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6. 농촌 사회와 농민 생활
  • 조선 초기 면리제의 시행
염정섭

15세기 초반 세종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의 지방 사회 지배 장치로서 정비된 모습의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군현제의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주부군현이 각기 읍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면과 같이 몇 개의 방향으로 면을 나누고 이러한 면 밑에 이동촌(里洞村)의 자연촌을 부속시킨 것이었다.497)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398쪽.

면리제 실시와 함께 사족 또는 양인 출신의 권농관 내지 감고, 이정이 면리 단위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권농관, 감고, 이정 등 면리제 운영 담당층의 등장은 고려시대에 실질적인 군현 통치자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향리가 할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촌 단위를 개별적으로 파악하여 국가 수취 체제를 설정하는 데 실무를 담당하였다.

면은 각 군현마다 읍치를 중심으로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 네 개의 면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이른바 방위면(方位面)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리는 자연촌 단위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그 내부에 다시 소규모 취락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리에 포함된 가호(家戶)의 규모는 하삼도 지방의 경우 10호 미만에서부터 100여 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개 20호에서 50호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략 세종대를 전후한 시기에 면리제 운영을 위한 인적 조직 및 직능 체계의 정비가 완료되었다. 면의 권농관은 권농 사무 전반을 담당하였고, 면의 감고는 진제(賑濟)와 관련된 업무를 분장하다가 전세 수납, 군역·요역의 징발, 공물 수납 등 수취 체제 운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정은 주로 호구 파악과 관련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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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의 민속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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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나 수령들은 면리제 운영 담당층을 촌락 내부의 유력층 특히 재지(在地) 품관층(品官層) 가운데서 임명하려고 하였다. 한편 군현 단위의 지방 세력이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자치 조직인 유향소(留鄕所)를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새롭게 향촌 지배 질서를 구축해 나가려고 하였다. 지방 군현의 수령들은 수취제와 관련하여 수령의 통제 아래에 포괄시킬 수 있는 면리제 운영 담당층으로 이들을 임명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1428년(세종 10) 유향소가 복설되면서 재지 품관층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자치 조직에 참여하여 나름대로의 지배 질서를 구축해 나가게 되자, 이들은 수령의 통제를 받고 때로는 수령·향리에 의해 수탈을 당하기도 하는 부담을 짊어진 면리제 운영 담당층에 자신들이 차정(差定)되기를 기피하였다. 그 결과 면리제 운영 담당층에는 주로 촌락 내의 일반 농민들이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498)박진우, 「조선 초기 면리제와 촌락 지배의 강화」, 『한국사론』 20,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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