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2. 전답 증가
  • 연안과 도서 지역 개간
  • 연해 지역 개간
김건태
확대보기
간척지
간척지
팝업창 닫기

서해와 남해의 해안 지역에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해 개펄이 발달해 있을 뿐만 아니라 하천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넓은 삼각주와 갈대밭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개펄, 삼각주, 갈대밭은 주변에 둑을 쌓아 바닷물이나 강물의 유입을 막으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연안 지역 개간은 내륙 지역의 개간에 비하여 대체로 규모가 훨씬 컸다. 이 같이 연안 지역 개간은 한 꺼번에 넓은 전답을 장만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바닷물이나 강물의 유입을 막는 둑을 쌓는 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뿐 아니라 소금기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농사를 짓지 못한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연안 지역의 대규모 개간은 투자 비용을 회수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연안 지역 개간은 왕실, 국가 기관, 전·현직 관료 등과 같은 특권층이 연해안 무주 공한지(無主空閑地)를 대규모로 개간하였다. 특권층이 주도한 연해안 개간 사업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551)조선 후기 연안 지역 개간에 대해서는 이경식, 앞의 글, 1973 ; 송찬섭, 「17·18세기 신전 개간의 확대와 경영 형태」, 『한국사론』 12,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5 참조.

전라도 해남(海南) 윤씨가(尹氏家) 사례는 조선 후기 연안 지역 개간의 실상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해남 윤씨가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작자로 유명한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집안이다. 해남 윤씨가는 16∼18세기 걸쳐 관직자를 많이 배출한 특권층이었다.552)윤선도는 예조 참의, 그의 아버지 유기(唯幾, 1554∼1619)는 관찰사, 할아버지 홍중(弘中, 1518∼1572)은 이조 정랑을 지냈다. 그리고 윤선도의 생부 유심(唯深, 1551∼1612)은 예빈시 부정, 생가 조부 의중(毅中, 1524∼1590)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윤선도의 후손 가운데서도 관직자가 나왔다. 맏아들 인미(仁美, 1607∼1674)는 성균관 학유, 손자 이석(爾錫, 1626∼1694)은 전부, 고손자 덕희(德熙, 1685∼1766)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러한 배경을 등에 업고서 윤씨가는 연해안 개간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개간권 신청에서 획득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윤씨가는 개간하기에 적합한 연해안 지역의 무주 공한지를 물색한 다음 개간권, 즉 입안(立案)을 받기 위한 서류를 수령에게 제출한다. 수령은 윤씨가에서 개간하기를 희망하는 지역의 면임(面任) 혹은 약정(約正) 등에게 그곳이 실제로 무주 공한지임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면임, 약정 등은 윤씨가에서 개간하고자 하는 곳의 실제 상황을 조사하여 수령에게 보고한다. 수령은 면임, 약정 등의 보고서를 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입안을 발급해 준다. 윤씨가와 수령 사이에 오고간 자료에서 확인되는 연해안 개간 사례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553)해남 윤씨가의 개간과 관련된 내용은 안승준, 「16∼18세기 해남 윤씨 가문의 토지·노비 소유 실태와 경영」, 『청계 사학』 6, 청계 사학회, 1990 ; 정윤섭, 「16∼18세기 해남 윤씨가의 해언전 개발 과정과 배경」, 『지방사와 지방 문화』 11권 1호, 역사 문화 학회, 2008 참조.

①1576년(선조 9) 입안.554)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所志) 22, 1986. 해남 현산면(縣山面) 백야지(白也地) 해안가에 소재한 무주 공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이때 개간권을 획득한 곳은 동쪽으로 우동(牛洞) 큰길, 남쪽으로 당산(堂山), 서쪽으로 바닷가 최백손(崔白孫)의 제언(堤堰), 북쪽으로 초피사(椒皮寺) 산줄기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②1625년(인조 3) 입안.555)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의송(議送) 6, 1986. 해남 현산면 백야지 해안가에 소재한 무주 공 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이때 개간권을 획득한 곳은 포구 근처의 땅으로 물을 구하지 못해 논으로 만들지 못하고 방치하여 둔 곳이었다. 윤씨가에서는 포구 위쪽에 제언을 설치하고, 지금까지 버려 두었던 곳을 논으로 개간하려는 의도에서 입안을 받았다.

③1633년(인조 11) 입안.556)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 51, 1986. 영암(靈岩) 수평면(水平面) 주교위(舟橋衛)에 위치한 무주 공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개간권을 획득한 곳은 남쪽으로 좌일대촌(左日大村) 앞, 서쪽으로 간두(幹頭) 해안, 북쪽으로 장전촌(長田村) 해안의 주인 없는 땅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은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이었다.

