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2. 중농 이념과 농경의례
  • 천인감응의 중농 이념
한정수

고려 왕조는 고대 사회와 달리 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였다. 이에 고려는 건국과 함께 농업 생산의 안정을 꾀하는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먼저 농업 정책을 실시하기 위한 이념적 기초로서 유교적 중농 이념(重農理念)을 주목하였다. 이전 시기에도 시(時)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 및 ‘농자정본(農者政本)’이라는 인식은 정치의 요체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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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
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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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위주의 사회에서 농업 생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가뭄, 폭풍, 홍수 등 자연 조건의 변화나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한 노동력 이탈 등은 상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다. 고려 왕조는 건국 초부터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농본(農本)에 주목하였다. 이는 정치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의 틀이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민과 산업 생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심화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치자층(治者層)에서 이러한 측면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과 어떠한 정치적 입장과 정책을 제시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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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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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고려 초부터 제시되는 중농 이념은 신라 하대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유교적 정치사상에서 제기하는 농(農)에 대한 인식과 농시(農時)의 철저한 보장이라는 중농 이념을 고려 초에 치자층이 주목한 것은 왕도 정치와 중농 이념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려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농업 생산력의 안정적 확보를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즉 지배층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심화를 통하여 농업 생산의 보장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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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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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려는 대민 안정의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했을까? 이를 위해 먼저 태조와 지배층이 느끼고 있던 현실은 어떠했는가를 보자. 태조 왕건(王建)은 918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궁예(弓裔)의 포악한 면을 지적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을 밝혔다.190)『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정사. 다분히 의도적 언사라고 하더라도 궁예의 사치 와 환락, 전란 등으로 백성들이 제대로 농업에 종사하지 못했던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같은 해 8월에도 잦은 노역, 궁궐 이전, 기근, 질병 등으로 백성들은 안착하지 못하고 유리(遊離)하다 굶어죽고 있으며, 처자식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다는 등 당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다.191)『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8월 신해.

즉위 초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루어짐에 따라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도 검토되었다. 이를 위해서 취한 조치를 보면, 관제 설정(官制設定) 및 적임자 곧 어진 인재의 등용이라는 합리적 유교 정치의 방향과 풍속을 바로 하고 백성을 안집(安集)시키기 위한 안민(安民)192)『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신유. “設官分職 任能之道 斯存利俗 安民選賢之務.”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태조가 취한 안민 정책의 방향이다. “농상(農桑)은 의식의 근본이요, 왕정(王政)의 먼저 할 바로 태조께서 즉위한 처음에 먼저 경내(境內)에 조(詔)하여 3년의 전조(田租)를 면제하고 농상을 권과(勸課)하여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였다.”193)『고려사』 권79, 지(志)33, 식화(食貨), 농상(農桑).라 하고 있듯이 태조의 정책은 단적으로 정리하여 말하면 ‘중농 정책’이었다. 또 이를 뒷받침한 이념적 기반이 ‘중농 이념’이었다.

태조의 이러한 농업 정책이 구상되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따르는 지식 기반으로서 지식인층의 역할과 경학(經學)의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즉위 초에는 후백제와의 잦은 분쟁과 전쟁, 일부 호족 세력의 저항 등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 사회는 그러한 인식이 곧바로 시행될 수 있을 만큼 안정되지 않았다. 아울러 이념적·제도적 장치와 그를 수행할 만한 행정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중농 이념의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이며, 시행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려는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해서 형성된 대당 유학생층(對唐留學生層)과 경전을 학습할 수 있었던 지식인층, 그리고 당송 교체기를 통해 고려로 유입되던 귀화인(歸化人)들의 도움을 받았다. 농상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인식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체계화되어 나갔다.

고려 건국 후 유교적 중농 이념에 대한 이해는 중농 정책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는 개국 초의 사회 혼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농업 기반의 확보를 통해 정치 질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주가 신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곧 대민 안정을 위한 방안 마련으로 나타나는데, 구체적인 것으로 태조는 ‘사민이시(使民以時)’, ‘경요박부(輕徭薄賦)’, ‘지가색지간난(知稼穡之艱難)’194)『서경』, 주서(周書), 무일편(無逸編)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민이시’의 부분은 농업 사회인 고려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농상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절후를 알아야 하는데, 절후의 조만(早晩)을 모른다면 농상은 황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에서 초기부터 『예기』 월령편을 주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유교 정치사상에 입각한 대민 농업 정책에 있어 군주가 취하는 기본적인 이해였다. 그 자신도 즉위 초에 조서를 내려 경내에 3년의 전조를 감면하고 농상을 권장하며 더불어 백성을 휴식케 하여195)『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농상. 개국 초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한 바 있었다.

