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3. 농민의 생활과 권농 정책
  • 지방관과 농민 안정
한정수

고려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민을 안정시키고 이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였다. 국초(國初)에는 전란이 계속되고 국내 정세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태조는 즉위 초부터 민생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918년(태조 1) 8월에 3년 동안 조세와 역역(力役)의 면제 및 농상을 권과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는 백성의 안착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226)『고려사』 권80, 지34, 식화, 진휼(賑恤) 은면제(恩免制), 태조 원년 8월. 또한 934년(태조 17) 예산진(禮山鎭)에 나아가서 백성들이 귀족층과 그 가신(家臣) 등에게 수탈당하는 상황을 염려하면서 이를 금하는 내용을 담은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227)『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 5월 을사. 태조는 만년에 후대 왕들을 위하여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겼는데, 일곱 번째로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방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228)『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4월 계묘.

918년 예산진에서 내린 조서에서 태조가 밝힌 바처럼 지배층에 의한 과도한 수탈은 농민층의 불안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고려 왕조로서는 이를 막으면서 지배층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구상하여야 했다. 그것이 “조정 관료를 우대함으로써(以優朝士)”229)『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녹과전.·“염치를 기름으로써(以養廉恥)”230)『고려사』 권80, 지34, 식화3, 녹봉(祿俸), 서.로 표현되는 토지 분급 제도인 전시과(田柴科)와 녹봉(祿俸) 제도였다.

신라 말 후삼국기의 녹읍제(祿邑制) 및 식읍(食邑) 운영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수탈에 시달리고 유리걸식하거나 노비가 되는 상황을 목도한 태조는 시급히 전제를 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934년(태조 17)에는 녹읍을 사여(賜與)하고 이에 대한 수취권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고,231)『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 5월 을사. 또한 940년(태조 23)에는 인성, 선악, 공로 등을 기준으로 고과(考課)를 살펴 역분전(役分田)을 지급하였다.232)『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전시과(田柴科), 태조 23년.

토지 분급제의 마련과 실시가 갖는 의미는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고 관료에게 경제적 보장을 해주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고려 왕조의 입장에서는 실제 토지 경작자인 민과 경제적 보장을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관료를 가능한 한 만족시켜 주는 방향에서 토지 분급제를 설정하였다. 태조가 인품, 선악, 공로를 보아서 역분전을 지급하였다고 하는 것이나 경종 이 처음으로 전시과를 제정하면서 인품을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하였다고 한 것은 그러한 의미를 고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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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국가 재정의 마련과 그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 있다. 이를 가장 우려한 태조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수취하는 데는 법도가 있어야 한다(取民有度).”는 원칙을 제시하였다.233)『고려사』 권78, 지32, 식화 서(序). 이후 고려 왕조는 이를 기본 방향으로 하여 조세와 공부의 수취를 정하였다. 즉,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내도록(輕徭薄賦)” 하여 국가 재정을 튼실하게 하면서도 민생은 먹고 살만하게 하는 정책을 마련하는 데 원칙을 두었다.

고려시대의 국가 재정 수취의 기반인 조세는 기본적으로 조(租)·포(布)·역(役)으로 되어 있었으며, 군현 단위로 수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궁예 때의 1경(頃)당 6석의 과도한 수취는 이들 조세를 모두 합친 규모였다. 농민층은 이러한 수취 규모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태조는 이를 조준(趙浚, 1346∼1405)의 상서(上書)에 인용되어 있는 것처럼 1부(負)당 3승으로 조정하였다.234)다만 강진철이 언급한 대로 이를 결당 수취로 환산하면 결당 2석의 조(租)가 되며 10분의 1조를 적용하여 환산하면 결당 생산량이 20석이 되어 성종 때의 결당 최고 생산량인 18석보다도 많아진다(강진철, 앞의 책, 1980, 390∼400쪽). 성종대의 수치상으로 볼 때 공전 수조율로 환산되는 최고 생산량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궁예 때의 6석 수취보다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게 되며 당시 민들이 체감하였을 폭은 컸다고 여겨진다. 또 당시의 전쟁 비용을 감안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다만 조준이 상서문을 작성할 때 당시의 조세 부과 단위인 결(結)을 쓰지 않고 왜 부(負)로 표시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광종은 즉위하면서 주현(州縣)의 세공액(歲貢額)을 정하였다.235)『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공부(貢賦), 광종 즉위년. 이때 정한 주현 세공액은 신라, 태봉, 후백제 등에서 거두어들였던 공부와 각 군현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 위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구체적인 세공액은 955년(광종 6) 전후에 양전(量田) 사업을 실시하면서 양전 및 호구(戶口)의 파악, 특산물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뒤 정해졌다. 이때 정한 내용은 1108년(예종 3) 이전까지 약간의 변동이 있을 뿐 그대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종은 “경기(京畿) 주현의 상공요역(常貢徭役)이 번거로이 많고 잡소(雜 所)의 별공물색(別貢物色)이 지나치게 많다.” 하여 이를 조정토록 하였다.236)『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공부, 예종 3년 2월.

