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5. 이앙법이 밭농사에 미친 영향
  • 이앙법 보급과 밭농사의 관계
김건태

실농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앙법을 채택한 이유는 밭농사 과정까지 포함하여 살펴보아야 밝힐 수 있다.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던 농가의 밭농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희문은 밭작물로는 조(粟)·서(黍)·보리(牟)·콩(太·豆)·녹두(菉豆)·율무(薏苡)·들깨(水荏)·마(麻) 등을 재배하였고, 조씨 부인은 밭작물로 보리 등을 재배하였다. 주요 작물인 보리·조·콩을 중심으로 농사 과정을 살펴보자.

보리 파종은 먼저 거름을 내고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밭갈이를 한 다음503)오희문, 『쇄미록』 을미 9월 25일. 가을보리의 경우에는 한로(寒露, 10월 8일)경에, 봄보리의 경우에는 청명(淸明, 4월 4일)경에 이루어졌다. 제초 작업은 곡우(穀雨, 4월 20일)경에 한 번 실시하였고, 수확은 하지(夏至, 6월 21)경부터 시작하였다.

보리를 베어 낸 밭에는 콩(太) 혹은 녹두를 파종하였는데, 이러한 재배 방법을 근경(根耕)이라고 부른다. 근경에서 밭갈이와 파종 작업은 다섯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각각 소 한 마리씩을 끌고, 한 사람이 쟁기를 잡았으며, 다른 한 사람이 종자를 뿌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종자를 덮었다. 이때는 직파한 논의 제초 시기였다. 이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 파종이 지연되기도 하였다.504)오희문, 『쇄미록』 병신 6월 7일. 그뿐 아니라 근경 때문에 논의 제초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505)오희문, 『쇄미록』 을미 5월 20일. 콩 파종은 근경이 행해진 밭에서는 하지(夏至, 6월 21일)경에, 근경이 행해지지 않은 밭에서는 입하(立夏, 5월 5일)경에 이루어졌다. 콩 수확은 대체로 추분(秋分, 9월 23일) 무렵부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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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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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粟)는 근경이 행해지지 않은 콩과 비슷한 시기에 파종하였다. 오희문은 입하 무렵에 파종한 조를 하지 무렵에 제초해 주고, 추분을 전후한 시기에 수확하였다. 조밭의 제초 시기는 직파한 벼의 제초 시기와 겹쳤으므로, 조밭의 제초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오희문은 조밭의 제초 시기가 늦어져 잡초가 무성해짐을 걱정하면서도,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에 조밭의 제초를 뒤로 미루고 논의 제초를 먼저 실시하고 있다.506)오희문, 『쇄미록』 을미 6월 10일.

다음으로 이앙법으로 벼를 재배하던 이정회, 황익청, 이담명의 밭농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의 밭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은 보리·조·콩·면화(綿花, 목화)였다. 가을보리의 파종 시기는 한로(寒露, 10월 8일)에서 상강(霜降, 10월 23일) 사이였다. 봄보리의 파종 시기는 경칩(驚蟄, 3월 5일)에서 청명(淸明, 4월 4일) 사이였다. 보리 수확은 대개 하지부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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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면화 채취
일제 강점기의 면화 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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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와 마찬가지로 콩 또한 종류에 따라 파종 시기를 달리하였다. 보리를 베어 낸 뒤에는 소서(小暑, 7월 7일) 무렵에 콩(太)을 근경으로 윤작하였다. 근경이 아닌 경우에는 콩을 곡우(穀雨, 4월 20일)와 소만(小滿, 5월 21일) 사이에 파종하였다. 콩과 비슷한 시기에 파종하는 작물은 조(粟)였다. 조를 심은 밭에서는 제초가 두 번 행해졌다.507)이정회(李庭檜), 『송간일기(松澗日記)』 무인 7월 8일.

이렇듯 직파로 벼를 재배하던 오희문과 조씨 부인은 목화(木花)를 재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앙으로 벼를 재배하던 이정회, 황익청, 이담명508)이담명이 남긴 1682∼1686년 『일록』에는 면화 재배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다른 자료에서 이담명이 소유한 밭에서 목화가 재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앞의 책 참조. 등은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이앙법 보급과 목화 재배는 서로 관련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말에 도입된 목화는 16세기 들어 삼남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목화가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다.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을 수 있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면포는 옷감뿐만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되어 상업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같이 일상생활에 매우 유익한 목화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재배하는 데 일손이 많이 들었다. 17세기 목화 재배 농가는 입하(立夏, 5월 5일)경에 파종한 다음 망종(芒種, 6월 5일)에서 입추(立秋, 8월 7일) 사이에 약 10일 간격으로 일곱 차례의 제초를 실시하였다.509)이진(李珎), 『시은당선생문집(市隱堂先生文集)』 권2, 일기(日記), 정유년. 17세기 전반기 농사 관행을 보여 주고 있는 고상안의 『농가월령』에서도 목화밭 제초를 일곱 번 해주라고 권유하고 있다.510)고상안, 『농가월령』 7월중 처서. 직파로 벼를 재배하는 농가에서 많은 제초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면화를 재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직파로 벼를 재배하던 오희문은 면화를 재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손 부족으로 적지 않은 애로를 겪었다. 이앙법은 그러한 어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 준다. 논에서 절약된 노동력을 목화 밭 제초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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