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2. 전답 증가
  • 내륙 지역 개간
김건태

조선 후기에는 인구뿐만 아니라 전답(田畓)도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옥토가 쑥대밭으로 변한 곳[陳田]을 개간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정부는 진전(陳田)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진전을 개간하면 그것의 세금을 일정 기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540)17세기 정부의 개간 장려 정책에 대해서는 이경식, 「17세기 농지 개간과 지주제의 전개」, 『한국사 연구』 9, 한국사 연구회, 1973 참조. 정부의 개간 장려 정책은 피해 복구를 서두르는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결과 두 번의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농촌은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임진왜란 직후 전국의 토지 가운데 경작되는 전답은 30여만 결(結)541)『선조수정실록』 권35, 선조 34년 8월 병인.에 불과하였으나, 병자호란 직전에 실시된 1634년(인조 12) 양전(量田) 때는 임진왜란 이전의 3분의 1수준까지 회복되었다. 1634년 양전 때 조사된 전답 98만 5000여 결(結)542)결(結) 부(負) 속(束)은 전답 면적을 측정하는 우리 고유의 단위이다. 조선 후기 1결은 벼 800두 정도를 생산하는 면적이고, 10속이 1부가 되고, 100부가 1결이 된다. 가운데 54만 2000여 결은 실제 경작되고 있었다.543)『인조실록』 권33, 인조 14년 7월 임신. 진전 개간은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잠시 주춤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1650년(효종 1)경에 이르러 전답 면적이 임진왜란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544)『인조실록』 권47, 인조 24년 8월 기축 ; 『효종실록』 권13, 효종 5년 11월 임인.

경상도 봉화에 거주하던 권두기(權斗紀, 1659∼1722)가 1714년(숙종 40) 경상도 안동 풍산에 거주하던 유 생원(柳生員)에게 보낸 아래 편지는 진전 개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도심(道心)에 있는 당신 농장(農庄)의 진황미간지(陳荒未墾地)를 척매(斥賣)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진실로 그러한가. 나의 집은 심히 빈곤해서 일 년을 이어 나가는 일이 항상 걱정된다. 비옥한 전답은 가격이 높기 때문에 매득할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값이 싼 진황지를 매득해서 개간할 계획이다. 답장을 보내줄 때 당신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한 곳은 구서방가(具書房家)의 전지(田地) 옆 시냇가에 있고, 한 곳은 탄당(炭堂)에 있는데, 모두 갈대밭으로 변하였다.545)성균관 대학교 박물관, 『하회 간찰(河回簡札)』 151(미간행 자료).

정언(正言)을 지낸 권두기는 유 생원에게 진황지로 버려 둔 두 곳의 전지를 자신에게 방매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권두기는 그곳을 매입하여 개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720년(숙종 46) 경자양전의 결과물인 『용궁현경자개량전안(龍宮縣庚子改量田案)』(이하 용궁양안)은546)『용궁현경자개량전안』 규14953·규14955 ; 용궁현 경자양안 가운데 현재 일곱 개 면(신하·신상·남하·북하·북상·내상·읍내면)의 양안이 현존하고, 세 개 면의 것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양안의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기 때문에 당시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북상면과 신하면 양안은 완전한 형태이고, 남하면 양안은 앞부분 일부가, 내상면 양안은 5필지의 ‘기주(起主)’란이, 북하면 양안은 10필지의 전형 혹은 지목 부분이, 신상면 양안은 30필지의 ‘기주’란이, 읍내면 양안은 29필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결락되거나 훼손된 상태이다. 병자호란 이후에 전개된 진전 개간 현황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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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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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인조 12)에 시행된 갑술양전(甲戌量田) 당시 용궁현 7개 면에서 주인 없이 버려진 진전(無主陳田)으로 파악된 땅은 모두 131결 50부 1속이었다. 이 가운데 73결 97부는 1720년 양전 당시 경작지로 변하였다. 이렇듯 양안에 나타난 단순 수치만 보면 무주 진전 가운데 개간된 곳은 56%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경작할 수 있는 곳은 거의 개간되었다. 즉 1720년까지도 여전히 무주 진전으로 남아 있 던 전답의 상당 부분은 홍수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홍수에 실려 온 모래가 산더미 같이 쌓여 언덕처럼 변한 곳이었다.

