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6. 노비제 해체
김건태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농사일은 노(奴)에게 물어보고 베 짜는 일은 비(婢)에게 물어 보라.”고 하였다. 일상생활에서 농사와 직포(織布)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런 글귀의 실제 내용은 모든 일상사가 노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노비는 양반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정부 또한 노비 문제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비도 부세 납부자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노비로부터 조용조(租庸調)는 수취하였고, 다만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주었을 뿐이다. 노비들은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상전(上典)에게 신역(身役)이나 신공(身貢)을 납부할 의무를 졌다.

조선 후기 노비는 생계 유지 방법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인 경상도 안동 금계리(金溪里) 의성 김씨가(義城金氏家)에서 18세기 중엽에 작성한 고문서는 그와 관련된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김씨가의 노비는 1760년대 80여 명 정도였는데, 40명 정도는 금계리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금계리 밖에 거주하였다. 후자의 경우 가깝게는 김씨가에서 10㎞ 정도, 멀게는 100㎞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살았다.514)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5, 준호구(準戶口), 1989.

노비들이 생계를 꾸려 나가던 방법은 그들의 거주지에 따라 크게 차이 가 났다. 먼저 금계리에 거주하고 있던 노비들이 생계를 꾸려간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15명(전체의 19%) 정도는 1760년대에 양식을 전적으로 상전가에 의존하고 있었다.515)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7, 양용기(粮用記), 1989. 의성 김씨가에서 가을부터 봄까지 노비에게 지급한 식량은 하루 두 끼분이었다. 이 시기에는 상전 가족도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 노비에게 지급한 식량은 나이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나이에 따라 8홉(合), 6홉, 5홉, 4홉, 3홉씩 차등을 두어 주었다. 상전 가족의 식사량도 나이에 따라 한 끼에 7홉, 5홉, 3홉씩 차등을 두었다. 이 같이 한 끼 식량은,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상전 가족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상전 가족에 비해 크게 못 미쳤다. 상전 가족은 가을 추수 때부터 보리 수확 이전까지 쌀밥을 먹었으나 노비는 추수 후 잠깐 동안에는 쌀밥, 겨울 농한기 때에는 잡곡이 더 많이 섞인 밥, 봄 농번기 때에는 쌀이 더 많이 섞인 밥을 먹었다. 김씨가에서 노비에게 지급한 잡곡은 거의 대부분 조(粟)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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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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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수확 이후, 즉 여름철에는 가을 추수 이후부터 보리 수확 이전까지에는 없던 점심이 추가되었다. 즉 여름철에는 하루 세 끼 식사를 하였다. 식사 횟수가 늘어난 여름철에도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상전 가족과 노비의 한 끼 식사 분량은 동일하였다. 1764년(영조 40) 여름의 예를 보면 상전 가족은 7홉, 5홉, 3홉으로 3등분하였고, 노비들은 7홉, 5홉, 4홉, 3홉으로 4등 분하였다. 하지만 식량이 모자라는 경우에는 식사량이 줄어들기도 하였다. 여름철 양식의 질은 상전 가족과 노비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상전 가족은 쌀과 보리가 섞인 밥을 먹었지만 노비들은 보리밥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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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락사(田家樂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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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에 거주하던 나머지 25명은 상전가의 전답을 병작하여 수확의 절반을 지대(地代)로 상납하고 남은 곡식으로 양식을 해결하였다.516)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7, 추수기(秋收記), 1989. 이들은 흉년이 든 해에는 식량난을 겪었다. 그럴 때에는 상전가에서 식량을 가끔씩 보조해 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1764년(영조 40) 2월에는 병작지를 경작하던 노비 7명에게 벼 3두씩을 나누어 주었다.517)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7, 양용기, 1989.

한편 금계리 밖, 즉 다른 마을(他里)에 거주하던 노비는 식량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타리에 거주하던 노비가 경작하던 토지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의성 김씨가의 토지이고, 다른 하나는 의성 김씨가와 무관한 토지이다. 1760년대 다른 마을에 거주하면서 의성 김씨가의 토지를 병작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던 노비는 3명에 불과하였 다.518)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고문서 집성』 7, 추수기, 1989. 다시 말해 타리에 거주하던 노비 40여 명 가운데 36명 정도는 상전의 토지와 무관하게 생활하였다. 이들 36명은 자신의 소유지 혹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조달하였던 것이다.

이 같이 의성 김씨가 노비들은 식량을 해결하는 방법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상전에 대한 이들 세 부류의 의무 또한 서로 달랐다. 첫째 부류는 상전가의 행랑채 혹은 인근의 독립 가옥에 거주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전가의 일을 하였다. 둘째 부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하다가 가끔씩 상전가의 잡사(執事)에 동원되었다. 셋째 부류는 상전가에 신공을 상납하였다.

노비를 곁에 두기 위해서는 수시로 양식을 제공하고, 관의 침탈로부터도 보호해 주어야 하였다. 노비는 상전이 자신을 잘 거두어 줄 때라야 비로소 충성을 다하였다. 그런데 상전의 보호막이 약해지게 되면 노비들도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천대와 멸시를 받아가면서 상전 주위를 서성일 이유 가 없어지면 도망 노비가 속출하였다. 이앙법이 보급되고, 밭농사의 집약화·다각화가 심화됨으로써 주인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 도망은 상전과 다른 마을에 거주하는 노비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도망 노비들은 오래지 않아 그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노비제 해체의 물결이 동리 밖에서 동리 안으로 밀려왔던 것이다.

국가 정책 또한 노비제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국가는 노비를 호적에 등재시킨 다음 기회 있을 때마다 부세를 수취하였다. 호적에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는 대부분 상전과 다른 마을에 거주하였다. 상전과 다른 마을에 거주하던 노비들은 호적에 독립호를 구성하여 국가에 세금을 납부한 다음 신분을 양인으로 바꾸어 나갔다. 17∼19세기 단성 호적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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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1860년 단성 호적에서 노비호가 차지하는 비율
1678∼1860년 단성 호적에서 노비호가 차지하는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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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1678∼1860년 단성 호적에서 노비호가 차지하는 비율’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 호(戶)에서 노비호가 차지하는 비율은 1678년(숙종 4)에는 50%를 상회하고, 18세기 전반에는 30%를 상회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 10%대에 머물고, 19세기에는 5% 이하로 감소한다.

이같이 18세기 이후 상전과 다른 마을에 거주하던 노비들이 줄어들게 되자 노비제는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7∼19세기 단성 호적은 노비제 해체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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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1860년 단성 호적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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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1678∼1860년 단성 호적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에서 볼 수 있듯이 1678년에는 62%, 18세기 전반에는 40∼50% 사이, 18세기 중엽에는 30∼40% 사이, 18세기 후반에는 20∼30% 사이, 1820년대는 20% 미만, 1860년대는 20∼30% 사이였다. 18세기 이후 단성 호적에 등재된 노비가 빠르게 줄어들었는데, 여기서 조선 후기 노비제 해체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상전과 다른 마을에 거주하던 노비들의 도망은 상전에 기대어 생활하던 노비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상전 집 가까이에서 생활하던 노비들도 대부분 도망가고, 부엌어멈, 마당쇠로 불리는 소수의 노비만 남게 되었다. 이 같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노비제가 해체됨으로써 양천제(良賤制)에 기초한 신분제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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