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1. 출생에서 성장까지
  • 평생도에 담긴 꿈
박현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태어나서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후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역정(歷程)은 예나 오늘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 구체적인 형식이야 다르다하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생의 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세대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는 방식은 어떨까?

오늘날 우리는 생의 중요한 순간에 사진을 찍는다. 돌사진, 결혼사진, 가족사진, 회갑사진 등등 ……. 생을 마감한 후 우리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는다. 사진은 우리 시대에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에서 사진이 발명된 것은 19세기 전반이지만 우리나라에 사진관이 등장하여 사진을 찍게 된 것은 개항 이후의 일이다. 사진이 일반화되어 보통 사람도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는 사진은 근대의 산물이다.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인 조선시대 사람들은 사진으로 남길 법한 순간 을 문자로 기록하여 기념하였다. 때로는 사진을 찍듯 당시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도 생의 중요 순간은 가능한 한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기록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생의 과정을 여러 폭의 그림으로 그린 평생도(平生圖)가 유행하였다. 각 폭에는 시간순으로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순간을 담았다. 평생도는 사대부의 영예로운 일생을 축약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생도는 대부분 그림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과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 1703∼1771)처럼 그림 속 주인공이 전하는 경우도 있다.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한림 겸 수찬 행차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한림 겸 수찬 행차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문과 급제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문과 급제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혼례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혼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첫돌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첫돌
팝업창 닫기

홍이상은 선조와 광해군 때 대사헌, 대사간 등의 고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자손도 대대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그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이 되었다. 영조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이 7대손이고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자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8대손이다.

홍이상의 평생도는 모두 여덟 폭으로 되어 있다. 돌잔치와 혼례식에 이 어 문과 급제 후의 유가(遊街) 행렬, 한림 겸 수찬(翰林兼修撰) 행차, 개성 유수(開城留守) 부임, 병조 판서·좌의정 행차 등 관직 생활이 그려져 있으며, 마지막은 부부의 해로를 보여 주는 회혼례(回婚禮) 장면이다. 출생, 혼인, 영예로운 관직 생활, 장수로 그의 삶이 축약되어 있다.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회혼례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회혼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좌의정 행차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좌의정 행차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병조 판서 행차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병조 판서 행차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개성 유수 부임
모당 홍이상 평생도 부분-개성 유수 부임
팝업창 닫기

관리의 행차 그림은 관직의 고하에 맞추어 행렬 모습도 각기 다르다. 한림 겸 수찬은 말을 타고 있지만 개성 유수에 부임할 때는 지방관이 타는 쌍가마를 타고 있다. 병조 판서 때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초헌(軺軒)을 탔고, 좌의정 때는 1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평교자(平交子)를 타고 있다. 관직에 따라 행렬의 구성이나 인원도 차이가 있다. 같은 행차 그림을 통해서도 관직이 점점 높아지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1)정연식, 「조선조의 탈것에 대한 규제」, 『역사와 현실』 27, 한국 역사 연구회, 1998.

홍계희는 탕평파(蕩平派)의 일원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균역법(均役法) 시행을 주도한 인물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판서, 병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지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평생도는 문과 급제 후의 유가 행렬, 초입사(初入仕), 평안 감사 부임, 고관 행차, 치사(致仕), 회혼례 여섯 폭이 전할 뿐이다. 원래 여기에 빠진 돌잔치와 혼인식을 합쳐 여덟 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이상의 평생도와 달리 치사한 후 후원(後園)에서 이 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또 평안 감사로 부임하는 장면은 배를 타고 대동문(大同門)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임지(任地)의 특성을 살렸다.

그런데 두 사람의 평생도와 실제 이력을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홍이상은 병조 판서나 좌의정을 지낸 적이 없고, 홍계희도 평안 감사로 부임한 적이 없다. 또 홍이상은 67세, 홍계희는 69세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림에서처럼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를 치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생도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것일까?

평생도는 현재 26종이 확인되는데, 두 폭에서 12폭까지 구성이 다양하다. 하지만 홍이상과 홍계희의 평생도처럼 여덟 폭으로 구성된 것이 가장 많다. 10∼12폭의 평생도는 여덟 폭의 평생도에 서당 공부, 소과 응시(小科應試), 치사, 회갑연, 회방례(回榜禮) 등의 장면을 추가한 것이고, 두 폭에서 여섯 폭의 평생도는 여덟 폭 구성에서 몇 장면만 그린 것이거나 일부만이 전해지는 것이다. 즉, 평생도는 여덟 폭을 기본으로 하여 출생, 성장, 혼인, 관직 생활, 장수 등 구성이 동일하다.

평생도는 특정한 주인공의 일생을 그린 기록화가 아니라 사대부의 영예로운 일생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조선시대 전체를 따져도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었다. 즉, 평생도는 사대부 양반들이 꿈꾸는 복된 삶의 모습이었다.2)최성희, 「19세기 평생도 연구」, 『미술 사학』 16, 한국 미술사 교육 학회, 2002 ; 주영하, 「‘홍이상 평생도’를 통해서 본 관리의 평생 의례」, 『문헌과 해석』 24·25, 문헌과 해석사, 2003.

평생도에서 묘사해 놓은 생애의 모습은 건강하게 자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영예로운 관직을 생활을 거친 후 노년까지 부부가 해로하며 자식의 효도를 받는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대부가 꿈꾸는 다복한 삶이자 부모로서 자녀들이 누리기를 희망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