卽下水 十日 塊旣散液 持木斫平之. 納種如前法. 旣生七八寸 拔而栽之<旣非歲易, 草稗俱生, 芟亦不死 故須栽而薅之>. 漑灌收刈 一如前法.” 이 부분의 번역에 西島定生, 「火耕水耨について-江淮水稻農業の諸解釋-」, 『中國經濟史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66, 195∼212쪽을 참조하였다.

여기서 말한 ‘오직 세역만을 양호한 것으로 생각하며(唯歲易爲良)’의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데, 크게 ‘세역(歲易)’에 대하여 휴한법(休閑法)으로 수도를 경작하였다고 보는 해석과 벼와 다른 작물을 해마다 교대로 경작하였다고 보는 해석으로 엇갈리고 있다.151)西島定生은 ‘세역(歲易)’을 휴한법과 연관시켜 해석하였고, 米田賢次郞은 윤작법(輪作法)과 관련시켜 이해하였다(米田賢次郞, 「<火耕水耨>注より見たる後漢江淮の水稻作技術について」, 『史林』 38-5, 1955). 이 자료에서 북토 고원, 즉 화북(華北) 지방의 경우 본래 피(陂)가 없는 지역이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서 피는 산야의 계류(溪流)를 막아서 만든 저수지, 즉 제언(堤堰)을 가리킨다. 화북 지방에서는 제언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물가의 굽어 들어간 곳에 수전을 조성하고, 좁은 계류를 막아 별도의 수로를 통하여 관개하였다. 이때에 수전의 구획은 수심(水深)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작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수전은 물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잡초와 피 등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것이 어려워서 묘를 이식(移植)하여 키우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152)西島定生, 앞의 글, 1966, 206∼212쪽. 이에 비하여 앞서 소개한 『제민요술』의 내용은 6세기 무렵 화이허 강 유역에서 피, 즉 제언에 의하여 안정적으로 관개되는 수전에서의 경작법을 설명한 것이다. 한편 일찍부터 양쯔 강(揚子江) 델타(delta) 지역에서, 또는 당나라 초엽까지 그 지역의 일부 저습지에서는 원시적인 수전 농법에 해당하는 ‘화경수누(火耕水耨)’에 의거하여 수도를 경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늪지대 같은 저습지의 파종할 곳에 무성하게 돋아난 풀을 불태워 버리고 그 위에 불규칙하게 볍씨를 파종 하고 자주 김을 매주는 경작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153)문중양, 앞의 글, 2000, 40∼41쪽.

조선 초기 『농사직설』에 소개된 수경 직파법과 『제민요술』에 소개된 화이허 강 유역의 수도 경작법은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전자는 연작 상경법(連作常耕法)을 전제로 하는 경작법인 것에 비하여 후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6세기 무렵 중국 화이허 강 유역에서 연작상경으로 벼농사를 짓지 않았음이 분명한 만큼, 조선시대 이전의 휴한법 단계에서도 수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민요술』에 언급된 수도 경작법이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소개되었다는 구체적인 자료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6세기 무렵 화이허 강 유역에서 널리 보급된 수도 경작법을 15세기 조선에서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삼국시대에서도 역시 수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경우가 있었다고 판단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수경 직파법은 물을 항상 원활하게 공급하고, 또 물을 원활하게 배수할 수 있는 수전을 전제로 한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수전의 비중이 20%에도 못 미친 사실을 고려하면,154)조선 초기에 전체 경작지의 전결 수(田結數)에서 수전(水田)이 차지하는 비중이 27.9%였고, 전결수가 아닌 순수한 면적 단위로 환산해 볼 때 수전은 19%에 불과하였다고 한다(이호철, 「농구(農具) 및 수리 시설(水利施設)」, 『조선 전기 농업 경제사』, 한길사, 1986, 338쪽).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리 안전답의 비중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안전하게 수경 직파법으로 농사를 짓는 수전 역시 그리 많았다고 볼 수 없다. 간단한 시설로 좁은 하천이나 계류를 막는 수리 시설인 보에 의하여 관개되는 수전이나 천수답(天水畓)은 항상 물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어려웠다. 따라서 봄에 비가 적당히 내리지 않아 물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울 때에는 수경 직파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곤란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수경 직파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물이 말라 버려 제때에 수전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이 부족한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나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전에서 경작하는 방법이 바로 건경 직파법이다.

