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2. 전답 증가
  • 연안과 도서 지역 개간
  • 도서 지역 개간
김건태

조선 후기 들어 도서 지역으로의 인구 유입은 증가 일로(一路)에 있었다. 유이민(流移民)이 도서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까닭은, 그곳에는 개간이 가능한 무주 공한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도서 지역 개간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경상도 용궁현 경자양안과 경상도 남해현(南海縣) 경자양안에 등재된 개간 전답의 실상을 비교해 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보았듯이 1720년(숙종 46) 당시 용궁현 일곱 개 면의 전답에서 개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1720년 남해 고현면(古縣面), 서면(西面), 이동면(二東面) 전답에서 개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2%, 34%, 23%였다.566)조선 후기 경상도 남해현 개간 실상에 관한 내용은 오인택, 「조선 후기 신전 개간의 성격」, 『부대 사학』 18, 부산 대학교 사학회, 1994 참조. 개간 비율을 보면 섬 지역인 남해에서, 내륙 지역인 용궁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난다.

남해 서면의 경우 1720년 양안에 등재된 전답의 3분의 1 이상이 1634∼1720년 사이에 개간된 곳이다. 서면의 개간 열기가 고현면, 이동면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농업 환경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고현면과 이동면에는 평지가 발달한 데 비해 서면에는 경사 지대가 많 고 평지가 적어 논을 대규모로 만들기 어려웠다. 그 결과 개간지도 밭이 논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새로 개간된 논은 7결 82부 7속에 불과한 데 비해 밭은 21결 8부 2속이나 되었다. 영농 환경이 양호한 곳보다 열악한 곳에서 개간이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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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가 많은 지역보다 경사 지대가 많은 곳에서 개간이 활발히 진행된 이유는 서면의 인구 밀도가 고현면과 이동면에 비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호수567)고현면(古縣面), 서면(西面), 이동면(二東面)의 호수는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 기재된 수치임. 대비 토지 규모는, 고현면이 1호당 49부 4속, 서면이 1호당 23부 8속, 이동면이 1호당 50부 3속이다. 서면의 인구 밀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됨으로써 서면 주민은 심한 농경지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그 결과 부지런히 새로운 농경지를 일구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전체 토지 소유자 가운데 개간지를 소유한 사람의 비율을 살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그 비율은 서면이 78%로, 고현면 49%와 이동면 60%에 비해 월등히 높다.

한정된 토지에서 많은 사람이 개간에 참여한 결과 1인당 개간지 소유 규모는 매우 영세하였다. 표 ‘1720년 경상도 남해현 개간지 소유 현황’에 서 볼 수 있듯이 1인당 개간지 소유 규모는 7부 9속에 불과하였다. 1인당 개간지 보유 규모는 면별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고현면 5부 8속, 서면 8부 8속, 이동면 8부 8속이었다. 개간지 보유 규모는 신분별로 보아도 큰 차이가 없었다. 1인당 개간지 규모는 양반 6부 1속, 상민 8부 8속, 노비 6부 1속이었다. 남해현 역시 용궁현처럼 빈한한 농민들이 개간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표> 1720년 경상도 남해현 개간지 소유 현황


신분
고현면 서면 이동면 평균
소유자
비율
1인당
면적
소유자
비율
1인당
면적
소유자
비율
1인당
면적
소유자
비율
1인당
면적
양반 34.0 3부 9속 64.4 9부 1속 31.6 4부 6속 41.6 6부 1속
상민 53.1 6부 5속 80.3 8부 8속 56.9 9부 5속 60.0 8부 8속
노비 62.5 4부 8속 95.8 6부 3속 54.7 6부 7속 61.8 6부 1속
평균 49.1 5부 8속 77.9 8부 6속 59.6 8부 8속 59.3 7부 9속
✽오인택, 「조선 후기 신전 개간의 성격」, 『부대 사학』 18, 부산 대학교 사학회, 1994, <표 6>, <표 7>을 종합하여 작성.

도서 지역 개간은 18세기 이후에도 전개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846년(헌종 12) 장흥부에 소속된 몇 개 섬 지역을 대상으로 작성한 양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양안은 1720∼1846년 사이 도서 지역(내덕도(來德島)·평일도(平日島)·산일도(山日島)·덕우도(德牛島))과 연안 지역(선자도(扇子島)·진목리(眞木里)·득량도(得良島))에서 진행된 개간 실상을 전해 준다.568)조선 후기 경상도 남해현 개간 실상에 관한 내용은 정승진, 「『장흥부제도양안』의 분석」, 『정신 문화 연구』 30-2,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007 참조. 이들 지역은 비록 바다와 접하고 있었지만 논이 별로 없었다. 도서 지역 전답의 약 80%, 연안 지역 농토의 70%가 밭이었다.

농업 환경 측면에서 볼 때 도서 지역과 연안 지역은 서로 비슷하였으나, 개간 진행 방향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표 ‘1720∼1846년 전라도 장흥부 도서 지역과 연안 지역의 개간 실태’에서 볼 수 있듯이 도서 지역에서는 구릉이나 산간에 새로운 밭을 조성하는 개간 활동(入田)이 진행되었고, 연안 지역에서는 개펄을 농경지로 조성하는 개간 사업(海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도서 지역에서는 기존의 농경지가 집터로 바뀐 곳(家入)이 많았다. 18세기에도 도서 지역으로 향하는 이주민의 행렬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표> 1720∼1846년 전라도 장흥부 도서 지역과 연안 지역의 개간 실태
단위 : 결-부-속
지목
지역
개간된 밭
(入田)
밭이 논으로 된 곳
(反畓)
개펄 개간
(海澤)
집터로 된 곳
집터로 된 곳
도서 지역 1-34-0(55) 3-15-8(105) 3-15-8(105) 4-91-8(305)
연안 지역   6-13-5(376) 6-41-3(149) 1-69-4(60)
✽정승진, 「『장흥부제도양안(長興府諸島量案)』의 분석」, 『정신 문화 연구』 30-2,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007, <표 9>를 재작성.
✽(  ) 안의 숫자는 필지 수임.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연안과 도서 지역에서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사실은 20세기 우리나라와 일본의 농지 증가 추이를 살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된 191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농지는 450만 정보였고, 지조 개정(地租改正) 시기인 1870년대 중반 일본의 경지 면적은 447만 정보였다. 이 같이 일본이 개간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 조선의 농지 면적과 근대 초기 일본의 농토 면적이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 조선의 국토 면적(22만㎢)이 일본 국토 면적(29.2만㎢)-지조 개정이 실시되지 않은 홋카이도(北海道)와 오키나와(沖繩)를 제외한-의 약 4분의 3이었음을 감안하면 조선시대 개간 사업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토지 조사 사업 이후 우리나라와 지조 개정 이후 일본에서 진행된 농지 개간 현황에서도 드러난다. 토지 조사 사업 이후 우리나라의 농지는 46만 정보 증가하였고, 지조 개정 이후 일본의 농지는 68만 정보 증가(홋카이도와 오키나와 제외)하였다. 우리나라의 농지 개간은 이미 조선시대에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569)宮嶋博史, 「東アジア小農社會の形成」, 『アジアから考える』, 東京大學校出版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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