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5. 농업 경영과 농촌 경제의 변화
  • 농업 경영의 변동
염정섭

조선 전기의 경우 대체적으로 농장제(農莊制) 농업 경영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자영 농민의 농업경영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과전법이 존속하기 위한 바탕이 바로 자영농(自營農)이었다.468)김태영, 앞의 책, 1983. 당시 조선 정부는 자영농을 보편적인 국역(國役) 대상자로 확보하기 위하여 이미 전개되고 있던 병작제(竝作制)를 제한하고 있었다. 병작제는 토지가 없는 농민이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작은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소농민 경영의 내부에서 토지를 상실하고 병작 전호농(佃戶農)으로 전락하거나 생산 수단의 확보를 통한 중농(中農)·부농(富農)으로 상승하는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농촌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농업 경영의 주된 담당자는 양인 농민과 노비 농민이었다. 양인이나 노비 농민 가운데 자신의 소유지를 갖고 자신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농업 경영을 수행하는 경우를 소농민 경영이라고 부른다. 조선 전기의 소농민 경영은 기본적으로 개별적 소유라는 토지 소유 관계의 전개 속에서 소규모 개별적 생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469)김태영, 「조선 전기 소농민 경영의 추이」, 앞의 책, 1983, 145쪽. 과전법 초기에 자기 소유의 토지를 스스로 경영하는 자영농의 존재는 대략 지주까지 포함된 수치로 10분의 7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470)『세조실록』 권11, 세조 4년 정월 병자.

자영농의 일반적인 토지 소유 규모는 1, 2결 정도에 불과하였다.471)김태영, 앞의 책, 1983, 153∼155쪽. 소농민의 농업 경영은 이들이 대부분 척박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시비와 심경(深耕)이 곤란한 여건에 놓여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 정부 수취의 주된 대상자였기 때문에 확대 재생산은 물론 단순 재생산의 여건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농민 경영의 내부에서 토지를 상실하고 병작 전호농으로 전락하거나 생산 수단의 확보를 통한 중농·부농으로 계층 분화하는 현상이 필연적인 추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 전기의 토지 매매 금지 규정이 1424년(세종 6)에 폐기되면서 그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되 었다.472)김태영, 앞의 책, 1983, 157∼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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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 토지 소유 관계가 사적 토지 소유로 정립되면서 농업 경영의 형태도 변화하였다. 16세기 이후 소농민 경영의 분화가 더욱 촉진되면서, 대토지 소유의 확대와 지주 경영의 전개가 본격화하였다. 관인층을 전형으로 하는 권세가들이 점차 토지를 축적하게 되자 자영농은 그에 예속되는 소작인으로 전락하였고, 신분상으로도 노비로 떨어지는 것이 대세였다.

조선 초기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의 농업 경영은 16세기까지 노비 노동을 이용하는 직영지 경영, 흔히 농장제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지주들은 대토지 농업 경영을 농장적인 요소를 띤 노비제적인 경영에서 병작제로 전환하게 되었다.473)이경식, 「16세기 지주층의 동향」, 『역사 교육』 19, 역사 교육 연구회, 1976, 139∼183쪽. 이때 양반 지주는 자작지(自作地)에서는 노비의 사역을 통해 구현하는 자작제 경영 형태를 주로 채택하면서도, 일정한 토지를 ‘작개(作介)’라 하여 노비의 책임 경작지로 할당하고 노비의 생계를 위해 별도의 ‘사경(私耕)’을 지급하는 ‘작개+사경’ 경영 형태를 채용하였다. 작개제는 양반 지주의 직영지 경영이 자작제에서 병작제로 이행하는 도중의 과도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되 고 있다.474)김건태, 『16∼18세기 양반 지주층의 농업 경영과 농민층의 동향』, 성균관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7. 한편 16세기 지주층의 토지 집중은 유통 기구의 성장·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고, 방납 구조(防納構造)나 사행 무역(使行貿易) 등에 참여하고 국가의 조세 수취 과정에 편승하면서 토지를 집적하였다.

17세기로 들어서면 지주의 직영지 경작 규모는 대폭 축소되고 병작제를 중심으로 지주제가 전개되었다. 병작제의 확대는 소농민의 토지 상실이 가속화되는 상황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더욱이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사회적 재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신분제의 변동과 함께 농업 경영·토지 소유 등의 측면에서 광범위한 농촌 사회의 분화·분해가 나타났다. 농민층 분해의 진전으로 임노동적(賃勞動的) 기반 아래 시장성을 고려한 상업적 농업을 영위하는 농민들이 등장하였고,475)김용섭, 「조선 후기의 경영형 부농과 상업적 농업」, 앞의 책, 1990, 267쪽. 신분제 변동의 영향으로 일반 양인, 노비층 가운데 부농, 지주가 성장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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