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4. 토지 이용의 확대와 농업 기술
  • 주요 농작물과 농업 기술
한정수

고려시대 농민들이 수확한 곡물, 채소, 과일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고려시대 농업은 이들 식량 자원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농상(農桑)이라 할 때의 상(桑)에 해당하는 잠업, 면업, 종이 생산을 위한 제지업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농민들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식량 자원과 의류 생산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말하자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식량 자원 수확의 안정화 혹은 향상을 바랐으며, 따라서 결코 농사를 내버려두는 등 태만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매년 다양한 형태로 농산물을 수확해 나갈 수 있었다.

곡물의 경우 대체로 오곡(五穀)이나 구곡(九穀)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재배는 물론 논과 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각각의 곡물을 들면 다음과 같다. 벼, 맥류, 조(粟), 기장, 수수, 귀리, 피, 콩류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벼의 경우는 논벼(水稻)도 있고 밭벼(旱稻·山稻·陸稻)도 있었다. 또 벼는 빨리 파종하고 빨리 수확하는 조도(早稻)와 늦게 파종하여 늦게 얻는 만도(晩稻) 등으로 파종 및 수확 시기에 따라 종류가 나뉘었다. 찰기에 따라서 메벼와 찰벼로도 나뉘었는데, 이들은 갱미(粳米·秔米)와 나미(稬米·糯米)라고 하였다. 서긍은 고려 멥쌀의 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고 평한 바 있다.271)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종예. 조선 초기에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한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는 이들 벼 종류의 분화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진 것이 보이지만 그러한 분화 이전 단계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자료가 많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

고려시대 이전의 벼 품종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 나오는 업조(業租)와 경조(京租)가 있고, 김지장(金地藏)이 신라에서 가지고 중국 구화산(九華山)으로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는 황휴도 (黃携稻)가 있다.272)진암(陳巖), 『구화시집(九華詩集)』, 黃携稻, 出九華山, 舊傳, 金地藏自新羅携種, 至此種之, 其芒穎, 其粒肥, 其色殷, 其味香軟, 與凡稻異. 또 이규보가 조도의 일종인 선명도(蟬鳴稻)에 대해 매미가 울 무렵 수확하는 벼로 올벼라고 읊은 시가 있다.273)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14, 고율시, 득선명도(得蟬鳴稻). 한편 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황상 추정할 수 있는 벼 품종으로 충렬왕대에 원나라에서 구휼미로 들어온 강남미를 주목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가능성이 높은 것이 점성도(占城稻)이다.274)위은숙, 『고려 후기 농업 경제 연구』, 혜안, 1998, 36∼41쪽 참조. 역시 주로 올벼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점성도는 쌀알이 크고 달았다.

벼의 파종은 주로 볍씨를 바로 잘 정리된 논에 일정하게 뿌리는 직파(直播)와 벼 묘가 일정하게 자란 뒤 이를 옮겨 심는 이앙(移秧) 즉 삽앙(揷秧)으로 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직파를 하면서도 벼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줄뿌림(條播) 형태를 행하였다. 이앙은 고려 후기에 들어오면서 여러 시문집(詩文集)에 보이는데, 최해는 ‘3월 23일 비가 오다(三月二十三日雨)’라는 한시에서 “작년에는 기후가 고르지 못해(去歲乖雨暘) 농가에선 모내기도 못하였었네(農家未挿秧)”275)『동문선』 권4, 오언고시, 3월 23일 우(三月二十三日雨).라고 읊었고, 박효수(朴孝修, ?∼1337)는 ‘성주 청운루에 올라 우연히 짓다(星州靑雲樓上偶題)’라는 한시에서 “새벽에 산비 오니 죽순 먹을 흥이 나고(山雨曉催燒筍興) 이따금 들바람에 모 심는 노래 들려오네(野風時送揷秧歌)”라고 노래하였다.276)『동문선』 권16, 칠언율시, 「성주청운루상우제(星州靑雲樓上偶題)」. 고려 말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살았던 원천석(元天錫, 1330∼?) 역시 ‘초여름 교외를 다니며(首夏郊行)’라는 한시에서 “뽕나무 오디가 익고 보리도 거두는데(椹熟桑林麥已秋) 모내기는 여태껏 끝내지 못했네(揷秧猶未遍原頭)”라고 읊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원주 지역에서까지 모내기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277)원천석(元天錫), 『운곡시사(耘谷詩史)』 권1.