<표> 1734∼1720년 사이 용궁현의 신분별 무주 진전(無主陳田)의 개간 현황
단위 : 명


신분
남하(南下) 내상(內上) 북상(北上) 북하(北下)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양반 146 4-88-9(15) 64 1-47-5(9) 135 5-64-3(19) 13 25-7(32)
중인 14 0-45-4(1) 45 1-48-3(9) 40 1-69-0(6)    
평민 257 9-28-3(29) 219 6-14-5(37) 114 3-65-1(12) 2 0-20(3)
천인 92 3-03-2(9) 92 2-71-8(16) 92 3-77-9(12) 3 13-5(17)
기타 5 0-20-6(1) 11 0-34-6(2) 5 0-21-0(1)    
무주(無主) 193 14-38-6(45) 80 4-44-6(27) 195 14-99-7(50) 8 37-9(48)
합계 707 32-25-0(100) 511 16-61-3(100) 581 29-97-0(100) 26 79-1(100)


신분
신상(申上) 신하(申下) 읍내(邑內) 합계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양반 10 0-34-7(6) 25 1-37-4(9) 81 4-12-4(13) 474 18-10-9(14)
중인     46 2-07-9(13) 64 2-73-4(9) 209 8-44-0(6)
평민 48 1-83-8(34) 196 5-72-8(37) 60 2-11-0(7) 896 28-77-5(22)
천인 7 0-14-3(3) 123 2-96-3(19) 111 3-84-0(12) 520 16-61-0(12)
기타     2 0-03-4 11 1-24-0(4) 34 2-03-6(2)
무주 9 3-04-6(57) 26 3-30-4(21) 207 16-97-3(55) 718 57-53-1(44)
합계 74 5-37-4(100) 418 15-48-2 534 31-02-1(100) 2851 131-50-1(100)
✽『용궁현경자개량전안』 규14953, 규14955
✽(  ) 안의 숫자는 합계 대비 백분율임.

진전 개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주민들은 이제껏 농민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한광지(閑曠地), 산간 지역, 해안이나 도서 지역까지도 개간의 손길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한광지 개간의 열기는 같은 군현이라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다.

<표> 1720년 용궁현 면의 신분별 전답 소유 현황
단위 : 결-부-속


신분
남하 내상 북상 북하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양반 2749 150-73-4(44) 1774 81-71-0(23) 2791 169-32-0(41) 3703 234-09-8(58)
중인 175 10-46-6(3) 1203 47-28-7(13) 847 55-63-2(13) 506 32-01-6(8)
평민 2312 113-85-1(34) 4466 170-07-8(47) 2120 122-82-4(29) 1553 93-64-5(23)
천인 769 34-09-0(10) 1080 42-93-3(12) 729 37-47-6(9) 439 25-08-7(6)
기타 152 12-90-5(4) 248 7-84-0(2) 190 12-81-9(3) 239 17-42-2(4)
무주 275 18-08-6(5) 122 9-61-9(3) 254 19-77-1(5) 34 2-14-6(1)
합계 6432 340-13-2(100) 8893 359-46-7(100) 6931 417-84-2(100) 6474 404-41-4(100)


신분
신상 신하 읍내 합계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필지 면적
양반 1489 72-70-2(20) 631 39-71-2(17) 2018 134-18-7(31) 15155 882-46-3(35)
중인 455 22-93-9(6) 670 31-50-4(13) 1595 93-74-8(22) 5451 293-59-2(11)
평민 4532 197-25-2(54) 2268 100-66-3(43) 1367 73-15-8(17) 18618 871-40-1(34)
천인 437 15-22-7(4) 1115 45-60-2(20) 1246 53-47-5(12) 5815 253-89-0(10)
기타 249 53-83-5(15) 240 11-24-6(5) 528 56-65-4(13) 1846 172-72-1(7)
무주 22 3-53-1(1) 81 5-51-3(2) 266 21-46-9(5) 1038 81-03-5(3)
합계 7184 365-48-6(100) 5005 234-24-0(100) 7020 432-69-1(100) 47939 2554-27-2(100)
✽『용궁현경자개량전안』 규14953, 규14955
✽①(  ) 안의 숫자는 합계 대비 백분율임.
  ②기타는 마위전(馬位田)과 같은 국유지, 서원전(書院田) 등의 공동 소유지, 사찰(寺刹) 소유지 등임.

『용궁양안』은 주민의 신분 구성이 한광지 개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표 ‘1720년 용궁현 면의 신분별 전답 소유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용궁현은 전답 소유자의 성격에 따라 양반이 많은 거주 지역과 평민이 많이 거주 지역으로 구분된다.

