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1. 고려시대 기후와 재해
한정수

농사의 수확량을 크게 좌우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기후 변화와 토질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이 농사에 힘쓰는 것이다. 이 중 기후 변화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나머지의 경우는 곡식 농사에 맞는 땅을 잘 선택하고 우수한 농업 기술 서적을 발간하여 보급하고 농민으로 하여금 농사에 전념하게끔 하면 된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아무리 성능 좋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도 기상 변화를 정확히 예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직까지 기상 변화, 기후 변화만큼은 신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현재 고려시대 기후가 어떠했는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기상 관련 기록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고려시대 기후 변화와 그것이 농사 및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다. 바로 가뭄·홍수(洪水)·충해(蟲害)·서리·우박(雨雹)·태풍(颱風) 등 기상 이변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高麗史)』라는 연대기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전반의 기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9세기 무렵부터의 기후 변화 추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이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신라 하대 농업에 큰 피해를 준 것으로 가뭄·충해·서리·기근(饑饉) 등을 편의적으로 선별해 보면, 주로 8세기 말에서 9세기 전반(前半)에 재해 기록이 집중되고 있음이 나타난다. 9∼10세기에 발생한 농업 기상재해(氣象災害) 기록을 보면, 가뭄·황해·서리·기근은 원성왕대(785∼798) 12건, 헌덕왕대(809∼826) 5건, 흥덕왕대(826∼836) 6건, 문성왕대(839∼857) 6건, 효공왕대(897∼912) 4건 등이다. 가뭄이 있었던 그 해에 기근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786년(원성왕 2), 790년(원성왕 6), 820년(헌덕왕 12), 832년(흥덕왕 7), 840년(문성왕 2), 886년(정강왕 즉위년) 등이다. 가뭄이 이듬해의 기근으로 연결된 경우는 795년(원성왕 11)에서 796년, 820년(헌덕왕 12)에서 821년, 832년(흥덕왕 7)에서 833년, 858년(헌안왕 2)에서 859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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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갈라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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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극심한 경우 그 해의 수확만이 아니라 이듬해의 농사에까지 피해를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뭄과 기근이 잇따라 일어나면 농촌 사회가 크게 동요하였다. 이 기록만으로 본다면 원성왕, 헌덕왕, 흥덕왕, 문성왕, 헌안왕 때는 국가적으로 볼 때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뭄은 모두 18회가 기록되어 있는데, 시기를 보면 3월에서 8월까지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가뭄 관련 기록을 보면 2월이 6회, 3월이 14회, 4월이 55회, 5월이 55회, 6월이 21회, 7월이 7회 등으로 집계되며, 고려시대의 가뭄과 비교한다면 가뭄 관련 기록의 출현 시기 중에서 7, 8월(8회 정도)이 상당히 많다.168)태조에서 의종 연간까지의 가뭄 빈도수 등을 통계하면 대략 5년에 두 번 정도 가뭄이 들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김연옥, 『한국의 기후와 문화』,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1985 ; 진영일, 「고려 전기의 재이 사상에 관한 일고」, 『고려사의 제 문제』, 삼영사, 1986, 503쪽 참조. 이들 가뭄 기록은 ‘가을 가뭄’이었다.169)학자들은 이러한 가을 가뭄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지만, 최근에는 적도의 무역풍이 강해지면서 서태평양의 해수 온도 상승으로 동태평양에서 저수온 현상이 일어나는 해류의 이변 현상인 라니냐의 영향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라니냐로 인해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고, 오히려 내리지 않아야 할 때 많은 비가 쏟아지는 등 홍수와 가뭄 피해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이 같은 원인이 당시에도 적용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가뭄 관련 기사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최소 2개월 이상의 가뭄이 지속되었다고 하는 기록이다. 예컨대, 795년(원성왕 11), 817년(헌덕왕 9)과 818년(헌덕왕 12), 832년(흥덕왕 7), 840년(문성왕 2)과 848년(문성왕 10), 858년(헌안왕 2), 906년(효공왕 10)과 907년(효공왕 11)의 가뭄은 대한(大旱)이었다.170)결국 6, 7월에 집중된 것으로 보이는 가을 가뭄의 영향으로 추곡 수확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앞서 지적한 바대로 그에 동반하는 저수량의 부족은 이듬해 봄 곡종의 파종 등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식량 부족을 가져와 파종해야 하는 종자까지도 식량으로 소비하게 된다. 이 때문에 곡가(穀價)가 뛰고, 더불어 물가 자체도 앙등하여 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기근(饑饉)으로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가뭄은 같은 해나 이듬해 황해(蝗害)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7월과 8월의 수확기에 주로 발생한 황해는 농민들의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8∼10세기는 세계적으로 한랭 지수(寒冷指數)가 높아 한기에 해당하면서도 건습 지수(乾濕指數) 또한 높아 농업 경영에 있어 큰 어려움이 뒤따랐던 시기였다.171)김연옥, 『기후 변화』, 민음사, 1998, 135∼148쪽 참조. 예컨대, 9∼10세기 농업 기상재해 기록을 보면, 서리가 내려 곡물을 상하게 한 경우가 모두 아홉 차례 기록되고 있다. 3월이 세 차례, 4월이 세 차례, 5월·7월·8월이 각 한 차례 정도 발생하였다. 결국 이를 본다면 세계적으로 한기가 지속된 때에 한반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 기후는 불안정한 면을 보이면서 기상재해 등이 급속히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차츰 기상 변동은 비교적 줄어 안정된 면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그렇더라도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한랭 빈도가 온난 빈도보다 높았다. 10∼11세기는 비교적 건조하다가 1100∼1200년대는 습윤해졌다. 다시 1200∼1350년간은 건조하다가 1350∼1400년간에는 몹시 습윤함을 보인다. 한온과 관련시켜 보면 고려시대 전반기에는 온난 건조하였고, 후반기에는 처음에 한랭 건조하다가 차차 한랭 습윤해졌던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고려사』 「천문지(天文志)」 및 「오행지(五行志)」 가운데 수, 화, 목, 금, 토에 기록된 재이(災異)의 발생 빈도수는 공통적으로 인종대 이후인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초, 고종 및 충렬왕대인 13세기 후반 및 14세기 초, 공민왕대를 전후한 14세기 중엽 이후 무렵에 집중되어 있다.172)이태진, 「고려∼조선 중기 천재지변과 천관의 변천」, 『한국 사상사 방법론』, 소화, 1997, 96∼99쪽 ; 한정수, 「고려 후기 천재지변과 왕권」, 『역사 교육』 99, 역사 교육 연구회, 2006. 그 현상은 가뭄, 냉해, 폭우, 기근 등으로 나타난다.