맥류는 이맥(二麥)이라 하여 대맥(大麥, 보리)과 소맥(小麥, 밀)을 말한다. 대맥은 가을에 파종하여 이듬해 초여름 4월경(음력)에 얻는 추맥(秋麥)이 있었다.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거두는 것은 춘맥(春麥)이라 하였지만 재배 가능성은 확실하지 않다. 조는 쌀과 보리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 대표적 곡물이었다. 『고려도경』에는 이와 관련한 곡물로 황량(黃粱)과 한속(寒粟)이 나오는데,278)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종예. 각각 누른 조와 차조로 보인다. 콩류는 고려시대에 구황(救荒)을 위해서 쓰였으며, 조세를 거둘 때 이를 현물로 하기도 하였다. 보통은 대두(大豆)와 소두(小豆)로 나누었는데,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한 의서(醫書)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변두(藊豆), 적소두(赤小豆), 녹두(菉豆)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 밖에도 서(黍), 직(稷)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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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
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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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밭작물 재배를 위해 농민들은 밭을 갈아엎는 기경(起耕)을 하였다. 물론 기경하기 위해 쟁기를 사용하였는데, 소나 말 등의 축력(畜力)만이 아니라 인력(人力)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소가 끌 경우 대체로 두 마리의 소가 끌고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라 각각 쟁기를 잡고 흙을 엎었다. 다음은 쇠스랑(鐵齒擺) 등으로 땅을 고르게 하는 한편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정지(整地)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그동안 준비해 온 곡물을 파종(播種)하였다. 우리나라 기후가 봄 가뭄이 있긴 하지만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는 우기(雨期)가 되므로 많은 잡초가 자라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한다. 따라서 밭농사는 거듭해서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는 중경제초(中耕除草)가 필요하였다. 중국에서는 자루가 긴 호미(長柄鋤)가 있었지만 고려에서는 신라 이래 자루가 짧은 호미(短柄鋤)와 자루가 긴 호미가 각각 발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는 가을걷이 과정을 거쳐 수확(收穫)한 곡물을 저장하였다.

곡물 재배 후 지력을 회복 유지하려면 인위적으로 거름을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 해도 밭갈이와 파종만으로는 지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아무런 재배도 않고 그대로 묵히는 휴경(休耕)이나 휴한(休閑)을 하더라도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고려시대 농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시비법(施肥法)을 개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재를 이용하는 화분(火糞), 퇴비를 이용하는 초분(草墳), 소나 말 등을 키우는 외양간에 짚 등을 깔아 만드는 답분(踏糞), 사람의 분뇨를 이용한 인분(人糞) 등을 이용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어떤 시비술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농업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곡물의 종류와 기경 시기 등을 고려하여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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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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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은 고려의 형세에 대해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밭이 산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경작하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보면 사다리나 층계와도 같다.”279)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종예.라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은 우리나라의 지품(地品)에 대해 “압록 이남은 대개 모두 산으로 비옥하여 매년 경작하는 땅은 거의 없고 근근이 있는 정도이다.”280)이제현(李齊賢), 『익재난고(益齋亂藁)』 권9, 하, 사찬(史贊), 경왕(景王).라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 이러한 평가는 중국에 비해 고려의 토질과 형세가 그렇다는 것이지 매년 경작이 힘들거나 수확이 얼마 안 될 정도라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에서는 곡물을 재배하는 전답을 크게 논인 수전과 밭인 한전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수전과 한전에 대해서는 이미 성종대에 매년 경작과 매년 조세 수취를 전제로 하 면서 전품을 상·중·하로 나누어 수취하였다.281)『고려사』 권78, 식화1, 전제, 조세, 성종 11년. 그런데 고려 왕조는 점차 새로운 토지 개간 및 묵히고 있는 땅인 진황지(陳荒地)에 대한 경작을 권장해 나갔다. 이에 따라 경작 가능한 토지는 점차 늘어났지만 이들 토지의 생산력이 기왕에 매년 경작하여 매년 조세를 수취하던 전답과 현저한 차이를 나타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국가가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여 조세에 반영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종대에 들어가면서 바로 이러한 토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전답의 위치와 생산력에 따라 산전이냐 평전이냐로 나눈 것이다. 산전은 척박하여 매년 경작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묵히거나 황무지로 버려지기 십상이었다. 물론 산전이라 하더라도 산곡(山谷) 간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부분의 퇴적층에 있는 곳 등은 비옥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바로 개석곡(開析谷)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개석곡은 경작자가 노동력을 기울이고 토지 관리를 잘할 경우 매년 경작이 가능하고 생산량도 평전에 준하는 곳이었다.

결국 산전에 대해서는 매년 경작 여부에 따라 불역이냐 일역이냐 재역이냐로 나누어 상·중·하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들 상·중·하의 산전은 그 세역(歲易) 정도에 따라 불역 산전=평전 1결, 일역 산전 2결=평전 1결, 재역 산전 3결=평전 1결로 계산하였다. 평전은 이미 매년 경작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매년 조세 부과가 가능한 토지였다. 그만큼 산전 개간과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고 이를 국가가 조세 수취 등에 반영해야 할 정도로 늘어났다는 의미가 되겠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이들 곡물만이 아니라 채소류 재배도 중요한 농사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菁), 가지(茄), 오이(苽), 아욱(葵), 파(蔥), 박(瓠) 등이 있었다.282)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4, 고율시, 가포육영(家圃六詠). 생강은 강소(薑所)를 둘 정도로 귀하게 여겼으며, 현종 때에는 죽은 장졸(將卒)의 부모처자(父母妻子)에게 생강을 하사하였고,283)『고려사』 권81, 지35, 병(兵) 병제, 오군(五軍), 현종 9년 8월. 명종 때에는 생강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을 정도였다.284)『고려사』 권100, 열전13, 제신(諸臣), 박제검(朴齊儉).

