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2. 농지 개간과 수리 시설 축조
  • 연해 지역 농경지 확대
염정섭

조선 초기 연해 지역의 농지 개간은 한광지의 개간이면서 동시에 진전으로 버려졌던 예전 농지를 복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연해 지역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따른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피해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연해 지역의 농지 개간은 농경지 확보이면서 또한 왜적을 막아 내기 위한 경제 기반의 구축이었고, 나아가 새로운 왕조 조선의 영역을 제대로 장악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연해 지역, 즉 바다 인근 지역에 비옥한 토지가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것이었다.348)『세종실록』 권97, 세종 24년 8월 신묘. 비옥한 연해 지역이 고려 말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다가 조선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농경지로 활용되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연해 지역 농지 개간은 둔전(屯田) 설치라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둔전은 중국과 조선에서 본래 주둔병(駐屯兵)의 군량을 자급하고, 각 관아(官衙)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진황지를 개척하여 경작케 한 전답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진황지를 개간하여 설치하는 것이 둔전이었다. 지배층, 피지배층의 연해 지역 개간과는 별도로 중앙 정부와 지방 군현 차원에서 진황지를 개척하여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 설치를 통한 중앙 정부와 지방의 주부군현(州府郡縣) 및 포진(浦鎭) 등의 각급 행정·군사 기구 즉 국가 권력의 구현체인 통치 기관의 토지 소유와 확대는 지배 체제의 강화와 직결되는 것이었다.349)이종영, 「선초의 둔전제에 대하여」, 『사학회지』 7, 연세 대학교, 1964 ; 이재룡, 「조선 초기 둔전고」, 『역사학보』 29, 역사학회, 1965. 바로 전국 각 지방의 한광지에다 둔전을 설치 할 때 중심 대상이 연해 주군(州郡)의 진황지였다. 조선 초기에 각 지방에서 둔전이 설치되는 과정은 곧 연해 지역의 개간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연해 지역 개간은 나아가 섬 지역의 개간으로 이어졌다. 1417년(태종 17) 10월에 섬의 새 개간지를 조사하여 전적(田籍) 즉 양안(量案)에 올리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남해안의 거제(巨濟)와 남해(南海) 두 섬의 경작할 만한 곳에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간하고, 계속 농사짓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농민을 보호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350)『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8월 병신. 거제와 남해에다 창선(昌善)까지 포함한 세 개 섬에서 개간한 토지가 1419년(세종 원년)에 1,130여 결(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될 정도로 전지를 확보하는 데 해도(海島) 개간이 유용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왜변(倭變) 등 도적(盜賊)의 출몰을 조심하기 위해 목책, 토성(土城) 등을 축조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르고 있었다.351)『세종실록』 권7, 세종 2년 윤1월 병신.

내륙 지역의 저지와 저습지도 연해 지역과 더불어 개간의 주요한 대상이었다.352)이태진, 「15·6세기의 저평·저습지 개간 동향」, 『국사관 논총』 2, 국사 편찬 위원회, 1989. 내륙 지역에서 저지를 개간한 주요한 사례로 경상도 밀양 수산제(守山堤) 인근에 설치된 국둔전(國屯田)을 들 수 있다. 저지 개간이면서 또한 둔전 설치의 사례이자 동시에 조선 초기 수리 개발과 연결된 사례가 바로 경상도 밀양 수산제 인근의 국둔전 설치였다. 수산제 인근의 저지 저습지 개간은 배수(排水) 즉 물을 빼내는 것과 방수(防水) 즉 물을 막아내는 것을 굳건하게 보장할 제방의 축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저지와 저습지는 지형적으로 주변에 비해 낮은 곳일 수밖에 없고, 특히 주변에 하천이 자리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성종대 경상도 밀양군에 설치된 수산제 국둔전이 바로 강가의 저습지를 개간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강변 저습지 개간의 관건은 바로 방수 즉 강수(江水, 外水)의 범람을 막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수 즉 지대가 낮은 곳으로 모여 드는 내수(內水)의 고임을 풀어내는 것이었는데, 수산제 국둔전은 바로 수산제라는 제방을 통해 이를 해결하였다. 밀양군 양동역 앞에 증축된 제방과 수문이 바로 이러한 용도에 걸맞 은 시설이었다. 그리고 경작지 주변에 도랑 즉 거(渠)를 크고 깊게 파서 물이 잘 빠지도록 하는 것도 요구되었다.353)『성종실록』 권63, 성종 7년 1월 경신. 이와 같이 내륙 지역 저지 개간은 수리 시설과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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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5세기 말 16세기로 접어들면 해택(海澤) 개발이라고 불린 연해 간석지(沿海干潟地)의 농지화가 이루어졌다. 해택 개발은 대규모 농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권력에 가까운 권세가(權勢家)들이 주목하는 것이었다. 세종대에 의정부(議政府)는 인구의 증가와 전토의 제한성을 논거로 삼아, 바다에 가까운 주군의 해변에 제방을 쌓아 수전을 만들도록 감사를 독려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다.354)『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 1월 을축.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경종할 만한 전답을 얻게 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국가 권력이 나서서 인력(人力)과 물력(物力)을 투입하여 해택을 개발하고 이를 일반 민인(民人)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가장 이상적인 논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성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해택 개발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것처럼 개간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농지의 규모 등의 문제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투입한 물력을 기준으로 개간하여 확보한 전토를 나누고, 개간에 들어간 노동력에게 노임(勞賃)을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해택의 조성 은 많은 인력과 물력을 위험성을 무릅쓰고 투입할 수 있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반 백성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권력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권세가들이나 시도할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권세가가 둔전의 명목으로 해택 즉 간석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런데 경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사유지(私有地)로 전환시키고, 주민을 병작자(竝作者) 즉 소작인으로 흡수하여 농장(農場)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55)이태진, 「16세기 연해 지역의 언전(堰田) 개발」, 앞의 책, 1986. 이와 같이 연해 지역의 개간은 내륙의 저지 개간과 더불어 조선의 농경지 확대, 전답 확보의 측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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