④1647년(인조 25) 입안.557)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 48, 1986. 해남 화산면(花山面) 죽도(竹島) 앞쪽에 위치한 무주 공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그곳은 서쪽으로 구해창(舊海倉), 동쪽으로 신해창(新海倉) 사이에 위치한 개펄로 제방을 쌓으면 넓은 농토를 얻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확대보기
개간 관련 해남 윤씨가 소지(所志)
개간 관련 해남 윤씨가 소지(所志)
팝업창 닫기

⑤1650년(효종 1) 입안.558)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 63, 1986. 해남 황원면(黃原面) 무고진(舞鼓津) 주변에 펼쳐져 있는 무주공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개간권을 획득한 곳은 남쪽으로 월앙(月仰), 북쪽으로 마방(馬坊), 서쪽으로 바다, 동쪽으로 무너진 제방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었다. 윤씨가는 이곳에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⑥1671년(현종 12) 입안.559)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 51, 1986. 해남 화산면 관선불(觀仙佛) 바닷가 주변에 널려 있는 무주 공한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그곳은 남쪽으로 바다, 동쪽으로 윤선호(尹善好) 어머니의 산소, 서쪽으로 화산(花山) 대촌(大村)을 지나는 길, 북쪽으로 남산(南山)과 맞닿은 지역이었다.

⑦1689년(숙종 15) 입안.560)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첩정(牒呈) 1, 1986. 해남 화산면 죽도에 있는 무주 진황지를 논으로 개간하려고 입안을 받았다. 개간권을 획득한 곳은 동쪽으로 해창(海倉), 서쪽으로 제이도(際二島), 남쪽으로 바다, 북쪽으로 부소도(扶蘇島)에 맞닿았다.

⑧1711년(숙종 37) 입안.561)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첩정 2, 1986. 해남 현산면 백야지리(白也只里) 바닷가 주변에 널려 있는 무주진황지에 대한 입안을 받았다. 그곳은 동남쪽으로 바닷물이 드나들고, 남쪽으로 의도(蟻島)에 접하고, 동쪽으로 백 생원(白生員)의 제방에 닿고, 서쪽으로 모포(毛浦)라는 포구에 이른다.

윤씨가에서 개간권을 획득한 연해 지역은 앞서 소개한 사례보다 더 많았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윤씨가에서 입안을 받은 연해 지역은 해남, 영암 등 남해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그 대부분이 넓은 규모를 자랑하였다. 개간에 필요한 비용 또한 엄청났다. 그 결과 한꺼번에 개간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농토를 넓혀갔다. 특히 현산면 백야지리 주변에 흩어져 있는 개펄을 개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곳에는 1760년(영조 36)까지도 개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공한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562)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화회 문기(和會文記) 8, 1986.

윤씨가에서 개간권을 획득하고 나면 개간 작업 즉 제방 쌓기, 수로 신설 등과 같은 일은 대부분 노비들의 몫이었다. 윤씨가는 노비 노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개간 사업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1691년(숙종 17) 윤이석(尹爾錫)이 작성한 다음 자료는 당시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해남 현산면 백야지(白也只)의 골짜기와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은 만력 연간(萬曆年間)에 입안을 받았다. 갑술양안(甲戌量案)에 등재하고, 노비들을 시켜 전답을 만들었다.563)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토지 문기(土地文記) 437, 1986.

해남 윤씨가는 연해 지역 개간 사업에 적극적 나서던 시기에 풍부한 노비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1596년(선조 29) 윤유심(尹唯深) 남매는 노비 384명, 1615년(광해군 7) 윤선도 남매는 노비 214명, 1673년(현종 14) 윤인미(尹仁美) 남매는 노비 560명 정도, 1760년(영조 36) 윤덕희(尹德熙) 남매는 노비 578명을 부모로부터 상속받았다.

이 같이 개간 사업은 주로 노비 노동에 의존하였지만 가끔씩 일반 민인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특권층이 민인을 개간 사업에 동원시키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만큼 윤씨가는 민인을 지나치게 자주 동원하는 것을 스스로 자제하기도 하였다.564)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충헌공 가훈(忠憲公家訓), 1986. 윤씨가는 개간한 사람으로 하여금 개간한 곳을 병작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565)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3-해남 윤씨편-, 소지 22, 1986. 민인의 원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