남하면, 북상면, 북하면, 읍내면에는 양반층의 전답이 가장 많다. 양반 층의 전답은 남하면에서 46.2%, 북상면에서 40.5%, 북하면에서 57.9%, 읍내면에서 31%를 차지하였다. 한편 내상면, 신상면, 신하면에는 평민층의 전답이 가장 많다. 평민층의 전답은 내상면에서 47.3%, 신상면에서 54%, 신하면에서 43%를 차지하였다. 이 같이 면에 따라 전답 소유자의 신분 구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현상은 동성 촌락(同姓村落)의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남하면, 북상면, 북하면, 읍내면에는 양반들의 동성 촌락이 발달하였고, 내상면, 신상면, 신하면에는 평민들의 동성 촌락이 많은 곳이었다.547)김건태, 「경자양전 시기 가경전과 진전 파악 실태」, 『역사와 현실』 36, 한국 역사 연구회,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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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지 개간은 양반 거주 지역보다 평민 거주 지역에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용궁양안』에 등재된 개간 전답은 면에 따라 0.9∼9.2%까지 다양하고, 신하면·신상면·내상면·남하면·읍내면·북상면·북하면 순으로 전체 전답에서 개간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미 보았듯이 신하면·신상면·내상면은 평민층 소유지의 비중이 높고, 남하면·읍내면·북상면·북하면은 양반층 소유지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주민의 신분 구성은 개간지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표 ‘1720년 용궁현 각 면 개간지의 지목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개간지 가운데 답이 차지하는 비율은 양반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남하면, 북상면, 북하면, 읍내면)보다 평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내상면, 신상면, 신하면)에서 더 높았다. 양반 거주 지역에는 17세기 전반에도 이미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 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에 양반이 농촌 개발 을 주도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16세기 양반은 노비를 동원하여 하천이나 계곡 물을 이용하여 쉽게 관개할 수 있는 곳을 개간한 다음 보(洑)와 같은 간단한 수리 시설을 이용한 논농사를 지었다.548)이태진, 「16세기의 천방(보) 관개의 발달」,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1981.

<표> 1720년 용궁현 각 면 개간지의 지목 구성
단위 : 결-부-속

전답
남하 내상 북상 북하
전체 전답(A) 340-13-2 359-46-7 417-84-2 404-41-4
개간지 답(畓) 0-44-6(7) 3-39-0(16) 0-36-1(7) 0-24-7(7)
전(田) 5-55-3(93) 17-25-8(84) 5-10-9(93) 3-36-0(93)
소계(B) 5-99-9(100) 20-64-8(100) 5-47-0(100) 3-60-7(100)
B/A✽100 1.8% 3.1% 1.3% 0.9%

전답
신상 신하 읍내 합계
전체 전답(A) 365-48-6 234-24-0 432-69-1 2554-27-2
개간지 답(畓) 2-44-2(10) 2-37-2(11) 0-38-3(5) 9-64-1(11)
전(田) 21-75-5(90) 19-06-8(89) 6-77-0(95) 78-87-3(89)
소계(B) 24-19-7(100) 21-44-0(100) 7-15-3(100) 88-51-4(100)
B/A✽100 6.6% 9.2% 1.7% 3.5%
✽『용궁현경자개량전안』 규14953, 규14955
✽(  ) 안의 숫자는 합계 대비 백분율임.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만한 곳이 있으면 토질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몇 해에 걸쳐 돌을 골라내야 하는 자갈밭도 사양하지 않았고,549)『승정원일기』 권648, 영조 3년 10월 24일. 면적의 넓고 좁음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이 개간한 논밭은 대체로 좁았다. 『용궁양안』에 등재된 전답 1필지는 평균 384평이었으나, 개간지 1필지는 평균 217평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한 뙈기의 땅이라도 늘려 보려고 자갈을 골라내고, 풀뿌리를 캐내는 당시 농민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들어 개간의 손길은 산골에도 미쳐 화전(火田)이 크게 늘어 났다.550)화전 개간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이경식, 「조선 후기의 화전 농업과 수세 문제」, 『한국 문화』 10, 서울 대학교 한국 문화 연구소, 1989 참조. 조선 후기가 되면 화전은 전국 어디서나 목격되었고, 특히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나 충청도 산골에 많았다. 조선 후기 들어 화전은 산림 황폐화의 원인으로 지적될 정도로 계속 확장되었다. 화전민은 오랫동안 산골에 거주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외지에서 산골로 흘러 들어온 유민(流民)도 있었다. 이렇듯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화전 개간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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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화전민의 집
일제 강점기 화전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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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전은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화전민이 깊숙한 산골 수목이 무성한 곳에 불을 놓아 초목(草木)의 재를 거름으로 활용하여 농사를 짓고, 이듬해에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같은 방법을 되풀이하는 형태이다. 화전을 처음 개간할 때는 토질이 양호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선택하여 가을에 나무와 풀을 베어 깔아 두었다가 봄에 불태웠다. 이렇게 하면 생각보다 곡물이 잘 자랐다. 장소를 매년 바꿈으로써 지력(地力)을 유지할 수 있고, 풀과 나무를 태운 재와 오랫동안 쌓인 나뭇잎이 썩어 훌륭한 비료 구실을 하고, 산봉우리들이 바람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화전에서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척박한 곳에 일군 화전에서는 소출이 형편없었다. 다른 하나는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농사짓는 형태인데, 조선 후기에는 이런 형태를 흔히 산전(山田)이라 불렀다. 산전은 농지로서는 이미 안정된 토지였다. 산전은 2·3년 묵힌 다음 1년 경작하거나, 1년 묵힌 다음 경작하는 농지였다. 산전으로 불리는 화전은 해마다 옮겨 다니는 화전의 발달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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