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1. 인구 증가
  • 여성의 조혼
김건태

조선 후기 농촌 사회의 변화는 인구 증가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던 모습은 남녀의 초혼 연령과 과부와 홀아비의 재혼율에서 확인된다. 처녀가 젊은 나이에 결혼하고, 과부가 자유롭게 재혼하는 시기에는 인구가 증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에 비해 처녀의 결혼이 늦어지고, 과부의 수절(守節)이 늘어나는 시기에는 인구가 증가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18∼19세기 조선에 살고 있던 처녀 총각은 결혼하기까지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19세기 경상도 단성(丹城)에 거주하고 있던 김인섭(金麟燮, 1827∼1903)이 쓴 『단계일기(端磎日記)』는503)김인섭(金麟燮), 『단계일기(端磎日記)』,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 2000. 19세기 후반 양반가의 결혼 풍속을 생생하게 전한다.

김인섭은 다섯 자식의 결혼과 관련된 내용을 『단계일기』에 비교적 소상히 적어 놓았는데, 1875년(고종 12)에 있었던 첫째 아들의 결혼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따라서 첫째 아들 결혼에 관련된 내용을 중심에 놓고 1880년(고종 17)의 둘째 아들의 첫 번째 결혼, 1881년의 첫째 딸 결혼, 1882년의 둘째 아들의 두 번째 결혼, 1884년의 둘째 딸 결혼, 1891년(고종 28)의 셋째 아들 결혼과 관련된 내용을 첨가하면 19세기 결혼 관행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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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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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총각의 부모가 직접 만나 자식들의 결혼에 관해 의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중신을 서는 사람이 양쪽 집안을 오가면서 상대방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동구 밖을 나서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가를 오가는 사람은 남자였다. 중신 서는 사람을 통해 서로 사돈(査頓)이 될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 혼서(婚書)를 주고받음으로써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결혼을 약속하고 나면 결혼 날짜를 잡았다. 결혼 날짜는 신랑 쪽에서 사성(四星)을 보내면 신부 쪽에서 그것을 참작하여 최종 결정하여 신랑 쪽에 통보하는데, 그 이유는 여성들의 월경(月經) 때문이다. 신부 집은 혼례 날을 사정에 따라 서둘러 잡기도 하고, 여유를 가지고 잡기도 하였다. 혼례 날은 사성을 주고받은 날로부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 뒤였다.

혼례 날짜를 정하고 나면 남자 집에서는 신랑감의 관례(冠禮)를 치르게 된다. 관례는 남자 쪽에서만 치르지만 신랑 집과 신부 집에서 모두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혼례 준비였다. 남자 쪽에서는 혼수품 준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신부 집에서는 혼수품뿐 아니라 잔치 준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신부 집에서는 혼례를 앞두고 집 안팎도 깨끗이 단장하였다.

신부 집에서는 집 안을 깨끗이 하고 나서 신랑 집에서 보내온 혼수를 받았는데, 그날은 바로 혼례 전날이었다. 신랑 집에서는 납폐사(納幣使)를 보낸 다음 신랑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 집으로 향하였다. 가까운 거리는 혼례 당일에, 먼 거리는 혼례 하루 전에 집을 나섰다. 결혼식은 오후 늦은 시간이나 밤에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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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함을 지고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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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섭의 며느리와 사위는 모두 다른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17세기 후반∼20세기 초에 단성(丹城)에 살던 사람도 대체로 동구 밖 사람과 결혼하였다.

기혼녀의 시댁과 친정이 같은 마을에 위치하는 비율은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기혼녀의 시댁과 친정이 다른 마을에 위치하는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기혼녀의 친정 주소가 모두 확인되는 20세기 초 상황을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이 되면 여성의 90% 정도가 다른 마을로 시집갔다고 할 수 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여성이 기차, 자동차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던 20세기 초 에도 다른 군현으로 시집갔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다. 20세기 초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에도 다른 군현으로 시집간 여성의 비율은 높았을 것이다. 호적에서 친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즉 표 ‘17세기 후반∼20세기 초 단성 지역 기혼 여성의 친정 위치’에서 불명으로 처리된 여성의504)기혼녀의 친정이 확인되지 않는 비율이 호적에서 매우 높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호적이 군 단위로 작성되기 때문에 단성현 밖에서 시집온 여성의 친정은 단성 호적에서 확인할 수 없다. 즉 호적에는 기혼녀의 친정 주소는 없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직역(職役)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둘째, 기혼녀의 친정 식구들이 호적에 등재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혼녀의 친정이 실제로는 단성에 있더라도 호적에서 그 가계를 확인할 수 없다. 상당수는 다른 군현에서 단성으로 시집 온 여성일 것이다.

