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1. 조선 왕조가 추진한 농정책
  • 흉년 대비와 흉황 파악
염정섭

조선의 농업에서 가뭄, 큰물 등의 재해는 특별하게 특정한 해에만 나타나는 사건이 아니라 거의 해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일상(日常)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 상왕(上王)의 자리에 있던 태종이 스스로 재위하던 19년 동안 가뭄 아니면 홍수가 발생하였다고 지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332)『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8월 임진. 자연 재해의 일상적인 발생은 필연적으로 조선 왕조 차원에서 이에 대한 대비와 대응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재해와 흉년에 대한 대비와 대응을 당시 황정(荒政)이라고 불렀는데, 황정은 조선 왕조가 수행한 농정책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었다. 황정은 크게 볼 때 흉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흉년을 막기 위한, 또한 흉년에 대비하는 행위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흉년이 실제로 닥쳤을 때 이를 이겨 내는 방책의 측면을 더불어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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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촬요(救荒撮要)』
『구황촬요(救荒撮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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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흉년을 막기 위한 또한 흉년에 대비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우선 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대해서 천심(天心)이 경계를 내린 것으로 원인 분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33)『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정축. 사람과 하늘 사이에는 감응(感應)되는 바가 있는데, 따라서 하늘이 재해를 내려 논밭의 곡식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경계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가뭄의 원인을 천심과 천리(天理)에서 찾게 되면 이를 해결하는 방안도 하늘에 호소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물었을 때 기우(祈雨)의 최종 대상인 하늘에 기우하는 제사를 설 행해야 한다는 논의가 세종 즉위 초부터 제기되었다.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늘에 직접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논리에 얽매이기도 하였지만,334)세종은 예조에서 하늘에 제사하여 기우(祈雨)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원단(圓壇)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하였다(『세종실록』 권101, 세종 25년 7월 을축). 원단(圓壇)에서 제천(祭天) 기우가 실제로 거행되기도 하였다.335)1419년(세종 1)에는 변계량(卞季良)의 주장에 따라 가뭄이 심하여 원단에서 하늘에 기우할 것을 결정하여 우의정 이원(李原)이 원구에서 비를 빌었다. 이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다음날까지 이어져 원구에 드리는 기우제가 중지되었다(『세종실록』 권4, 세종 1년 6월 경진·신사·임오). 1425년(세종 7)에도 원단에서 하늘에 기우하였다(『세종실록』 권29, 세종 7년 7월 임신).

기우제를 드리기 위해서 고려시대에 정리된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당대(唐代)의 『개원례(開元禮)』 등을 참고하여 제사 시기, 제사하는 곳 등에 대해 정리하였다.336)『세종실록』 권4, 세종 1년 5월 기해·정묘. 가뭄 대책의 일환으로 원통한 죄수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뭄이 심해지면 이죄(二罪, 사형 다음가는 죄) 이하 죄인의 석방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이 밖에 축성(築城) 등 토목 공사 중단, 공물(貢物) 부담의 경감, 잡다한 송사(訟事)의 정지 등 백성의 힘을 덜어 주는 일을 여러 가지로 찾아서 실행하였다.

다음으로 가뭄이나 재해가 닥쳤을 때 벌어지는 조선 왕조의 대응을 살펴보다. 먼저 국왕이 재해 발생의 원인을 밝히고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이를 구언(求言)이라고 하였는데, 신하들의 밝은 말(言)을 구(求)한다는 뜻이다. 특히 세종은 재해가 닥쳤을 때 자주 구언 교지(敎旨)를 반포하여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을 묘책을 신하로부터 얻고자 하였다. 국왕이 구언 교지를 반포하는 것은 늘 일어나는 상당히 의례적인 것이기도 하였지만 관료 상당수가 이에 호응하여 상소하였다. 당시의 관료들은 구언 교지에 호응하는 상소에서 재해 극복 대책뿐 아니라 인사(人事)나 재정(財政) 등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조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재해의 극복을 구체화시키기에 앞서 과연 그 해 어느 지역에 어떠한 재해로 말미암아 흉년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였다. 앞서 한 해 농사의 실제 진행과정에 대한 관리 감독을 수령과 조관을 중심으로 수행해 나가면서 이미 어느 정도 흉년 발생에 대한 예견을 하였을 터이지만 더 확실하게 가을 수확할 무렵 흉황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관을 파견하여 각 지역의 흉황 여부를 분명하게 밝히는 과정 인 답험(踏驗)을 수행하였다. 이때 해당 지역에 파견된 조관은 첫째로 기민(飢民)의 상황을 살피고, 둘째로 민간에 준비된 구황(救荒) 물품의 형편을 점검하고, 셋째로 도내 각 고을에 축적되어 있는 곡물의 양을 점검하였다.337)『세종실록』 권101, 세종 25년 9월 계유. 아사(餓死) 지경에 이른 굶주린 백성의 처지를 좀 더 일찍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이후의 황정을 시급하게 수행하는 데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흉년이 확실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짙어지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시행하는 대책의 첫 번째는 물론 기민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차지할 것이다. 아울러 기민의 부담을 덜어 주는 여러 가지 방책을 병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부세의 감면이었다. 경우에 따라 부세를 경감해 주거나 면제해 주었다. 부세의 감면은 대개 수령과 관찰사가 요청하였지만 경차관(敬差官)이나 행대감찰이 파견되어 흉황을 파악하였을 때에는 이들이 장계(狀啓)를 올려 요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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