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5. 농업 경영과 농촌 경제의 변화
  • 쌀과 면포 중심의 화폐 유통
염정섭

15세기 후반 이후 농민들은 장시와 연관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화폐 경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교역의 가치 척도인 화폐가 농민 중심으로 성립하여 갔다. 이른바 포화(布貨) 경제가 그것이다.484)이태진, 앞의 책, 1989, 95∼104쪽. 포화 즉 면포를 주된 물품 화폐로 활용하는 체제는 특히 장시와 연결되어 발전하였다. 동전제(銅錢制)는 15세기 초반 이미 포기되었으며, 국가에서 정한 화폐로 포(布, 정포(正布)·저포(苧布)·세포(細布))와 저화(楮貨)가 사용되고 있었다.485)『경국대전』 권2, 호전, 국폐(國幣). 그런데 저화는 당초부터 사용 범위가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관에서 만들어 내기 때문에 유한하고 실제로는 쓸모없는 명목 화폐였으며 게다가 공신력도 약하였다. 이에 비하여 면포는 민간에서 직조(織造)되기 때문에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물품 화폐였다. 그리하여 저화는 마침내 통행되지 못하고 오로지 면포만이 국폐(國幣)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아직까지 법적 규정은 보이지 않고 규모도 제한적이었으나 미곡(米穀)도 교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486)고석규, 「16·17세기 공납제 개혁의 방향」, 『한국사론』 12,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5, 204∼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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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복원품
포화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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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포가 일반적인 유통 수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자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에 따라 정상적인 옷감으로 이용할 수 없을 만큼 품질이 거칠고 나쁜 면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487)이 시기 면포의 화폐적 기능에 대하여는 송재선, 「16세기 면포의 화폐 기능」, 『변태섭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논총 발간 위원회, 1986 참조. 이처럼 추악(麤惡)한 면포를 추포(麤布)라고 불렀는데, 면포의 화폐 기능의 다양한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15·16세기에 물품 화폐로 이용한 포화는 5승포(五升布)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1승은 80올이므로 5승포란 곧 400올로 짠 면포를 가리킨다. 그런데 16세기에는 3승포·4승포 등이 상포(常布)란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5승포보다 훨씬 거칠게 짜여졌다. 추포 이외에 악포(惡布)라고까지 불렸던 2승포는 너무 성글어 옷감으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올 수가 성글었을 뿐만 아니라 길이도 짧아서 1필당 30척 이하로 35척의 기준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기준에 미달한 옷감이라는 실생활의 용도에 사용할 수 없는 면포가 만들어졌던 까닭은 바로 경제적인 목적 곧 화폐로서의 용도 때문이었다. 5승포보다 훨씬 적은 규모의 거래에 활용하기 위해 그러한 낮은 질의 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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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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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지방 장시 발달을 비롯한 당시 사회의 여러 발전적인 변화들로 미루어 볼 때 2승포·3승포 등은 농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성립한 소액 화폐라고 할 수 있다. 소액 화폐로서의 상포, 고액 화 폐로서의 정포(正布), 그 위에 은(銀)이 통용되는 것이 당시의 화폐 체계였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는 이러한 체계를 갖춘 나름대로 발달한 화폐 경제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488)이태진, 앞의 글, 102∼103쪽 참조.

한편 추악한 면포가 유행함에 따라 포가 지닌 본연의 물품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조치로 악포의 사용을 금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방편으로 직조자(織造者) 및 짧게 잘라 쓰는 자, 2승포·3승포를 조작하는 자는 초범이면 장(杖) 100, 도(徒) 3년으로 처벌하고, 재범이면 전가(全家)를 변방(邊方)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짧은 포를 사용하는 자는 장 80 등에 처하는489)『중종실록』 권40, 중종 15년 9월 경오. 등 처벌 규정을 마련하여 악포의 통행을 금하고자 하였다. 이후 처벌 규정은 직조한 사람은 초범일지라도 집안 사람 전부를 변방에 옮겨 살게 하는490)『중종실록』 권49, 중종 18년 10월 무오. 등 더욱 강화되었다.

이처럼 악포의 사용 금지에 대한 논의가 집중되는 가운데도 여전히 면포가 가장 일상적인 교환 수단이었다. 그리고 면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은 미곡이 교환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쌀을 선호하는 경향과 함께 미곡의 생산 증대는 쌀이 교환 수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미곡이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곡물이 상품화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였다. 곡물의 상품화는 15세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16세기 이래 상품 경제의 발달에 부응하여 촉진되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곡물 가격이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여 전국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보일 정도였다.491)고석규, 앞의 글, 205∼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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