고려 왕조가 국가 재정의 규모를 정하고 조세 제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중요시한 사항은 토지의 경리(經理)와 인구의 파악이다. 전제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호구는 이처럼 국가의 재정원(財政源) 파악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토지와 농민은 바로 국가의 주요 수취원(收取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키고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어떻게 파악하여 재정 및 정치 운영의 기초로 삼을 것인가가 호구 정책의 원칙적 방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왕조는 이를 호적(戶籍)의 작성과 본관제(本貫制) 등을 통하여 파악하고 호구를 계점(計點)해 나갔다.

이러한 대민 정책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지방관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전국적으로 지방관 파견이 이루어지면서 지방관의 자질, 능력, 실적에 대한 평가 기준 등이 마련되었다. 국왕을 대신하여 지방 백성들을 교화하고 지방의 농업 생산력을 고려하여 조세 수취를 담당하는 한편, 각종 민생고 및 치안 질서 등을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982년(성종 1) 최승로는 성종 이전에 지방의 세력가가 공무를 명목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있어 백성들이 견디기 힘들다고 하면서 수령을 파견하여야 한다고 상서하였다.237)『고려사』 권75, 지29, 선거(選擧)3, 전주(銓注), 범선용수령(凡選用守令). 이를 계기로 983년 12목을 설치하면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공식적 지방 행정 운영이 시작되었다.238)『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2년 2월 무자. 그러나 지방 통치는 성종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방관의 자질, 행정 능력 등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고, 검증 또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종은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운영한 지 3년이 지난 986년(성종 5)에 이를 더욱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지방관이 해야 할 일 등을 제시하였다. 이때 성종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부세를 공평히 하고 민심을 교화하는 데 있다 하면서 이를 위해 “일체 지방관들은 재판 사무를 지체하지 말고 창고들에 곡식이 충만하게 하며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 고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며 부역과 조세는 가볍게 하고 처사는 공평하게 하라.”고 하였다.239)『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5년 9월 기축. 이 내용은 이후에도 지방관의 역할과 실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는데, 내용은 약간씩 출입이 있어도 정신은 마찬가지였다.

1018년(현종 9)에는 여러 주의 관원들에게 받들어 행해야 할 조목으로 “첫째는 인민들의 고통을 살필 것이요, 둘째는 아전(黑綏長吏)들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살필 것이요, 셋째는 도적과 간사 교활한 자를 살필 것이요, 넷째는 백성들이 금지 규정을 위반하는 것을 살필 것이요, 다섯째는 백성들 중에서 효도하고 우애하고 청렴하고 결백한 자를 살필 것이요, 여섯째는 아전들이 나라의 돈과 곡식(錢穀)을 손실시키는 것을 살필 것이다.”240)『고려사』 권75, 지29, 선거3, 전주, 범선용수령, 현종 9년 2월.라고 제시하였다. 1376년(우왕 1)에는 수령의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을 “전야(田野)의 개간, 호구의 증가, 부역의 공평, 소송(訴訟)의 간명, 도적이 없어진 것”241)『고려사』 권75, 지29, 선거3, 전주, 범선용수령, 신우 원년 2월.으로 정하였으며, 1388년(창왕 즉위년) 6월에는 지방관으로 공정하고 청렴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힘써 구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조준은 지방을 다스리는 안렴사(按廉使)에 대해 “전야의 개간, 호구의 증가, 송사의 간명, 부역의 공평, 학교의 진흥을 기준으로 주군을 순찰할 것”242)『고려사』 권75, 지29, 선거3, 전주, 범선용감사(凡選用監司), 신창 즉위년 7월. 등을 상서하였다.

이처럼 지방관이 봉행해야 할 사항을 마련하고 그것을 통해 수령의 실적을 평가한 것은 고려 왕조가 지방 질서를 장악해가는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였으며 지방 사회와 농민층의 안정을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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