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1. 조선 왕조가 추진한 농정책
  • 농사일 독려에 나선 수령
염정섭

조선 초기 외방에 파견된 수령은 권농과 황정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활약하였다. 그런데 수령을 포함한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이 초미(焦眉)의 관심을 두어야 하는 과업은 바로 감농, 즉 농사 감독이었다. 실제의 농사일이 시작되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기후 조건 속에서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나고, 농민들이 어떠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감농이었다. 그리고 적시(適時)에 농작업을 수행하도록 독려하고, 그리하여 장차 수확이 어떻게 나타날지 그때그때 농사(農事)의 형지(形止) 즉 농형(農形)을 파악하며, 우택(雨澤)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책무를 다하는 것이 또한 바로 감농이었다. 농형이란 농작물의 성장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고, 우택은 강우량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제 농사 현장에서 앞으로 농사 작황이 어떻게 나타날지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근거 자료였다.

조선 왕조의 농업 현실을 살펴보면 전토(田土)에서 풍흉이 나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지품(地品)이 아니라 재해(災害)의 유무(有無) 때문이었다. 결국 한 해의 농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재해를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라면, 자연재해의 유무를 파악하고, 그때그때 적당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잘 보고(監) 또 잘 살피는(察) 과정이 농업 생산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맡을 책무는 당연 히 목민의 현장에 나가 있는 수령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감농의 구체적인 내용은 실제 농사가 진행될 때 농작(農作)의 수행을 독려하는 측면과 농작물의 성장 현황과 우택의 상황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가지 측면 모두 수령과 감사 등이 일선에서 수행하고, 조정(朝廷)에 알려 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수령 감농의 구체적인 모습은 ‘급시(及時)’로 표출되었다.326)이태진은 급시(及時)의 중요성 때문에 천문역수에 대한 탐구가 고조되었다고 설명하였다(이태진, 앞의 책, 1989, 44∼45쪽). 『속호전(續戶典)』 권농조에 “각 고을 수령은 파종, 제초, 추수 등의 일을 제때에 살펴서 시기를 놓치지 말아 곡식에 해가 없도록 하고, 능히 살피지 못하는 자는 율(律)에 의하여 논죄(論罪)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 조목은 급시 즉 적시(適時) 파악의 중요성을 수령에게 엄중하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일 년 중에도 3월 1일부터 8월 말까지의 기간 동안 농사의 근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수령이 맡은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파종과 제초, 수확 등이 모두 곡물의 조만(早晩) 성질에 적당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돌보는 책무를 수령이 짊어지고 있었다.327)『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2월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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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시찰도(農家視察圖)
농가시찰도(農家視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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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이 시작되는 단계인 기경(起耕), 파종 시기부터 감농이 실제 수행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농작업 가운데 특히 파종은 적시에 실행하도록 독려할 대상이었다. 파종에 들어가기 전에 종자를 나누어 주면서 농사 시작을 독려하였다.328)『세종실록』 권32, 세종 8년 4월 무진. 종자 분급을 독려한 다음 곧이어 파종 독려가 이어졌다(『세종실록』 권32, 세종 8년 4월 경오). 그리고 파종에 뒤이어 수행하는 작업인 제초를 제때에 수행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도 중요한 권농의 일환이었다. 밭곡식 가 운데 식용(食用)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양맥(兩麥, 보리와 밀)의 경작 과정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와 같이 파종, 제초, 수확에 이르는 농작업의 전 과정에 대하여 수령이 일상적으로 농민을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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