간단한 수리 시설로 계류를 막아 관개하던 수전이나 천수답이 삼국 및 통일 신라 수전의 주종을 이룬 것으로 추정되므로 대체로 당시에는 건지에다 볍씨를 파종하여 재배하다가 나중에 비가 많이 내리면 거기에 물을 관개하여 수도(水稻)처럼 재배하는 경작법이 널리 활용되었을 것이다. 고랑과 이랑이 발견된 논 유구들은 삼국시대에 건경 직파법, 즉 수륙겸종으로 농사를 지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건경 직파법은 우리나라에서만 시행되던 독특한 경작법이었으므로 중국인들은 그것을 신라의 특이한 경작 관행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육종(陸種, 乾種)을 하여 볍씨를 재배하다가 나중에 수종(水種)한 벼처럼 물을 관개하여 재배하는 경작 방식을 ‘수륙 겸종(水陸兼種)’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파종기에 해당하는 3∼5월에 가뭄이 심하고, 제언 같은 수리 관개 시설이 후대만큼 많지 않았을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건경 직파법은 나름대로 벼의 생산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특히 건경 직파법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농법이었으므로 우리 선조들이 가뭄에 대비한 수전 농법 개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건경 직파법은 숙치와 김매기에 노동력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수경 직파법에 비하여 생산성이 낮다는 약점이 있다.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면 저수지를 더 많이 보수·증축·신축하거나 수리 관개 기술을 개선하여 수리 안전답 면적을 늘려야 하였다.

삼국시대 수리 관개 시설의 확충 현황은 앞서 살펴보았다. 통일신라시대, 특히 하대(下代)에 들어 수리 관개 시설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790년(원성왕 6)에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벽골제를 증축하였고, 810년(헌덕왕 2)과 859년(헌안왕 3년)에도 나라 안의 제방을 완전하게 수리하도록 지시하였다.155)『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2년 2월 ;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안왕 3년 여름 4월. 또 영천 청제비 정원명(貞元銘)을 통하여 798년(원성왕 14) 4월에 청제를 증수(增修)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 신라 정부가 수리 관개 시설의 수리에 크게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두 가지를 상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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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비 정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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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수리 관개 시설의 건설과 보수가 절실할 정도로 가뭄,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흉년이 드는 해가 더욱 잦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하대에 들어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이나 기근이 자주 발생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유망(流亡)하거나 굶주리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여기에다 도적들이 여러 차례 봉기(蜂起)하여 이를 진압하느라 신라 정부가 애를 먹기도 하였다.156)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덕재, 앞의 책, 2006, 382∼389쪽이 참조된다. 이에 신라 정부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떠돌아다니거나 도적이 되어 봉기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적극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가운데 백성들의 농업 생산 기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권농 정책(勸農政策)이 포함되었는데, 여러 권농책 가운데 핵심은 바로 수리 시설의 보수나 증설이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수리 관개 기술의 발달로 수리 관개의 효율성이 높아져 수전의 생산성이 증대된 측면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수리 관개 기술의 발달 양상은 798년(원성왕 14) 4월 영천 청제를 보수할 때에 제방에 길이 12보(步)인 ‘상배굴리(上排掘里)’를 설치한 사실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157)영천 청제비 정원명(永川菁堤碑貞元銘) “貞元十四年戊寅 四月十三日 菁堤治記之. 