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4. 벼 재배 방법의 변화
  • 이앙법으로 벼를 재배하는 농가
김건태

이앙법으로 벼를 재배하는 모습은 이정회(李庭檜, 1542∼1612), 황익청(黃益淸, 1589∼1659), 이담명(李聃明, 1641∼1701)의 농업 경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600)이정회, 황익청, 이담명의 농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앞의 글, 1995 참조. 이정회는 경상도 예안 주촌(周村)에 세거하면서 자신의 집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노비를 동원하여 직영지를 경작하던 과정을 『송간일기(松澗日記)』를 통해 자세히 남겼다. 경상도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시) 이현(梨峴)에 거주하던 황익청은 『대룡산일기(大龍山日記)』에 자신의 농사 일정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이담명은 1682∼1686년 경상도 영천(榮川) 금강리(金岡里)에 거주하면서 병작지를 경작하던 경험을 『일록(日錄)』에 자세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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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간일기』에 나타난 1578∼1584년과 1603∼1612년 이정회가의 노동 과정
『송간일기』에 나타난 1578∼1584년과 1603∼1612년 이정회가의 노동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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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파종은 곡우(穀雨, 4월 20일) 무렵, 입하(立夏, 5월 5일) 전후에 이루어졌다. 곡우 무렵에 파종된 벼는 조도이며 이것은 모두 직파되었다. 입하를 전후하여 파종한 곳은 모판이었는데, 파종 후 약 한 달가량 모판에서 모를 기른 다음 망종(芒種, 6월 6일) 전후에 이앙을 실시하였다. 가뭄이 든 해에는 하지(夏至, 6월 21일)를 지나서 이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초 작업은 이앙을 마친 지 한 달 뒤인 하지 무렵부터 시작하여 입추(立秋, 8월 7일) 무렵까지 계속하였는데, 대개 두 번 시행하였다. 제초 작업이 끝나고 약 한 달 반 정도 지나서 벼 베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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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산일기』에 나타난 1635∼1638년 황익청가의 노동 과정
『대룡산일기』에 나타난 1635∼1638년 황익청가의 노동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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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이앙을 하면 두 차례 정도 제초를 해주었다. 이 같은 제초 횟수는 대체로 서너 차례 제초해 주는 직파할 때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앙을 함으로써 제초 노동력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앙법은 제초 횟수뿐 아니라 한 번 제초하는 데 들어가는 일손도 절감시켜 주었다. 그 결과 이앙법을 도입한 농가는 직파법을 고수하던 농가에 비해 제초 노동력을 6∼7할 정도 줄일 수 있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또 다른 장점을 가졌다. 이앙법을 하면 논에다 보리를 심는 것이 가능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앙으로 재배한 벼를 추수한 논에 보리를 파종하고, 이듬해 초여름 보리 수확을 마친 후, 다시 그곳에 이앙을 하는, 즉 도맥이모작(稻麥二毛作)을 실시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칠곡 석전 감사댁 논을 병작하던 농민들은 1711년(숙종 37)부터 도맥이모작을 실시하였다. 칠곡 농민들은 173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넓은 면 적에 도맥이모작을 행하였다. 18세기 중엽 경상도 중서부 지역의 농민들은 이모작을 즐겨하였다. 권상일이 남긴 『청대일기』는 1740∼1750년대 경상도 상주 지방의 도맥이모작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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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와 김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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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와 김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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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영조 23) 5월 23일. 보평(洑坪) 맥답(麥畓)에 비로소 이앙하였다.

1750년 5월 5일. 가뭄이 심하여 봉천답(奉天畓)에 이앙한 곳은 모두 말랐다. 양맥(兩麥)의 경우 답(畓)에 파종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손상을 입었다.

1752년 5월 23일. 들으니, 곳곳의 맥답(麥畓) 이앙을 모두 끝냈다고 한다.

1754년 5월 8일. 맥답은 모두 실농(失農)인데, 곳곳이 모두 그러하다. 우리 집 보평답(洑坪畓)은 더욱 심하여 전혀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번경(反耕)하여 이앙하였다. 대개 여러 달 동안 비가 내리면 자연히 이 같은 경우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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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록』에 나타난 1683∼1684년 이담명가의 노동 과정
『일록』에 나타난 1683∼1684년 이담명가의 노동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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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상주 지방 농부들은 도맥이모작을 많이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앙을 하게 되면 제초 노동력도 절감되고, 도맥이모작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제초 노동력을 줄이기 위해 농민들은 이앙을 하였을까? 즉, 편히 쉬기 위해 실농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앙을 선택하였을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주지하듯이 우리 조상들은 무척 부지런하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맥이모작을 하기 위해 실농할 위험을 무릅쓰고 이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그러한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첫째, 도맥이모작은 이앙법이 일반화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보편적으로 실시되었다. 즉 16∼17세기만 하더라도 이앙법과 도맥이모작의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둘째, 조선 후기 도맥이모작이 실시된 논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였다. 18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도맥이모작은 삼남(三南) 지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501)염정섭, 『조선시대 농법 발달 연구』, 태학사, 2002. 도맥이모작은 19세기 들어 더욱 확산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일부 논에서만 실시되었다. 1912년 조사에 따르면, 도맥이모작을 실시하는 논은 경상북도 26.4%, 경상남도 9.7%, 전라남도 11.4%, 전라북도 4.3%, 충청북도 7.8%, 충청남도 3.1%, 경기도 0.9%에 지나지 않았다.502)『朝鮮總督府統計年譜』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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