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5. 농업 경영과 농촌 경제의 변화
  • 토지 소유 관계의 변화
염정섭

조선 초기 토지의 사적 소유는 기본적인 측면에서 국가적인 법제(法制)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었다. 개인의 토지 취득(매매, 개간), 경영, 처분(증여, 분여(分與), 전당), 상속 등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459)『경국대전』 권2, 호전 전택. 토지 소유자가 토지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매입하거나, 개간이나 개척 등의 과정을 거쳐 취득할 수 있었다. 또한 전주(田主)라 불린 토지 소유자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거나, 노비에게 경작을 맡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경영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다가 전주는 자손이나 친척에게 소유지를 떼어 줄 수 있었고, 죽은 뒤를 고려하여 미리 상속해 줄 수도 있었다. 전주의 소유지를 조업전(祖業田)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사적 소유 토지는 국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460)『성종실록』 권240, 성종 21년 5월 정축.

조선이 개창된 직후에는 토지 매매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 3월에 토지 매매를 허용하는 조처가 시행되었다. 이 조치에서 토지 매매의 허용이 비록 부득이한 경우로 한정되기는 하였지만, 법제적으로 금 지되었던 토지 매매가 이미 사회적으로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조정(朝廷)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61)이재수, 「16세기 전답 매매의 실태」, 『역사 교육 논집』 9, 경북 대학교 사범 대학 역사과, 1986, 62쪽. 그리고 15세기 말경부터는 절대적·배타적 지배가 허용되었고, 주인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던 동산(動産)이나 노비(奴婢), 가옥(家屋) 등에 한정하여 쓰던 소유물 표시 개념인 ‘기물(己物)’이라는 용어가 토지에까지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어 토지에 대한 소유 관념이 전 시기보다 훨씬 완숙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462)박병호, 『한국 법제사고(韓國法制史考)』, 법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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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토지에 대한 사적인 권리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법제적 규정과 다른 현실적 제약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전주가 토지 소유에 대한 제반 권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바로 근대의 토지 소유권과 조선 왕조의 토지 소유권이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우선 조선 왕조의 사적 토지 소유자인 전주는 토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타인, 향촌 사회, 국가에 대하여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경작과 이용이라는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토지 소유자가 자기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진전으로 방치할 경우, 소유권 자체는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타인이 경작하여 갈아먹는 것(耕食)을 막을 수는 없었다.463)『경국대전』 권2, 호전, 전택. 진전이란 묵힌 땅, 즉 전토 (田土)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경작하지 않는 땅을 가리키고, 1년에서 수년 동안 묵힌 채 내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진전으로 내버려 두었다고 해서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경작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이 갈아먹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전주가 실질적인 토지 소유의 실익을 차지하려면 경작과 이용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한편 국가적인 차원에서 토지 소유 관계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던 수조권적(收租權的) 토지 지배는 16세기를 경계로 직전법(職田法)의 소멸과 함께 현실적인 의미를 상실하였다. 이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현실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전면에 등장하는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 것이었다. 사적 토지 소유권에 근거한 소농(小農) 경영은 자신의 생산물을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464)『명종실록』 권19, 명종 10년 11월 임자 ; 『국조보감(國朝寶鑑)』 정조 9년 8월(『명종실록』 권20, 명종 12년 2월 정미).

16세기 중반을 고비로 토지 소유 관계의 측면에서 변화가 발생하였다. 16세기 말 직전법이 폐기되면서 수조권이 소멸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소유 관계로 일원화되었다.465)이경식, 앞의 책, 1986, 265∼279쪽. 앞서 과전법(科田法)에서 관인(官人)이 보유하였던 수조권은 사적 소유권을 일정하게 제약하는 현실적인 권한이었다. 직전법마저 폐지되면서 토지 소유 관계는 사적 토지 소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이제 사적 토지 소유권을 제약하는 가장 현실적인 요인으로 신분 관계가 남게 되었다.466)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의 사적 소유 문제」, 『동방학지』 85,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1994. 현실적인 신분 관계 속에서 관료들이 직권을 남용하여 토지를 집적하였고, 신분적 차이에 따라 경영 규모의 격차와 농형(農形)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양반층은 등급이 좋은 논밭을 우세하게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논밭이 각각 희소한 지역에서 논밭을 소유하고 있는 비율이 높았다.467)김용섭, 「양안의 연구」,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Ⅰ), 일조각, 1970, 123∼134쪽. 한편 토지 소유 면적의 측면에서도 양반층이 소유하고 있는 농지가 평민층이나 천민층이 소유하고 있는 농지보다 평균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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