이들 채소를 재배하는 밭을 채포(菜圃)·소포(蔬圃)·소휴(蔬畦)라고 하였다. 채소밭을 소휴(蔬畦)라고 한 것이나 파밭을 총휴(蔥畦)라고 한 것 등을 보면 이들은 밭두둑을 만들어 구획하여 놓고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토란(芋), 미나리(芹) 같은 것도 재배하였다. 토란은 이규보가 토란 종류를 거성(車聲)·거자(鉅子)·방거(旁巨)·청오(靑烏) 등 네 가지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재배 방법 등이 상당히 발달하였다.285)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7, 고율시, 「차운이시랑이시이수송토란여이삼수답지(次韻李侍郞以詩二首送土卵予以三首答之)」.

과일 재배는 이미 상당히 발달하였다. 배, 복숭아, 능금(來禽), 앵도, 오얏, 살구(紅杏), 석류(赬卵), 금귤, 모과, 감(枾), 포도, 밤, 개암(榛實), 잣, 대추, 호두 등이 있었다. 1188년(명종 18)에는 밤나무, 잣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을 때에 맞추어 심어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하라고 권농을 한 바가 있었다.286)『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농상, 명종 18년 3월.

과일나무 등은 접붙이기가 과일의 당도와 수확량 증대에 매우 중요하다. 이규보는 같은 동네에 살던 꺽다리 전씨(田氏)의 배 접붙이기 기술을 눈여겨보고 이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287)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전집(前集), 권23, 기(記), 「접과기(接菓記)」. 거의 못쓰게 된 배나무에 좋은 품종의 배나무 가지를 붙이는데 그 붙인 곳에 잘 이긴 진흙을 바르고 싸매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붙이기는 배나무에만 쓰지는 않았을 터이고, 다른 과일나무에도 적용하였을 것이다. 접붙이기 방법의 개선을 통해 과실은 더 크고 달게 되었을 것이다. 서긍은 고려의 밤 중에는 크기가 복숭아만 한 것이 있다 하였다. 이러한 밤은 자생한 것이 아니라 접과(椄果) 기술의 향상으로 나온 것이었다.288)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토산(土産).

한편 고려에서는 곡물, 채소, 과일 등의 재배 외에도 종이 생산을 위한 닥나무 재배 및 의류 생산을 위해 마(麻), 모시(紵), 뽕나무 등의 재배를 해왔다.

고려에서 생산된 종이는 중국에서 견지(繭紙), 백추지(白硾紙), 청지(靑紙)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289)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7, 물산지(物産志)2, 지. 종이는 각종 용도로 쓰였고 용도에 따라 두께와 재질 등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재배를 권장하였다. 1145년(인종 23) 수양도감(輸養都監)에서는 지품이 좋지 않을 경우 토질에 따라 닥나무 등을 심도록 하였고,290)『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인종 23년 5월. 1188년(명종 18)에도 권농을 하면서 닥나무를 심어 이익을 얻도록 하였다.291)『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명종 18년 3월.

고려의 직물 수공업은 견직물·저직물·마직물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의류 생산과 관련된 것이므로 농상에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서긍은 고려가 양잠에 서투르다고 하였다.292)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토산. 하지만 뽕나무 재배는 직물 중 가장 중요한 견직물 생산과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와 재배 권장이 이루어졌다. 1145년(인종 23) 수양도감에서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고, 1188년에도 같은 조치가 있었다. 1371년(공민왕 20)에는 제도 순문사(諸道巡問使)와 안렴사로 하여금 지방관의 성적을 조사할 때 뽕나무를 심은 수 등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삼도록까지 하였다.293)『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공민왕 20년 12월. 마직물 생산을 위해 마전(麻田)을 두었는데, 이미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에서도 마의 생산을 위해 마전을 운영하고 있듯이 이는 고려 왕조에서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1088년(선종 5)에는 마전 1결당 잡세(雜稅)를 매기기까지 하였다.294)『고려사』 권78, 지32, 식화, 전제, 공부, 선종 5년 7월. 서긍은 고려 사람이 모시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많이 베옷을 입는다고 하였다.295)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2, 토산.

이 밖에 염색 가공을 위하여 옻나무를 많이 재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장성이 있는 옻나무 재배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1145년 수양도감에서 칠나무를 심도록 권한 것이나 1188년에 또 다시 심도록 권장한 것은 이를 말해 준다. 1344년(충혜왕 후5)에 국왕은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각 도에서 칠을 징수하기도 하였다.296)『고려사』 권36, 세가36, 충혜왕 후5년 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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