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4. 토지 이용의 확대와 농업 기술
  • 토지 이용 확대 노력
한정수

토지 개간을 위한 고려 정부의 노력은 광종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전의 경우는 촌주(村主) 세력이 중심이 되어 촌민을 동원하여 개간 및 수리 사업을 해 나갔을 것이다. 이들은 지방 세력가로 성장하였으나 성종대에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 주도권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성종대의 봉행 6조나 1179년(현종 9) 봉행 6조257)『고려사』 권75, 지29, 선거, 전주, 범선용수령, 현종 9년 2월. 현종대의 봉행 6조는 찰민서질고(察民庶疾苦), 찰흑수장리능부(察黑綬長吏能否), 찰도적간활(察盜賊姦猾), 찰민범금(察民犯禁), 찰민효제렴결(察民孝弟廉潔), 찰리전곡산실(察吏錢穀散失)이다.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 왕조가 지방 질서를 장악해 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각 주군현에서의 개간 사업은 지방관이 주도하였다. 토지 이용을 독려하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는 정부 차원에서 왕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내용은 1116년(예종 11)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면서 “길옆의 토지로 경작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수령을 불러 그것에 대하여 문책하였다.”258)『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1년 3월 을묘.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자연재해, 지력 및 기타 농업기술상의 제약, 불법적인 과중 수탈, 경작자의 개인적 사정, 전란의 피해 등등으로 생기는 진전에 대한 배제와 이의 간전(墾田)을 위한 노력이 먼저 요구되었다.259)강진철, 『한국 중세 토지 소유 연구』, 일조각, 1989,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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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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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국가 정책으로 나타나는 것은 973년(광종 24)과 1111년(예종 6)의 진전 개간 세제 혜택에 관한 기사와 공·사전(公·私田)의 도경(盜耕)에 대한 차등 적용 기사이다. 973년에는 “진전을 경작한 사람은 사전일 경우 첫 해에는 거둔 전부(全部)를 주고 2년째에 비로소 전주(田主)와 더불어 반분(半分)한다. 공전일 때에는 3년에 한하여 전부 지급하고 4년째부터 법제에 따라 비로소 조세를 거둔다.”260)『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조세.라 하였다. 1111년에는 “3년 이상의 진전을 경작하면 2년간은 전호(佃戶) 등에게 전부 지급하고 3년째에는 전주와 반분하도록 하였고, 2년 이상의 진전인 경우 4등분하여 1분은 전주가 갖고 나머지 3분은 전호가 갖는다.”고 하였다. 또 “1년 진전인 경우 3분하여 1분은 전주가 갖고 2분은 전호가 갖는다.”고 규정하였다.261)『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조세. 이 두 기사를 통해 진전 경작에 대한 혜택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전의 상황 즉 1년, 2년, 3년 등의 기간까지 정부에서 파악하고 그 경작 정도에 대해서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 파악을 위해서는 정확한 양전이 필요하였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양전 사업이 진행되었다.262)고려 초의 양전 사업과 관련하여 주목된 자료는 약목군 정토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若木郡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의 “司倉上導行審是內乎矣 七十六是去 丙辰年量田使前守倉部卿藝言下典奉休算士千達等 乙卯二月十五日 宋良卿矣結審是乎 導行乙用良 顯德三年丙辰三月日練立作良中……”와 『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경리 문종 13년 2월의 “尙書戶部奏 楊州管內見州 置邑以來 已百五年 州民田畝 累經水旱 膏塉不同 請遣使均定 制可” 등으로서 모두 955년(광종 6)에 전국적인 양전이 이루어졌음을 직·간접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955년(광종 6) 전후에 대규모 양전 사업을 단행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量案)을 만들었다. 정토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는 전주와 토지의 형태, 양전의 방향, 면적 등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전 과정은 대체로 각 지역에 존재하는 향리나 지방관 등이 먼저 양전을 한 다음 중앙에서 파견한 양전사(量田使)가 산사(算士)를 대동한 이를 확인하여 양안을 작성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955년에 전국적으로 양전 사업을 완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며, 중앙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군현을 단위로 점차 확대하는 방향으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실시하여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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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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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9년(문종 13) 양주(楊州) 관내의 견주(見州) 지역이 읍(邑)을 설치한 뒤로 105년 동안 수한(水旱)을 겪으면서 토지의 비척이 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다시 양전할 것을 청하였다.263)『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경리(經理), 문종 13년 2월. 이것이 말해 주는 것은 이미 955년 전후에 개경 및 경기 지역 일대에서는 양전 사업이 완료되었고, 약목군(若木郡) 같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973년(광종 24) 이후 14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의 토지 이용도는 매우 높아졌다. 양전할 때에도 진전으로 토지를 묵히고 있는 데 대해 내용 및 기간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1111년(예종 6) 사전에서의 진전 장려 규정이 1년 진전 단위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나왔다.