謂洑堤傷故 所內使 以見令賜矣. 弘長卅五步 岸立弘至深六步三尺 上排堀里十二步 此如爲二月十二日元四月十三日 此間中了治內之.” 현재 영천 지역에서 굴통을 빼구리라고 부르는데, 빼구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배굴리(排掘里)이다.158)노재환·박홍배, 「영천 청제에 대한 소고」, 『매일신문』 1969년 9월 17일자와 9월 19일자에서 영천 지역에서 굴통을 빼구리라고 부른 사실을 근거로 배굴리(排掘里)를 굴통으로 이해한 이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김창호, 「영천 청제비 정원14년명(永川菁堤碑貞元十四年銘)의 재검토(再檢討)」, 『한국사 연구』 43, 한국사 연구회, 1983, 119쪽 ; 이우태, 「영천 청제비를 통해 본 청제의 축조(築造)와 수치(修治)」, 『변태섭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삼영사, 1985, 117∼211쪽). 여기서 굴통이란 청제의 수문(수통)을 말하며, 지금도 거기에 시멘트로 만든 굴통, 즉 수통이 설치되어 있다. 배(排)는 물을 배수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굴(掘)은 물을 배수하는 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배굴리(排掘里)는 바로 청제에 저장된 물을 배수하는 굴이란 뜻이고, 여기에다 명사형 접미사 리(里)를 덧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에는 배굴리를 일반적으로 수통(水桶)으로 표기하였다.

수통을 목통이라고도 부르듯이 재료는 나무였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이른바 배수하는 것은 나무를 파내 통(筒)으로 만들고 방죽(제언의 제방) 안에 꼽아 둔다.”고 언급한 사실에서도159)『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본리지(本利志) 권2, 수리(水利), 피당수문법(陂塘水門法). “其所爲泄水者 只刳木爲筒 揷於堤岸之中 而高下一定 不可移易已.”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일본의 오사카부 쯔루타마이케토우(鶴田池東) 유적에서 7∼8세기의 수통(木樋)이 발견되었는데, 직경이 35㎝, 현재 남아 있는 길이가 4.1m, 약 3도의 경사로 설치되어 있었다.160)廣瀨和雄, 「水稻農業」, 『古墳時代の硏究』 4(生産と流通), 雄山閣, 1991, 23쪽. 그리고 청제의 수문을 시멘트로 만들기 이전에 역시 나무로 수통을 만들었으며, 기사년(1929) 수통을 개선할 때에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장통송목(長桶松木)의 두께가 1척 5촌(45㎝)이었다.161)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권병탁 선생이 소개한 「청제문부(菁堤文簿)」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청제문부」는 1929년부터 1976년까지 46년 동안 청제회에서 청제의 관리와 관련된 내용을 기술한 회계 장부이다(권병탁, 「청제문부(菁堤文簿) 자료 해설」, 『민족 문화 연구』 7,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 1986). 고대 일본의 사례와 최근의 수통 직경을 참고하면, 이때 설치한 배굴리의 직경은 대략 40㎝ 안팎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798년(원성왕 14) 청제를 수축할 때에 상배굴리를 설치하였다. 상배굴리라는 말에서 이미 하배굴리(下排掘里)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청제비 정원명에는 배굴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 반면 병진명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없다. 청제를 처음 쌓을 때에 배굴리를 설치하였다고 한다면, 그에 대하여 기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에 배굴리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당시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관수(灌水)하였을까? 수통을 설치하지 않은 제언은 일반적으로 둑을 결궤(決潰)하여 관개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수통을 설치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162)1778년(정조 2)에 반포된 「제언절목(堤堰節目)」에서 수통을 설치하면 결궤(決潰)하여 물을 관개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고 하였다.

