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3.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 추이
  • 대토지 소유자의 감소
김건태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인구도 증가하고 전답도 늘어났다.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도시 발달이 더딘 가운데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늘어난 인구를 농촌이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7∼18세기 사이에 토지 소유자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답 증가율은 인구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토지 소유 면적은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의 실상은 1720년에 작성된 『용궁양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용궁양안』을 비롯하여 1720년에 작성된 경상도 지역 양안은 1634년 토지 소유자와 1720년 토지 소유자를 나란히 기재하고 있는데, 용궁에서는 1634년부터 1720년 사이 약 90년 동안 전답 규모가 7% 늘어났다. 표 ‘1634·1720년 용궁현의 토지 소유 분화 양상’에서 볼 수 있듯이 토지 소유자 또한 증가하였다. 1720년에는 1634년에 비해 토지 소유자가 무려 52%나 증가하였다. 이 같이 토지 소유자의 증가율이 전답 규모의 증가율보다 높았기 때문에 1720년의 평균 소유 규모는 1634년에 비해 감소하였다. 1634년 당시 53부 7속이던 1인당 소유 규모는 1720년에는 37부 9속으로 감소하였다.

<표> 1634·1720년 용궁현의 토지 소유 분화 양상
연도

구간(區間)
1634 1720
인원(%) 결-부-속(%) 인원(%) 결-부-속(%)
10결 이상 2 83-19-4(4) 3 94-38-8(4)
5∼10결 18 113-26-4(5) 5 31-17-4(1)
1∼5결 634(15) 1089-78-0(47) 546(8) 908-85-4(37)
50부∼1결 708(16) 508-67-5(22) 916(14) 641-33-8(26)
25∼50부 773(18) 275-11-5(12) 1137(17) 405-84-1(16)
25부 미만 2168(50) 240-89-5(10) 3928(60) 392-54-2(16)
합계 4303(100) 2310-92-3(100) 6535(100) 2474-13-7(100)
✽『용궁현경자개량전안』 규14953, 규14955

전체적으로 보면 토지 소유자가 증가하지만 소유 규모별로 살펴보면 그 추이가 일률적이지 않다. 1결 이상을 소유한 상층 구간의 토지 소유자는 감소하는 데 비해 1결 미만을 소유한 하층 구간의 토지 소유자는 증가하고 있다. 소유 규모 추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0결 이상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는 1634년 당시 2명570)역(驛)과 같은 기관도 사람처럼 처리하였다.에서 1720년 현재 3명으로 증가하였다. 표면상으로는 10결 이상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10결 이상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는 1634년 당시 모두 역(驛)이다. 그리고 역에서 소유한 전답은 모두 마위전(馬位田)이다. 한편 1720년에는 두 지역의 역과 이설(李渫)이 10결 이상을 소유하였다. 1720년에 이설의 이름으로 양안에 기재된 전답은 11결 17부 9속이지만 당시에 그가 실제 소유하고 있던 전답은 10결이 되지 않았다. 이설은 조카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까지 자기 이름으로 양안에 등재하였던 것이다.571)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조선 후기 양반가의 농업 경영』, 역사 비평사, 2004 참조.

한편 1634년부터 1720년 사이에 5결 이상 10결 미만의 전답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는 줄어들었다. 1634년에는 18명이었으나 1720년에는 5명으로 줄어 토지 소유자가 3분의 1이하로 감소하였던 것이다. 1결 이상 5결 미만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 또한 감소하였다. 1634년 634명에서 1720년 546명으로 줄어들었으나 그 추세는 5결 이상 10결 미만을 소유한 토지 소유자의 감소 추이보다 훨씬 완만하다.

두 시기 사이에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줄어들었으나 1결 미만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증가하였다. 50부 이상 1결 미만의 토지 소유자는 708명에서 916명으로, 25부 이상 50부 미만의 토지 소유자는 773명에서 1,137명으로, 25부 미만의 토지 소유자는 2,168명에서 3,928명으로 증가하였다. 두 시기 사이에 영세농이 격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용궁현 경자양안은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 사이에 토지 소유 규모가 영세화되는 현상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경상도 여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경상도 상주목(尙州牧) 단동면(丹東面)과 경상도 대구부(大邱府) 조암면(租岩面)에서도 동일한 추세가 확인된다.572)이영훈,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 사학』 21, 경제 사학회, 1996.

한편 대토지 소유자가 감소하는 추세는 18∼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작성된 『전라도영광군서부면양안(全羅道靈光郡西部面量案)』은 당시의 실상을 전한다.573)『전라도 영광군 서부면 양안』 분석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정승진, 『한국 근세 지역 경제사』, 경인 문화사, 2003 참조.

이 양안은 1719년(숙종 45) 토지 소유자와 1869년(고종 6) 토지 소유자를 함께 기록하고 있는데, 서부면에서는 1719년부터 1869년 사이 150년 동안 전답 규모와 토지 소유자 수가 약간 줄어들었다. 표 ‘1719·1869년 영광군 서부면의 토지 소유 분화 양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전답 규모는 16.1%, 토지 소유자는 19.5% 감소하였다. 서부면에서 전답 규모가 줄어든 원인은 양안상의 무주진전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5정보(町步) 이상을 소유한 사람은 0.4%에서 0.1%로 줄어들었다. 영광군 서부면에서는 용궁현에서와 달리 하층도 줄어들었다. 0.25정보 이상부터 0.5정보 미만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24.2%에서 23.5%로 감소하였고, 0.25정보 미만을 소유한 사람은 48.4%에서 44.6%로 감소하였다. 이 같이 영광군 서부면에서는 1720년부터 1861년 사이에 상층과 하층이 감소하였다. 이와 달리 0.5정보 이상부터 5정보 미만을 소유한 사람은 증가하였다. 영광군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토지 소유 분화 현상, 즉 상층과 하층은 감소하고 중층은 증가하는 현상은 1634년부터 1720년 사이 용궁현에서는 관찰되지 않은 현상이다. 영광군에서 보이는 현상은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정착된 상속 제도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표> 1719·1869년 영광군 서부면의 토지 소유 분화 양상
연도