진전에 대한 개간 장려와 함께 고려 전기에서는 시기전의 경작을 더욱 독려하였다. 이미 986년(성종 5)에 권농과 관련하여 지방관으로 하여금 농 시를 빼앗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 그와 함께 전야의 황벽(荒闢)으로써 관원의 근면과 태만을 검험(檢驗)하여 포폄(褒貶)하겠다는 교(敎)를 내린 적이 있었다.264)『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농상, 성종 5년 5월.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990년(성종 9) 서경 순행(巡幸) 때 내린 교이다. 당시 성종은 선조의 법도를 따르고 시령의 마땅함을 따라 친히 지방을 둘러보고 백성들을 돌아보는 서경 순행을 하면서 농상이 풍년이 들었음을 보고 기뻐하였다.265)『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10월 갑자. 1116년(예종 11)에도 서경으로 가는 길에 경작 가능한 토지인데도 간전하지 않았을 경우 해당 수령을 문책하였다는 것266)『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1년 3월 을묘.은 시기전의 경작을 독려함과 동시에 진전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같은 선상에서 본다면 고려 정부의 권농 정책과 농민층의 역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토지의 집약적 이용이 가능해졌고, 결과적으로 상당한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이 점은 동시에 많은 계층이 토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따라서 농지로 전용할 수 있는 새로운 땅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새로운 땅을 개척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관심의 대상은 현재 경작지와 그리 멀지 않으면서 개간에 유리한 곳이었다. 당시 주 경작지가 평전(平田)이었고 그러한 평전이 개석곡(開析谷) 주변에 형성되는 퇴적 평야 등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러한 평지와 산야가 만나는 접점이나 그 위쪽으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신전(新田)의 개간은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053년(문종 7) 어사대(御史臺)에서는 “상서공부(尙書工部)에서 받은 제지(制旨)에 따르면 나성(羅城) 동남쪽의 제방이 무너져 이를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그 언덕 부근이 모두 밭두둑이 되어 있다.” 하였다.267)『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7년 8월 정유. 1054년 3월에는 전품(田品)을 구분하면서 “불역(不易)을 상(上), 일역(一易)을 중(中), 재역(再易)을 하(下)로 한다.” 하면서 “산전(山田)의 전품을 평전 1결을 기준으로 하여 불역 산전 1결, 일역 산전 2결, 재역 산전 3결이 그와 같다.”고 하였다.268)『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경리. 이 1054년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전품 구분 및 농업 생산력 발전의 정도, 세역 농법(歲易農法)과 상경 농법(常耕農法) 등과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이것이 『고려사』 「식화지」 경리에 실린 이유는 당시의 생산력 수준을 기준으로 산전에 대한 수취를 위하여 좀 더 세밀한 규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경지의 개간이 이미 평전에서 다수의 산전 개발로 들어가고 있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산전의 생산력을 국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1123년(인종 1) 국신사(國信使) 일행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던 서긍(徐兢)은 산전 개발과 관련하여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밭이 산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경작하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보면 사다리나 층계와 같다.”269)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23, 잡속(雜俗)2, 종예(種藝).라고 하였다. 이 묘사는 고려에서 산전 개발을 완료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서긍은 이를 멀리서 보니 사닥다리나 돌계단(梯磴) 같다고 하였다. 서긍이 돌계단이나 사닥다리 같다는 식으로 비유한 것은 송나라나 원나라 때의 제전(梯田) 개념을 차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270)원대에 편찬된 『왕정농서(王禎農書)』, 농기도보(農器圖譜) 1, 제전(梯田), “夫山多地小之處 除磊石及峭壁例同不毛 其餘所在土山 下自橫麓 上至危巓 一體之間 裁作重磴 卽可種藝 如土石相半 則必疊石相次 包土成田 又有山勢峻極 不可展足 播殖之際 人則傴僂蟻沿而上 耨土而種 躡坎而耘 此山田不等 自下登陟 俱若梯磴 故總曰梯田.”

이처럼 고려 왕조는 양전을 통하여 토지에 대한 파악을 시도함과 동시에 과중한 수취로 인한 경작자의 유망과 이농 전업(離農轉業), 자연재해 및 전란의 발생 등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전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경작을 독려하였다. 토지 소유주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진전화를 막기 위하여 진전 개간 장려책을 내놓은 것은 역전론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경작자들은 진전의 경간을 해 나가는 한편으로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산전 등을 개간해 나가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관 등이 중심이 되어 해택지나 저습지를 중심으로 하는 신전 개발에 관심을 기울인 점도 주목된다. 이때 고려 정부에서는 산전 등의 신전 개발이 많아지자 이에 대한 농업 생산력의 파악을 시도하고 이를 수취 체제 속에 넣기 위해 양전을 추진하여 국가 재정의 충실화를 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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