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5. 농업 경영과 농촌 경제의 변화
  • 농촌 사회의 유통 경제
염정섭

농촌 사회의 구성원인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 생산과 이들 서로 간의 직접 교역에 바탕을 둔 교환 시장 곧 농촌 시장이 바로 장시(場市)였다. 장시는 농민들 사이에 상품이 거래되는 유통 공간이자 다양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는 유통 기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 남부에서 출현하였고, 이후 16세기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면서 정기적으로 개설되는 정기 시장으로 자리 잡아 갔다. 정치적 중심지인 행정 도시와 같은 곳에서의 상거래는 고대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농촌 사회에 기반을 둔 시장은 15세기 후반에 출현한 장시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장시의 등장과 정기적인 개설이라는 농촌 상업의 발달은 자연재해나 국가의 부세 제도 운영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고려시대 이래 농민들의 유통 경제 참여를 제약해 오던 여러 가지 요인이 극복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476)이경식, 「16세기 장시의 성립과 그 기반」, 『한국사 연구』 57, 한국사 연구회, 1987 ; 박평식, 「조선 전기의 행상과 지방 교역」, 『동방학지』 77·78·79,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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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도(茂長縣圖)
무장현도(茂長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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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에 등장한 장시는 당초 장문(場門)이라고 불렸다. 성종 초인 1470년대에는 전라도 무안 등 여러 읍에서 이익을 꾀하는 무리가 장문을 열어 민에게 해를 끼친다는 보고가 중앙 정부에 올라오고 있었다.477)『성종실록』 권20, 성종 3년 7월 임술. 전라도 무안·나주 등 물산이 풍부한 여러 읍에서 대흉황(大凶荒)을 맞게 되자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장문을 열고, 여기에 의지하여 흉년을 넘길 수 있었다는 보고였다. 이러한 보고를 접한 조정은 흉년을 극복하기 위한 구황 차원에서라도 장문의 개설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대 장문 개설에 관한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초기에 늘 나타나고 있던 자연재해가 장시 내지 유통이 발달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478)오종록, 「15세기 자연 재해의 특성과 대책」, 『역사와 현실』 5, 한국 역사 연구회, 1991. 수재나 한재 등으로 말미암아 수확이 저조하여 많은 농민이 굶어 죽기에 이른 때에는, 형편이 나은 지역으로부터 부족한 지역으로 미곡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때로는 이 과정에 투기가 유발되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자연재해로 인한 곡물 가격의 지역 차를 이용하여 상인들이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479)남원우, 「15세기 유통 경제와 농민」, 『역사와 현실』 5, 한국 역사 연구회, 1991. 마찬가지로 농민들은 장시를 이용하여 교역에 수반하여 생기는 이득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장시에서 벌어지는 교역의 이득은 이에 참여한 농민·수공업자에게 곧바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시는 농민의 새로운 교환 시장으로서, 이전에는 없었던 유통 기구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장문은 서울의 시전(市廛)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480)『중종실록』 권8, 중종 4년 6월 갑자.

장시가 처음 발생하였을 때는 월 두 차례씩 개설되었다. 그 이후 16세기를 거치면서 농민의 교역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장시는 각 도·각 읍으로 확산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장시에 대한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장시가 열리는 횟수도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월 세 차례씩 장시를 개설하는 10일장도 생겨나고 있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장시는 30, 40리 지점마다 설치되고 오일장(五日場)으로 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여러 개의 장시가 상업 유통에서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는 장시권을 형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481)이경식, 앞의 글, 1987, 5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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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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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장시는 농촌 시장으로 성립하는 단계에 있었으며, 비로소 장시권 형성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전 기간을 통하여, 장시의 수는 증가하고 개시(開市) 횟수는 늘어 갔다. 이는 그만큼 농민층의 교역이 성행하고 교역 물자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농민·수공업자의 소상품 생산과 유통은 활발해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물자 구득은 장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처럼 장시는 농민 경제의 유통 기구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발달하여 갔다.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 사회에서 장시를 통하여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사상(私商) 계층이 성장하였다.482)백승철, 『조선 후기 상업론과 상업 정책』, 연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6. 장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시전을 중심으로 물화(物貨) 유통이 수행되던 한양 인근의 경기 지방에서도 빈번히 개설되었고, 17세기 이후 읍치(邑治)의 범위를 벗어나 산곡(山谷) 간까지 확대되었다. 장시의 확산은 기본적으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기 인한 것이었지만, 농촌의 경제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한편 인접한 장시들은 상호 간에 흡수·통합·이설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이 마련되었다.483)한상권,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장시 발달에 대한 기초 연구」, 『한국사론』 7,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1, 183∼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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