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3. 벼농사 짓는 법과 밭작물 재배법
  • 16세기 이앙법의 보급 및 확산
염정섭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그 기술 체계가 잘 정리된 이앙법은 16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충청도의 일부 선진 지역까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반 경상도의 상당 지역과 영동 지역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었다.395)『성종실록』 권6, 성종 원년 6월 임술 ; 『중종실록』 권65, 중종 24년 5월 기미. 1512년(중종 7) 강원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은 영동과 영서의 농사 형편을 설명하면서 영동 지역에서는 오로지 묘종 즉 이앙에만 힘쓰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396)『중종실록』 권15, 중종 7년 5월 정사. 영서 지방은 비록 홍수와 가뭄이 들더라도 수전과 한전이 반반씩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농사를 전부 망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지만, 영동 지방은 비록 수전이 많아도 수경 직파에 힘쓰지 않고 묘종만 일삼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 바람의 재앙이 들게 되면 이앙하는 시기를 놓치게 되어 수확이 부실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16세기 초에 이르면 이앙법이 경상도·강원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한하거나 금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게 되면 이앙법은 경상도 지역 여러 곳으로 보급되어 나갔다. 예천(醴泉), 대구(大邱)의 경우 16세기 후반에는 이미 이앙법을 채택하여 수전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었다. 예천은 낙동강 서쪽의 내륙 지역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높은 산이 많고, 남쪽으로 향하면서 높이가 점차 낮아져서 구릉지로 변하는 지형이었다. 2000년대의 농사 현황을 보면 예천군은 논농사 위주의 농업 지역으로 논이 총 경지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 지역은 경상도 내륙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 곳이다. 16세기 중반 예천과 대구 지역의 이앙법의 보급 상황을 예천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활약하였던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남긴 『초간일기(草澗日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397)정순우·권경렬, 「해제 : 초간일기의 자료적 성격과 의미」, 『초간일기』,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7.

16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수전 경종법의 하나인 이앙법의 보급이 삼남 중에서도 특히 전라도·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전라도 옥과현(玉果縣)에 거주하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킨 금산(錦山) 유팽로(柳彭老, ?∼1592)는 자신이 지은 농서인 『농가설(農家說)』에서 5월 망종(芒種)을 이앙의 한계로 설정하였다.398)유팽로(柳彭老), 『월파집(月坡集)』 권2, 농가설(農家說) : 향토 문화 연구 자료 4집, 전라남도, 129쪽. 그가 망종을 이앙의 한계 시기로 설정한 것은 망종 때까지 이앙해야 한다는 것을 당시 전라도 옥과현에서 하나의 농사 관행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농가설』에서 특히 수경 직파에 대한 언급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16세기 후반 전라도 옥과 지역에 이미 이앙법이 보급된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399)유팽로, 『월파집』 권2, 농가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를 통해서 16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삼남의 여러 지역으로 이앙법이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충청도 지역의 경우는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임천(林川)에서 피난 생활을 한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을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쇄미록』에서 이앙법의 원리가 수도 재배에 동원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앙법에 의한 수도 재배를 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벼농사에 나선 오희문이 채택한 경종법은 직파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벼의 모(苗)가 성기게 자라는 곳에 보묘(補苗, 부분 이식)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부분 이식에 나서고 있다는 점 자체가 ‘옮겨 심기’라는 이앙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보묘를 하는 시기가 음력 5월로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이앙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앙기(秧基)에서 자라고 있던 화묘(禾苗)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충청도 지역에서도 적어도 16세기 말경 이앙법의 원리를 활용한 벼 경작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앙법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시기적으로 편차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보급된 사정은 농서에 기록된 경종법의 증보, 앙기 작성의 변화, 건앙법(乾秧法)의 개발과 보급 등으로 알 수 있다.400)김용섭, 앞의 책, 1990, 20∼22쪽. 이러한 이앙법의 보급 원인은 소규모 보 시설의 증가와 같은 수리 시설의 점진적인 호전, 농업에 관한 지식이 향상되면서 이앙법이 제초 노동력의 절감, 토지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이점을 가져온다는 것을 농민들이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401)조선 후기에 수리 문제가 빈번하게 제기되고 논의되는 사정은 아직 이앙에서 부딪히는 물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리 시설의 개선이라는 점을 이앙법 보급의 근본적인 배경으로 설정하기 힘든 상황이다(김용섭, 앞의 책, 1990, 110쪽). 직파에서 네다섯 차례의 제초 작업이 필요하던 것을 이앙을 할 경우에는 두세 차례로 줄일 수 있었고, 이렇게 절감된 노동력을 다른 방면으로 투여할 수 있다는 점과402)구체적으로 이익의 지적에 따르면 이앙법을 채택할 경우 공력을 파종(직파)에 비해서 5분의 4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3, 인사문(人事門), 본정서 상(本政書上), 251쪽). 이앙을 하면 수확량이 직파에 비해서 높게 나타난다는 점, 이앙을 하면 도맥이모작(稻麥二毛作)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 이앙법의 이점을 곧바로 이앙법의 보급 원인으로 이해하였다.403)김용섭, 앞의 책,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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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앙법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유용성뿐 아니라 이앙법이 갖고 있는 해결해야 할 난점, 즉 이앙기(移秧期)의 물 공급 문제라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발달이 바로 이앙법 보급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앙법이라는 경종법의 기술적인 체계와 세부적인 기술 요소의 발달, 즉 이앙법의 안정성을 증대시키는 기술 발달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보급이 지역적으로 또한 시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앙법의 보급은 실로 이앙법의 기술 수준의 진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것은 이앙법을 구 성하고 있는 세부적인 기술 요소로서 앙기 관리와 앙기 시비(施肥)에서 나타난 발전, 그리고 이앙 시기를 적절하게 맞추기 위한 파종 시기의 선택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앙법 실행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보조적인 기술 개발이었다. 또한 이앙법의 채택으로 야기되는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 즉 이앙기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의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 노동 조직으로서 두레의 형성이라는 농업 여건의 변화는 특히 삼남 지방 전역에 이앙법이 보급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404)주강현에 따르면 두레의 보급은 이앙법의 중심적인 채택 지역인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고 두레 전파의 계선은 바로 이앙법의 한계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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