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반 경상도 상주 지역에 거주하던 고상안이 지은 농서가 『농가월령』이다.451)『농가월령』의 16세기 농법을 연구한 성과로 다음 논문 참고. 김용섭, 「농가월령의 농업론」, 『동방학지』 54·55·56,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1987(앞의 책, 1988 재수록) ; 민성기, 앞의 글, 1985 ; 앞의 책, 1988 재수록. 고상안은 관직 생활을 대부분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보냈는데, 수령으로 권농을 수행할 때 조사한 관행 농법에 대한 지식과 상주 지역에서 퇴거(退居)해 있을 때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농가월령』을 편찬하였다.452)고상안(高尙顔), 『농가월령(農家月令)』, 농가월령서(農家月令序). 고상안은 21세 때인 1573년(선조 6)에 진사시(進士試)에 등제(登第)한 뒤에 1578년(선조 11)에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을 거치면서 지방 수령의 자리를 많이 역임하였다.453)고상안, 『태촌집(泰村集)』 권6, 행년기(行年記). 그는 수령직을 수행하면서 명농(明農)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안목을 넓히려고 하였다. 자신이 직접 관료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에 관심을 가지고 묘미를 터득하였다고 토로하고 있을 정도였다.454)고상안, 『태촌집』 권5, 효빈잡기 하(效嚬雜記下).
고상안이 『농가월령』을 완성한 시기는 67세 되던 1619년(광해군 11)이 었다. 『농가월령』은 우선 경상도 상주의 지역적 농법을 정리한 지역 농서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경상도 상주 지역에서 활용하던 관행적인 농법과 더불어 당대의 농가에서 채택하던 농업 기술을 담고 있다. 『농가월령』은 12달과 24절기를 기준으로 농가에서 해야 할 농사일을 달마다, 절기마다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편찬 방식은 당시 일반적 농사법의 주요한 내용을 담아내려는 것이었다. 즉,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일반적으로 권장되던 농사법을 빠뜨리지 않고 수록하려는 입장에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상주의 농법만이 아니라 당대에 많이 채택하고 있던 농사법을 수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상안은 나아가 『농가월령』을 편찬하면서 농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언해본(諺解本)을 만들기도 하였다.455)『농가월령』의 언해본이 현재까지 전해지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가사체의 ‘농가월령가’의 모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가월령』에 소개되어 있는 수전 농법 즉 벼농사 짓는 법의 가장 커다란 특색은 경종법의 측면에서 이앙법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전 경종법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해 나가면서 지역적으로 확산되고 보급된 전후 사정을 『농가월령』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농가월령』에서 건앙법(乾秧法)을 소개하면서 또한 건파법(乾播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앙법에서 직면하게 되는 위험성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456)김용섭, 앞의 책, 1988, 139쪽. 따라서 이러한 건파법의 기술 내용은 이앙법의 안정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고 나아가 이앙법이 보급되는 데 중요한 배경 요인이 되었다.457)宮嶋博史, 「朝鮮半島の稻作展開」, 『アジア稻作文化の展開 : 稻のアジア史 2』, 小學館, 1987.
고상안은 『농가월령』에서 도종(稻種)을 조도(早稻)·차도(次稻)·만도 (晩稻) 이외에 조앙종(早秧種)·차앙종(次秧種) 등으로 구별하였다.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는 농업 현실에 기반하여 이앙법에 적합한 품종을 조앙종·차앙종·만앙종(晩秧種)으로 세분한 것이다. 이러한 도종의 분류는 주앙(注秧)과 이앙(移秧) 시기의 선후에 따라 조(早)·차(次)·만(晩)으로 세분한 것이었다.
『농가월령』에 보이는 한전 농법은 근경(根耕), 간종(間種) 등의 방법에서 앞선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비해 훨씬 상세한 내용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근경과 간종에 뒤따르던 여러 가지 제약 요소가 떨어져 나간, 좀 더 자유롭게 농경을 수행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농가월령』의 한전 경작 방식을 1년 2작식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농가월령』에 보이는 한전 농법은 상주 인근 지역의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16세기 중후반 이후 한전에서의 윤작(輪作) 체계에서 조선 전기에 비해 1년 2작 방식이 더욱 광범위하게 채택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전 윤작 농법은 지역적으로 특색을 지니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노농들의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그 지역에 가장 적합한 합리적인 전지(田地) 이용 체계가 형성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이었다.458)민성기, 앞의 책, 1988, 182∼183쪽.
16세기 중후반 이후에 편찬된 지역 농서로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은 몇 종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당대의 농업 현실과 농업 기술의 전개 방향을 고려할 때 많은 지역 농서가 각 지역에서 편찬되었으리라는 점을 쉽사리 추론할 수 있다. 지역 농서는 『농사직설』과 달리 지방의 향촌 지식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큰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향촌의 실제 농업 기술 사정을 잘 파악한 바탕에서 농법을 설명하고 정리하며 나아가 개선하려는 입장이었으며, 국가의 권농책이나 조세 확보 욕구에서 비롯된 농업 기술 개선책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