<표> 17세기 후반∼20세기 초 단성 지역 기혼 여성의 친정 위치
단위 : 명
연도
지역
1678 1717 1759 1789 1820 1860 1909∼1923
같은 마을(同里) 147(13.0) 126(7.8) 161(8.0) 179(8.1) 4(0.2) 109(5.4) 56(8.4)
같은 면(同面) 73(6.5) 75(4.6) 111(5.5) 95(4.3) 20(1.0) 119(5.9) 123(18.4)
같은 군(同郡)   197(12.1) 154(7.6) 144(6.5) 123(6.0) 209(10.3) 130(19.5)
다른 군(他郡)             279(41.8)
불명(不明) 871(77.1) 1224(75.5) 1593(78.9) 1793(81.1) 1905(92.8) 1591(78.5) 79(11.8)
합계 1130(100) 1622(100) 2019(100) 2211(100) 2052(100) 2028(100) 667(100)
✽①18∼19세기 자료(경상도 단성현 호적 대장 전산 CD,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6)
  ②20세기 자료(경상도 산청군 신등면 제적부. 신등면 사무소 보관본)
✽(  ) 안의 수치는 백분율임
✽대상 시기를 1923년으로 정한 까닭은 1923년 7월 여성들의 조혼 금지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 법령으로 1924년부터 조혼 풍습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법령 공포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가 있어 대상 시기를 1923년까지로 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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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일기(端磎日記)』
『단계일기(端磎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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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섭은 자식들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하였지만 딸이나 며느리의 나이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상산김씨족보(商山金氏族譜)』505)『상산김씨족보(商山金氏族譜)』 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 에는 며느리의 출생 연도가 기재되어 있어 『단계일기』와 『상산김씨족보』를 종합하면 며느리의 결혼 연령을 확인할 수 있다. 초혼 연령을 보면 첫째 며느리는 17세, 둘째 아들의 첫 번째 부인은 21세, 그의 두 번째 부인은 20세, 막내며느리는 18세이다. 네 여자의 초혼 연령은 평균 19세가 되는데, 이는 단성 호적과 신등면(新等面) 민적부(民籍簿)에서 확인되는 18세기∼20세기 초 여성의 초혼 연령보다 약간 높다.

표 ‘18세기∼20세기 초 단성 지역 여성의 혼인 연령’에서 볼 수 있듯이 호적과 민적506)1910년부터 1948년 사이에 작성한 제적부에서, 1923년 연말까지 결혼한 여성을 정리하였다.에서 확인되는 단성 지역 여성의 초혼 연령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9세기 전반의 사례 수가 적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큰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표> 18∼20세기 초 단성 지역 여성의 혼인 연령
시기 18세기 전반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1909∼1923
인원 164 398 22 667
연령 18.0 17.3 19.0 17.4
✽① 18∼19세기 자료(경상도 단성현 호적 대장 전산 CD,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6)
  ② 20세기 자료(경상도 산청군 신등면 제적부. 신등면 사무소 보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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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명 초상
조현명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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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 지역 여성의 초혼 연령은 어느 정도 일반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즉 같은 시기 다른 지역 여성은 대체로 몇 살에 초혼을 하였을까? 『조선 왕조 실록』의 기사를 통해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507)『조선 왕조 실록』에 소개된 조선 후기 결혼 관행은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역사와 현실』 51, 한국 역사 연구회, 2004 재인용하였다. 1757년(영조 33) 영조는 혼인하지 못한 처녀 총각에게 쌀과 돈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대상은 남자 29세, 여자 22세 이상이었다.508)『영조실록』 권89, 영조 33년 2월 정묘. 1743년(영조 19) 조현명(趙顯命)은 가난하고 궁핍하여 때를 넘기고도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자고 영조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대상은 남자 29세, 여자는 24세 이상이었다.509)『영조실록』 권57, 영조 19년 1월 경진. 여자의 경우 22세, 24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면 혼기(婚期)를 놓친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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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세기 전반 단성 지역 여성의 초혼 연령
18∼20세기 전반 단성 지역 여성의 초혼 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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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혼인을 통해서도 당시 일반 여성의 초혼 연령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1786년(정조 10) 새로운 빈(嬪)을 간택하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별단(別單)을 받아들였다. 정조는 같은 해 10월 1일에 16세 이상 되는 여성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별단을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5세 이상 되는 처녀들의 단자를 받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510)『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 10월 신축. 그런데 정조는 3일 뒤에 다시 별단을 제출하는 대상의 연령을 14세 이하로 내리고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3일 동안 단자를 제출한 인원이 채 2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511)『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 10월 갑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왕실에서도 여자 나이 14세가 되면 혼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이 18세기 사람들은 여성의 혼인 적령기를 15∼20세 정도로 보았다. 그러한 사실은 단성 호적에서도 확인된다.

