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2. 농지 개간과 수리 시설 축조
  • 조선 초기 수리 정책의 시행
염정섭

조선 초기의 수리 정책은 제언, 천방 등 수리 시설의 축조와 관리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여러 가지 수리 시설 가운데 특히 제언과 천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태종대에 권농 사업의 일환으로 수리 정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372)조선 초기 수리 정책과 수리 시설 현황에 대한 연구 성과로 다음 논저를 참고할 수 있다. 이광린, 『이조 수리사 연구』, 한국 연구원, 1961 ; 김용섭, 「조선 초기의 권농 정책」, 『동방학지』 42,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1984 ; 이태진, 「15세기의 수리 정책과 수리 시설」,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 기술-조선 유교 국가의 경제 발전 모델-』, 태학사, 2002. 조정은 농업 생산에서 수리가 가지고 있는 의의를 크게 강조하여, 제언과 천방이 농사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373)『성종실록』 권21, 성종 3년 8월 임오. 태조대 이후 역대 국왕이 임지로 떠나는 수령에게 당부하는 주된 지시 사항이 바로 권농과 수리에 대한 것이었다.374)『문종실록』 권5, 문종 즉위년 12월 을미. 수령에게 수리 시설의 관리와 수보(修補)에 관하여 당부하는 것은 관례가 되었으며, 가을과 겨울 사이에 권농관으로 하여금 제언의 수축을 지시하였다.375)『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7월 신유. 수령은 매년 봄가을로 관찰사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고, 제언을 수축해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규정되었다.376)『경국대전』 권2, 호전, 전택.

조선 초기에 나타난 수리 시설의 축조 필요성에서 당시 수리 정책 시행의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수리 시설은 수전에서 벼를 재배할 때 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다. 수전이 크게 증대하면서 수리 시설의 필요성이 커졌다. 특 히 저지, 저습지와 해안의 진황전(陳荒田)이 개간되면서 앞서 산곡(山谷) 간에도 많이 위치하던 수전은 평지에 주로 자리 잡게 되었다.377)이태진, 앞의 글, 1989. 그리고 수전의 위치가 하천 주변까지 확대되어 나가고 있었다. 하천가에 자연적인 방죽을 허물고 거기에 자라고 있던 초목(草木)을 베어 내어 수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수리 시설로 축조된 제언과 천방은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되었다. 주된 용도는 한해(旱害)와 수해(水害)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대개 한해를 막기 위한 목적만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은 수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도 제언과 같은 시설이 필요하였다. 큰물을 만나게 되면 농민은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경작지에서 물을 빼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때 제언은 미리 갖추어 놓은 수구를 이용하여 큰물을 만나기 전에 가두어 놓았던 저수를 방류하여 새로 들어오는 물을 상당한 정도로 담아 둘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큰물이 아무런 제지 없이 경작지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기 예측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제언이 허물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리고 제언은 이와 같은 관개 목적 외에 물고기를 인공적으로 키우는 양어용(養魚用)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378)태종대 제언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활약한 우희열(禹希烈)은 관개와 양어(養魚)를 제언의 효용으로 거론하였다(『태종실록』 권17, 태종 9년 3월 을축).

만약 제언이 허물어지게 되면 제언 아래에 자리한 전지가 모두 함몰되어 큰 손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전라도 고부에 위치한 눌제(訥堤)가 무너졌을 때 제언 아래에 있던 전지 600여 결이 침수된 사실은 그러한 한 예였다.379)『세종실록』 권9, 세종 2년 8월 정사. 제언이 허물어지면 이를 보수하여 다시 수축하였다.380)전라도 관찰사가 앞서 허물어진 눌제(訥堤)의 수축을 청하자 의정부와 육조는 풍년을 기다려 수축하도록 지시하고 있다(『세종실록』 권9, 세종 2년 9월 기묘). 제언을 다시 수축하는 작업은 농민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었고, 지배층에게 있어서도 긴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농민의 역역(力役)을 동원하여 제언을 수축하는 작업은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리 시설로 제언을 쌓는 것은 권농 차원일 뿐만 아니라 흉년을 대비하는 계책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鄭甲孫)에게 흉년이 찾아드는 것을 방비하는 차원에서 제언을 축조하도록 독려하는 유시를 내 린 것이 바로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381)『세종실록』 권106, 세종 26년 10월 병진. 당시에도 제언 내의 경작 가능지를 모경(冒耕)하기 위하여 제방을 헐어 내어 저수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리의 효과를 상실시키는 이러한 모경 행위를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82)『세종실록』 권112, 세종 28년 5월 정축. 또한 중국과 일본에서 쓰고 있던 수차(水車)라는 관개 기구를 조선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383)제언과 천방 등 조선 전기 수리 시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 업적을 참고할 수 있다. 이광린, 앞의 책, 1961 ; 이태진, 「16세기의 천방(보) 관개의 발달-사림 세력 대두의 경제적 배경 일단-」,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간행 위원회, 1981 ; 이호철, 「농구 및 수리 시설」, 앞의 책, 1986 ; 管野修一, 「李朝初期農業水利の發展」, 『朝鮮學報』 119·120, 朝鮮學會, 1988.

수리 시설 축조는 수전이 하천 주변에 밀접하게 다가서게 된 사정과 연관된 것이었다. 즉 천변(川邊)에서 물의 흐름이 넘치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완충지가 사라진 상태에서 큰물을 만나게 되면 천변의 경지가 모래로 뒤덮이는 피해를 입는 것이다.384)『성종실록』 권8, 성종 원년 10월 갑인. 호조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제읍(諸邑)에 구폐가행조건(救弊可行條件)을 내리는 가운데 천변에 자라고 있는 초목을 베고 만든 수전에 대하여 경작자가 경작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 전택(田宅)에는 천변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을 벌목하여 경작할 경우 처벌을 내리고 있다.385)『경국대전』 권2, 호전 전택. 堤堰及裨補所 林藪內 伐木耕田者 杖八十追利沒官. 이와 같이 수리 시설을 축조하고 개축하는 것은 저지대의 개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종대에 이르면 삼남(三南) 지방의 제언 숫자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등장한다. 1523년(중종 18)에 하삼도의 제언 수를 조사하기 위해 제언사(堤堰司) 낭관(郎官)을 파견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도별 제언 수가 경상도는 800여 처, 전라도는 900여 처, 충청도는 500여 처로 한 사람이 전부 맡아서 조사할 수 없다는 보고를 먼저 올렸다.386)『중종실록』 권46, 중종 18년 정월 경술. 중종대에 파악된 제언 숫자가 결코 후대에 뒤지지 않는 상당한 정도의 것이었으며, 이는 15세기 이후의 수리 시설 축조에 대한 관심과 열의에 따라 성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