이상에서처럼 군주의 지가색지간난과 사민이시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천시에 맞는 적절한 명은 하늘의 뜻을 헤아린 군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군주가 어떠한 자세로 정치를 행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당연히 제시될 수 있는 것이었다. 태조의 농업에 대한 인식의 기본 바탕은 결국 『서경』을 익히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서경』 「무일(無逸)」에 나타난 중농을 정리한다면 천명을 스스로 헤아리면서 백성을 다스림에 항상 신중히 하며 농사짓는 어려움을 몸소 느껴 백성을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중농 이념의 바탕을, 군주 스스로 먼저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사민이시’와 ‘경요박부’로써 농상을 권장해야 한다는 이해에 두고 있었다고 하겠으며, 그러한 치도의 원리를 『서경』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중농에 대한 이해 가운데 ‘이시(以時)’라는 부분은 매우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천시라고 하는 계절적 순환의 시기와 그러한 시기가 인간 사회, 특히 농업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사시(四時)의 각각에 있어서 어떠한 정령을 펴야 하는가 하는 시령(時令)에 대한 이 해였다. 천(天)-군주-농업이라는 구조에서 시령의 역할은 결국 농상의 권장을 통한 농업 생산의 증대에 있었다. 반대로 이러한 때에 맞는 시령이 이루어지지 않고 군주의 지가색지간난이라는 인식이 이해되지 않았을 때에 바로 재변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고려의 중농 이념에 대한 이해는 태조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에는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외척과 호족 세력의 대립과 경쟁이 첨예하여 국왕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광종은 외척과 호족 세력의 제거 및 흡수, 그리고 왕실의 정비 등 건국 초기의 혼란 요인을 일차적으로 정비하려고 하였다. 950년(광종 1)에 일어난 ‘대풍발목(大風拔木)’의 재해는 이를 상징하였다.196)『고려사』 권2, 세가2, 광종 원년 춘정월. 따라서 그 해결 방안으로 강력한 왕권과 그를 중심으로 보좌하는 어진 신하들이 민본을 통하여 국가 안정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현실적으로 반영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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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 이후 광종의 정책은 무농(務農)의 인식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고, 그 기초는 국왕이 수덕(修德)을 함으로써 하늘과 백성이 모두 화합하게 된다는 덕치(德治)와 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정관정요』는 왕의 수덕(修德)과 왕도 정치의 지침서로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무농」에 나타난 농본사상은 군주가 기본적으로 품고 행해야 할 입장을 정리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었던 것이다.

무농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를 제도적으로 반영하려는 시도는 성종대에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종은 유학의 중흥을 위해 즉위 초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은 즉위 후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時務策)을 받 아들이면서 유교 정치사상의 토대 위에 문물 전장(文物典章)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종은 중농과 관련하여 권농에 대한 방법을 밝히고 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을 보여 준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식(食)을 하늘로 여긴다. 만약 만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오직 삼농(三農)의 힘씀을 빼앗지 않는 것에 있을 것이다. 아아, 너희들 12목(十二牧) 제 주진(諸州鎭)의 관리는 지금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잡무를 마땅히 정파하고 오로지 농상을 권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장차 사신들을 보내어 전야(田野)의 황폐함과 개간, 목사나 수령들의 근면함과 태만함을 검험(檢驗)하여 포폄(褒貶)하도록 하겠다.197)『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성종 5년 5월.

이 내용은 ‘국이민위본(國以民爲本)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바탕으로 봄에는 파종하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는 수확하는 ‘삼농지무(三農之務)’를 빼앗지 말고, 지방관에게 오로지 권농에 집중하여 전야를 개간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198)이와 같은 내용은 당 태종이 『정관정요(貞觀政要)』 무농편(務農編)에서 시신(侍臣)에게 강조하던 부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당 태종은 국본은 민이며 민본은 식이자 곧 농상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친히 백성들의 고통을 느끼고 그 농시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성종 또한 중농에 대해서는 당 태종과 같은 이해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관정요』 권8, 무농 정관 2년, 太宗謂侍臣曰 凡事 皆須務本 國以人爲本 人以衣食爲本 凡營衣食以不失時爲本 夫不失時者 在人君簡靜 乃可致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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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과 성종대의 경우 국본은 곧 민이며 민본은 의식에 있다는 이해는 군주의 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 준 것이었다. 이는 곧 『정관정요』라는 당 태종의 어록(語錄) 및 유가(儒家)의 정치 이념 중 민본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역사 속에서 군주권의 강화와 관련되었다.

이를 좀 더 확대시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법으로 전개하려는 시도가 현종 때에 이루어졌다. 1012년(현종 3)에 “식을 우선으로 삼는다.”199)『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농상, 현종 3년 3월. 여기서의 팔정은 여덟 가지 일을 맡은 관리를 말한다. 즉, “三 八政, 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寇 七曰賓 八曰師”(『서경』 홍범)이다. 특히 ‘식’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한대의 채옹(蔡邕)은 “王政以食爲先 足食之道 惟在不違農時 是也.”라고 주를 달아 농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는 ‘농용팔정’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의 ‘식’은 식생활이 아닌 의식으로서의 농상에 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식의 문제를 농업 정책의 기본 대상으로 농상의 권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정책의 문제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그 표현이 바로 “농상은 의식(衣食)의 근본이 되므로 왕도 정치에서 먼저 행해는 바이다.”200)『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이었다.

고려 초에 성립된 중농 이념을 다시 정리한다면, 국가는 민을 근본으로 하며 민은 식을, 식은 농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왕정에서 우선 행해야 한다는 이해였다. 따라서 지배층의 도덕적 반성 및 실천이라는 면과 자영 농민층의 육성이 바로 유교적 중농 이념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하겠다.

이처럼 중농 혹은 무농의 근거로 『서경』 「홍범」·「무일」의 경전과 『한서』에서 문제(文帝)의 중농 기사, 『정관정요』 등을 내세웠고, 태조의 유훈(遺訓) 이래로 그 인식과 행용(行用)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농업을 생산 기반이자 국가 재정의 근간으로 삼은 국가 체제에서 농업에 대한 이해가 곧 국가의 성쇠 혹은 왕도 정치의 실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있음을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중농 이념이 확립됨으로써 고려 왕조에서는 그것을 시행하기 위한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다양한 정책을 제시해 나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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