고려의 이러한 변화가 12세기를 중점으로 많이 나타난 것은 지구의 기상 변화와도 관련된다. 12세기 중엽 이후 한랭 횟수와 한난 횟수는 급격히 높아졌다. 12세기 중국 남부의 타이후 호(太湖)가 얼어붙고 퉁팅 산(洞庭山)의 귤나무가 전멸하였다든가, 항저우(抗州)에서 1131년부터 1260년 사이의 입춘에 눈이 내렸다는 보고는 12세기 중국이 한랭기였음을 말해 준다.173)김연옥, 앞의 책, 1998, 164쪽 및 374∼37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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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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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냉해가 많아지는 것은 화산 폭발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화산 대폭발 후 대흉년과 냉해가 일어나기 쉽다는 점과 세계의 평균 기온이 내려가 따뜻한 겨울 추운 여름 곧 난동냉하(暖冬冷夏)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영향은 6월에 가장 커진다고 하는 데서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1108년 일본 군마 현(群馬縣)과 나가노 현(長野縣)에 걸쳐 있는 아사만 산(淺間山)의 화산 활동으로 분화가 있었으며,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에토나 화산은 1169년에 대분화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12세기에는 세계적으로 대규모의 화산 분화가 빈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258년에도 아시아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의 먼지로 대기가 식어 추위가 있었다.174)브라이언 페이건, 윤성욱 옮김,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중심, 2002, 59쪽 참조. 그리고 1315년부터 1321년에 걸쳐 유럽에서는 대기근이 있었으며, 1348년에는 흑사병(黑死病)이 창궐하였다.

이러한 기근은 고려시대에도 비슷한 주기로 일어나고 있었다. 예컨대, 1173년(명종 3)에는 정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내와 우물이 모두 마르고 화묘(禾苗)가 말랐으며 역질(疫疾)마저 일어나 굶주려 죽는 자가 많았는데 심지어 인육(人肉)을 파는 자가 있었다.175)『고려사(高麗史)』 권19, 세가(世家)19, 명종 3년 4월 병자. 또 1230년(고종 17)에는 대기근으로 길에 굶어죽은 사람이 서로 바라볼 만큼 많았는데,176)『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17년 정월. 1229년부터 지속된 가뭄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1256년(고종 43) 12월에는 겨울인데도 눈이 오지 않고 기아와 역질이 잇따라 시체가 길을 덮을 정도였고,177)『고려사』 권24, 세가 24, 고종 43년 12월. 같은 해 4월에는 매실만 한 우박이 내려 농작물을 해치기도 하였다.178)『고려사』 권24, 세가 24, 고종 43년 4월 병인. 최해(崔瀣, 1287∼1340)는 시를 지어 기후가 고르지 않아 농가에서 모내기도 못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는데 금년 봄에도 가뭄이 들어 거리에 굶어 죽은 시체가 많다고 한탄하였다.179)『동문선(東文選)』 권4, 오언고시(五言古詩), 「3월 23일 우(三月二十三日雨)」. 1360년(공민왕 9) 4월에는 1358년부터 지속된 가뭄으로 국왕도 한 끼 식사만 하였는데, 이는 감상선(減常膳) 차원이 아니었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었다.180)『고려사』 권39, 세가39, 공민왕 9년 4월. 공민왕대(1351∼1374)에 기근이 12회나 들었다고 기록되고 있는 데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사』 「천문지」와 「오행지」에 나타난 천변(天變)과 재이를 보면 예종에서 명종대, 고종 및 충렬왕, 공민왕 및 우왕, 그리고 공양왕대를 중심으로 양상이 격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기상학적으로 본다면 한랭 건조하며, 천문상의 변화도 많아 불안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고려사』를 중심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천변과 재이가 많은 시기가 우연히도 정치적 혼란과 변동이 많았던 시기와 대략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은 천변과 재이 기록을 의도적으로 두드러지게 하여 고려 사회의 혼란상을 드러냄으로써 천명(天命)이 고려 왕조에서 떠났음을 상징하려는 목적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기후 환경을 본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 현상이었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화산의 분화 및 폭발로 일어난 화산재 등에 의하여 한발과 기온 저하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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