798년(정원 14)에 상배굴리를 설치하였으므로 그 아래에 위치한 하배굴리는 이전에 설치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798년 이전에 제방에 수통을 설치하여 관개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백제 토목 기술을 기초로 축조한 일본 오사카부 사야마이케(狹山池)는 616년에 목통을 설치하여 관수와 배수를 하였다고 한다.163)市川秀之, 「狹山池の樋と堤」, 『第7回東日本埋藏文化財硏究會 治水·利水遺跡を考える』 第Ⅱ分冊, 1998, 64쪽. 따라서 신라에서도 적어도 7세기 중반 무렵부터 목통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청제비 병진명(536)에 배굴리란 표현이 보이지 않으므로 당시에 제방을 결궤하여 관수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어느 부분을 결궤하였는지 불분명하지만, 일단 조선시대 제언의 좌우에 배치한 수도(水道)로 불리는,164)『세조실록』 권17, 세조 5년 8월 신축에 호조에서 제언의 관리에 대하여 아뢴 내용 가운데 “제언(堤堰) 좌우의 수도(水道)에는 돌을 깔아서 터지고 무너지지 않도록 하십시오.”라는 기록이 전한다. 즉 제방보다 약간 낮게 쌓아 홍수에도 물이 넘쳐흐르도록 만든 무넘이(餘水吐)를 일차적으로 결궤하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할 듯싶다. 아무튼 통일신라시대에 수통을 설치하여 관개하는 제언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수리 관개 기술의 발달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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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을 결궤하여 관수하면 물의 낭비가 심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전에다 관개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결궤하는 과정에서 제방이 무너지는 사례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매년 가을철에 다시 제방을 쌓는 수고로움도 컸을 것이다. 반면에 수통을 통하여 관개하면 수전에 물을 공급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영천 청제의 경우처럼 수통을 고저의 차이를 두고 두 개 이상을 설치한다면, 담수량에 따라 적절하게 물을 관개하고 저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뿐 아니라 수통을 통하여 관개하기 때문에 물의 낭비도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수(注水)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을철마다 다시 제방을 쌓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수통의 설치로 얻는 효과는 이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수경 직파법은 자유로운 관수와 배수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농법이다. 즉, 파종할 때나 김매기를 할 때에 관수가 필요하고, 김매기가 끝난 뒤에 묘를 튼튼하게 해 주기 위하여 수전에서 물을 완전히 빼서 햇볕에 쬐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확기에는 물을 빼서 벼가 잘 익도록 배려해야 한다. 담수전이나 물이 부족한 경우는 자유롭게 관수하거나 배수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작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165)특히 담수전에서 벼를 재배할 경우, 배수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뿌리가 썩는 근부 현상(根腐現像)에 따른 피해가 심하였다. 근부 현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논을 건조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다. 제언에 의하여 관개되는 수전은 대부분 경사진 구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관·배수가 원활하였다. 따라서 제언에 의하여 관개되는 수전의 증가만으로도 생산성의 증대를 꾀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여기다가 결제(決堤) 방식이 아닌 수통(水桶)을 설치한 제언에 의하여 관개되는 수전은 보다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게 수경 직파법으로 벼를 경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경 직파법은 건경 직파법이나 항상 담수 상태에서 벼를 재배하는 것에 비하여 생산성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제방에다 수통을 설치하여 관개하는 제언을 개발한 결과, 수경 직파법으로 경작되는 수리 안전답 비중이 더 높아졌을 것으로 예상되고, 나아가 농업 생산성 증대로 이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166)종래에 이기백, 「영천 청제비 정원수치기(永川菁堤碑貞元修治記)의 고찰」, 『신라 정치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74, 286∼287쪽에서 신라 하대 수리 사업의 활발한 움직임은 농업 생산력의 전반적인 발달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수리 관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농업 생산성 증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라 정부가 제언의 건설과 수리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167)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농경에 관해서는 전덕재, 「백제 농업 기술 연구」, 『한국 고대사 연구』 15, 한국 고대사 학회, 1999 및 전덕재, 「통일 신라의 수전 농법과 영천 청제」, 『한·중·일의 고대 수리 시설 비교 연구』, 계명 대학교 출판부, 2007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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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에 설치한 수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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