구간(區間)
1719 1868
인원(%) 정보(%) 인원(%) 정보(%)
5정보 이상 4(0.4) 26.6(4.9) 1(0.1) 5.3(1.2)
2∼5정보 32(2.8) 94.2(17.3) 28(3.0) 80.1(17.5)
1∼2정보 99(8.7) 134.3(24.7) 97(10.6) 132(28.9)
0.5∼1정보 172(15.1) 123.1(22.6) 166(18.2) 114.1(25.0)
0.25∼0.5정보 274(24.2) 96.4(17.7) 214(23.5) 75.3(16.5)
0.25정보 미만 555(48.4) 69.7(12.8) 408(44.6) 49.8(10.9)
합계 1136(100) 544.3(100) 914(100) 456.6(100)
✽정승진, 『한국 근세 지역 경제사』, 경인 문화사, 2003, <표 15>를 재작성.

조선 전기 양반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다. 이 같은 상속 관행은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전답 집적이 어려운 여건하에서 실시된 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은 개별 지주가(地主家)의 전답 규모를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전답 규모의 영세화 현상은 양반들로 하여금 자녀 균분 상속을 멈추는 대신 남녀 차별 상속(男女差別相續)을 실시하도록 하였다.574)조선 후기 상속제 변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17∼18세기 전답 소유 규모의 영세화와 양반층의 대응」, 『한국 사학보』 9, 고려 사학회,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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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차등 상속은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가계 운영(家系運營)을 합리화시키는 종법(宗法) 질서와 성리학적 예제(禮制)가 정착됨으로써 더욱 가속화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에 작성된 일부 양반가의 분재기(分財記)는 남녀 차등 상속을 실시하는 근거로 결혼한 여성이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의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1687년(숙종 13)에 작성된 박순 처 이씨 허여 문기(朴洵妻李氏許與文記),575)이수건 편저,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박순 처 이씨 허여 문기(朴洵妻李氏許與文記)」,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81. 1688년(숙종 14)에 작성된 이해 처 정씨 허여 문기(李楷妻鄭氏許與文記)576)이수건 편저,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이해 처 정씨 허여 문기(李楷妻鄭氏許與文記)」,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81. 등이 당시의 실상을 전한다.

이러한 논리는 16세기 상황을 살펴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녀 균분 상속이 이루어지던 16세기에도 여성이 결혼하면 친정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 지주들이 남녀 차등 상속을 실시한 이유를 여성이 친정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현상 이외의 사실에서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재산 규모가 더욱 영세해지는 것을 우려한 양반 지주들은 종법 질서에 의탁하여 남자만 부모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를 근거로 남녀 차등 상속 관행을 정착시켰던 것이다.

봉화에 세거하던 권목(權霂) 남매가 1682년(숙종 8) 작성한 분재기의 서문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말씀하시기를 “적은 양의 전민(田民)을 자녀 여덟 명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면 자식이 모두 가난해질 뿐만 아니라 남자의 경우 돌아가면서 받드는 조상의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니…… 약간의 전민을 세 명의 아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며 여서(女壻)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는다.”라고 하셨다.577)이수건 편저,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권목 남매 화회 문기(權霂男妹和會文記)」,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81.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전답 725.8두락과 노비 142명을 자식에게 물려준 권상충(權尙忠)은578)권목 남매는 1682년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기 위하여 분재기(分財記)를 처음 작성하였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687년 분재기를 다시 작성하고 있다. 전답 725.8두락과 노비 142구는 1687년에 작성된 분재기에 실린 양이다. 생전에 자신의 재산 규모가 적다는 이유를 들어 전민을 남자에게만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남녀 균분 상속으로 전답이 점차 축소되는 사태에 직면한 예천의 안동 권씨가에서도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다음 1690년(숙종 16) 분재기의 서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형제는 같은 집에 살지 않고, 남매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전래되어 오는 약간의 전민(田民)을 분집(分執)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산업(産業)이 극히 영성(零星)하고, 더욱이 여식(女息)은 집안 제사를 윤설(輪設)치 않게끔 이미 가식(家式)을 만든 까닭에 이번 분록(分錄)에는 불균(不均)을 면할 수 없다.579)이수건 편저,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권등 남매 화회 문기(權憕男妹和會文記),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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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 전답 3결 64부 1속과 비(婢) 2명을 물려받은 예천 안동 권씨가의 남매는 부모의 재산이 적다는 이유로 남자가 더 많은 전답과 노비를 상속받았다. 그 대신 여성은 부모의 제사를 받들지 않는다는 데에 서로가 합의하고 있다. 이 같이 양반들은 17세기 후반부터 남녀 차등 상속 관행을 실시하였다. 나아가 18세기 전반부터 조상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한 전답, 즉 제위전(祭位田)의 비중을 더욱더 늘리는 장자 우대 상속 관행을 서서히 정착시켰다. 양반들은 더 많은 전답을 제위전으로 할당하고, 종손(宗孫)과 문중(門中) 구성원이 함께 그것을 관리해 갔다. 향촌 사회 곳곳에서 종가형(宗家型) 지주(地主)가 출현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가형 지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종가형 지주를 늘려 가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양반이 종손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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