18∼19세기 전반에는 15∼20세 사이에 결혼한 여성이 63.7%를 차지하였다.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앞당겨졌다. 15, 16, 17세 에 결혼한 여성의 비율은 20세기 초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한 여성의 비율 또한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높았다. 20세기 초에는 15∼19세 사이에 결혼한 여성이 71.0%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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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현호적대장(丹城縣戶籍大帳)』
『단성현호적대장(丹城縣戶籍大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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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린 나이에 시집가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18∼19세기 호적에서 초혼 연령이 확인되는 여성 가운데 15세 이하가 24.7%를 차지하였다. 어린 아이를 시집보내는 관행은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민적에서 초혼 연령이 확인되는 여성의 24.6%가 15세 이하에 시집을 갔다. 모든 여성이 호적과 민적에 적힌 날짜에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식을 치르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남자 쪽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와 마치 딸처럼 키우다가 적령기에 이르면 아들과 결혼식을 올려 주고, 그때부터 부부로 지내도록 하였다. 결혼식은 여자아이가 일정 정도 자라면 거행되지만 서류상에는 여자아이가 남자 집으로 가는 시기에 혼인한 것으로 적는다. 즉, 여자 집에서는 딸을 다른 집에 보낼 때 혼인으로 인해 자신의 호적에서 제외된다고 기록하고, 남자 집에서는 여자를 데려올 때 혼인으로 인해 자신들의 민적에 입적한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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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며느리
민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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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자아이를 데려와 일정 정도 기른 다음 결혼시키는 제도를 우리나라에서는 민며느리제라고 불렀는데, 대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어린 딸을 남자 집으로 보냈다. 20세기 초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결혼시키는 관행에서 비롯된 폐단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남편의 성적 학대를 견디지 못한 나이 어린 부인이 남편을 죽이는 일까지 발생하였던 것이다.512)김경일, 「일제하 조혼 문제에 대한 연구」, 『한국학 논집』 41, 한양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7.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1923년 7월 조혼 금지령을 내려 15세 이하 어린이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18∼19세기 전반에는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어서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단성 지역에서도 30살이 넘어 초혼하는 사례를 간혹 찾을 수 있는데, 전체의 0.7%를 차지한다.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긴 다음에 결혼하는 사례는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18∼19세기에는 늙도록 결혼을 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왕조 실록』을 통해 당시의 사정을 살펴보면 1730년(영조 6) 박문수(朴文秀)는 서울과 지방에 20, 30세가 되도록 시집을 못간 처녀가 많다고 보고하였다.513)『영조실록』 권28, 영조 6년 12월 무오. 1773년(영조 49) 기록에 의하면 40세가 넘도록 결혼하지 못한 남녀도 있었다.514)『영조실록』 권120, 영조 49년 3월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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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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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의 사회적 신분은 위로 양반가의 자녀에서 아래로 노비까지 다양하였다. 혼기를 놓친 사연 또한 여러 가지였다. 1777년(정조 1)에는 잇따른 흉년으로 혼기를 놓치는 처녀 총각이 속출하였다.515)『정조실록』 권3, 정조 원년 2월 신축. 이러한 현상은 흉년으로 인해 혼수품을 장만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생각된다. 1733년(영조 9)에는 사치스런 풍조 때문에 남녀가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기록도 있다.516)『영조실록』 권36, 영조 9년 12월 기사. 당시에는 백금(白金)과 채단(綵段)이 혼수품으로 오가기도 하였다.517)『숙종실록』 권37, 숙종 28년 11월 정묘. 체면을 중시하던 당시 양반들은 사치스러운 혼수품을 준비하지 못해 딸의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1750년(영조 26) 이종성(李宗城)은 가난하게 사는 양반가의 처녀가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고,518)『영조실록』 권71, 영조 26년 6월 계사. 1743년(영조 19) 조현명은 사대부 집안에도 35, 36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자식이 있다고 하였다.519)『영조실록』 권57, 영조 19년 2월 병오.

