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6. 농촌 사회와 농민 생활
  • 마을의 농민 조직과 규약
염정섭

조선 전기에 자연촌을 단위로 여러 가지 농민들의 자치적인 조직이 결성되어 공동체적인 생활의 구심점 노릇을 하였다. 앞서 살핀 향도와 계통을 같이하지만, 계(契)와 같은 조직 형태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향촌 사회의 계 형태의 조직은 마을 제사나 관혼상제 등의 공동 부조(共同扶助) 등도 수행하였다.499)이해준, 「조선시대 향도와 촌계류 촌락 조직」, 『역사 민속학』 창간호, 역사 민속 학회, 1991. 이들 농민의 자치적인 조직체를 일반적으로 촌계(村契)로 불렸다. 기층민을 중심으로 운영된 마을 단위 조직체인 촌계는 특히 조직과 운영 방법 등을 양반 사대부 중심의 동계(洞契)를 본받아 구성된 것이었지만, 밑바탕에는 지역 공동체로서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확대보기
농기
농기
팝업창 닫기

한편 16·17세기에 확립된 재지 사족의 향촌 사회 지배 질서는 그들이 향촌 사회에서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고 이민(吏民)을 장악할 수 있는 현실적인 토대로 동계를 마련하고 있었다. 향촌 사회에서 촌락민을 제어하기 위하여 동계를 조직하면서 기존의 촌락 조직을 흡수하는 경우도 있었고, 하층민의 조직을 파괴하여 편입시키는 형태도 취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에는 상하(上下) 합계(合契) 형태의 동계를 조직 하여 촌락 사회 내에서의 상하민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하민(下民)들의 반발이 나타나기도 하였다.500)이해준, 『조선 시기 촌락 사회사』, 민족 문화사, 1996.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동계는 대체로 몇 개의 자연 촌락 또는 이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었고, 범위는 면 단위를 넘지 않았다.501)김인걸, 『조선 후기 향촌 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1. 이러한 동계가 기능하고 있을 때 기층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문화적인 기반 위에서 자연 마을 단위로 동제(洞祭), 당제(堂祭) 등을 수행하면서 마을 단위의 공동 노역이나 상호 부조(相互扶助)를 수행하였다.

사족 중심의 동계와 농민층이 조직한 촌계의 관계를 살펴보면, 형식적인 측면에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가 성립하여 유지될 때에 농민층의 촌계는 사족 중심인 동계의 하위 조직으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촌계는 생활 공동체로서 촌락의 생업이나 일상의례, 공동 행사, 작업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안을 통해 결속된 조직이었다. 촌계는 촌락 구성원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고, 성문화(成文化)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촌락 내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정한 규율을 자율적으로 지켜 나가면서 호혜적이고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운영되었다.

촌계의 계원은 곡식, 돈, 현물 등의 재물을 내어 공동 재원을 만들고, 촌계의 임원들이 이를 관리하였다. 두레 동원, 동제 등의 마을 공동 행사에 들어가는 경비를 조달하고, 계원이 경조사를 당하였을 때 부조하는 것도 공동 재원에서 충당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추렴(出斂)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

촌계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을 존위(尊位), 계장(契長) 등이라고 불렀고, 그 아래에 수좌(首座), 유사(有司), 소임(所任) 등의 임원진이 있었다. 이러한 촌계의 운영 규정과 촌계 조직원이 지켜야할 규범을 정리한 것이 동약(洞約)에 비견되는 촌약(村約)이라고 할 수 있다. 촌약에는 계원의 자체적인 규율을 상세히 정해 놓기도 하였다. 동약에 향촌 사회의 신분적 차별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처벌 조항이 대거 수록되어 있던 사정과는 달리 촌약에는 마을 단위의 자율적인 상호 부조와 친목 도모, 경제적 이득 추구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