노비가 결혼하지 못하는 사연은 더욱 절박하였다. 당시에는 노비가 상납해야 되는 신공량(身貢量)이 많았기 때문에 노비와 결혼하기를 꺼렸다. 1755년(영조 31) 정부는 신공 부담 때문에 사노비(私奴婢)가 시집 장가를 가지 못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노비의 신공을 줄여 주었다.520)『영조실록』 권83, 영조 31년 2월 신미. 공노비도 마찬가지로 과중한 신공 때문에 결혼하기가 쉽지 않았다. 1753년(영조 29) 박 문수는 영남의 시노비(寺奴婢)는 혹 100여 세가 되도록 신공을 바치기도 하기 때문에 남녀가 늙어 죽도록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521)『영조실록』 권79, 영조 29년 2월 임자. 1790년(정조 14)에는 함양 지방의 시노비도 과중한 신공에 시달린다는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들과 혼인하기를 꺼렸고, 결국 그들은 시집 장가를 가보지도 못한 채 독신으로 늙어 가기도 하였다.522)『정조실록』 권30, 정조 14년 4월 정사.

이 같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혼기를 놓치는 남녀가 속출하자 정부는 이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737년(영조 13),523)『영조실록』 권46, 영조 13년 10월 병오. 1765년(영조 41),524)『영조실록』 권106, 영조 41년 9월 병신. 1770년(영조 46),525)『영조실록』 권114, 영조 46년 1월 을미. 1773년(영조 49),526)『영조실록』 권121, 영조 49년 11월 신사. 1779년(정조 2)527)『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2월 기미.에 국왕은 혼인하지 못한 남녀에게 혼수품을 지급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조는 혼기를 놓친 남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정조는 혼기를 넘긴 남녀를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을 자주 내렸다. 그의 명에 따라 한성부(漢城府)는 1791년(정조 15) 2월에 혼기를 놓친 사람 13명을,528)『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2월 갑인. 3월에 미혼자 5명과 권혼자(勸婚者) 68명을,529)『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3월 갑신. 6월에 권혼자 281명을 보고하였다.530)『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6월 을사. 1798년(정조 22)에도 정조는 혼기를 넘기고도 혼인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서 도와주도록 하였는데, 이때 충청도가 14명으로 가장 적었다.531)『정조실록』 권48, 정조 22년 1월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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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영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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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단성 지역 부모들은 딸을 15∼20세에 사이에 결혼시키려고 애썼고, 결혼식을 치르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계절도 분명하였다. 김인섭가의 경우 2월, 3월, 4월, 5월, 12월에 혼인식이 있었다. 민적에서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단성 사람들은 결혼 시기를 선택할 때 먹을 것도 부족하고 일손도 바쁜 여름 농사철은 피하고, 농사일도 바쁘지 않고 먹을 것도 풍성한 가을 겨울을 선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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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1923년 단성 지역 여성의 혼월
1881∼1923년 단성 지역 여성의 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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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1881∼1923년 단성 지역 여성의 혼월’을 보면 농사철인 6, 7, 8, 9월 네 달 동안 치른 결혼식은 겨우 12.8%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7월이나 8월에 결혼하는 사례가 적은데, 결혼한 달이 확인되는 665명 가운데 7월은 20명, 8월은 18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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