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1. 출생에서 성장까지
  • 아이에서 어른으로
박현순

이숙길은 어려서 장난하며 놀기를 좋아하여 할아버지의 걱정을 샀다. 다섯 살 때는 자귀를 가지고 놀다가 손톱을 다쳤고, 뛰어다니며 놀다 넘어져 말뚝에 이마를 찧어 할아버지가 기겁을 하기도 하였다. 또 여섯 살 때는 밥을 잘 먹지 않아 할아버지의 속을 태웠다. 밥상 앞에서 딴전을 피우거나 도망을 다니고 밥을 한 입 가득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 밥그릇을 들고 달아나는 아이를 쫓아다니는 광경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500년 전에 태어난 이숙길도 오늘날의 아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숙길은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잠들 때마다 할아버지를 찾았고, 외출한 할아버지가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슬픈 눈망울을 하고 애타게 기다리곤 하였다. 문간에 들어서는 할아버지를 보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강아지마냥 깡충거렸다. 이문건은 손자를 보며 이것이 바로 사람사는 이치구나 생각하며 행복감에 젖었다. 손자에게 죽을 먹이고 똥을 누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숙길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엄한 할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닐곱 살이 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부모나 조부모는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였다. 이문건은 여섯 살된 이숙길을 데리고 자면서부터 공부를 시키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간혹 이웃에서 스승을 구하거나 서당을 찾는 경우도 있었으나 10대 전반까지는 대개 집에서 조부나 부친, 숙부 등에게 글을 배웠다. 따라서 가정이 학교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이숙길은 여섯 살 때에 『천자문』을 배우고 성년이 될 때까지 『소학(小學)』, 『대학(大學)』, 『상서(尙書)』,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을 읽었다.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당시 여느 아이처럼 10대 중반까지 사서삼경 (四書三經)과 사서(史書)를 읽고 운문(韻文)까지 익혔을 것이며, 10대 후반부터는 동년배와 함께 산사(山寺) 등을 찾아 과거 준비를 시작하였을 것이다.9)박현순, 「16세기 예안현 사족층의 수학(修學)과 관직 진출」, 『교육 사학 연구』 17-1, 교육 사학회, 2007 ; 전경목, 「조선 후기 지방 유생들의 수학(修學)과 과거 응시-권상일의 『청대일기(淸臺日記)』를 중심으로-」, 『사학 연구』 88, 한국 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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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건은 그다지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로 성장하여 출세 가도를 달렸던 젊은 날의 이문건은 거칠 것이 없었으며, 아들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온은 심신이 허약하여 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보고 화를 이길 수 없고, 아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은 그만큼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글을 가르칠 때 이숙길은 아직 혀가 짧아 발음도 온전치 않았으며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곤 하였다. 이문건은 손자를 조근 조근 타일러야지 성급하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가르칠 때마다 번번이 윽박을 지르고 돌아서서 후회하기를 반복하였다.

일곱 살이 된 이숙길은 지각이 발달하며 자신의 의지를 갖게 되었고, 점차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였다. 미운 일곱 살이 된 것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잡스럽고 쌍스러운 말을 내뱉었고, 말리는 할머니에게 되바라지게 대들며 반항하였다. 이제 아이의 인성과 생활 태도를 바로잡고 사회화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이 되었다.

이문건은 매를 들었다. 그러나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며 목이 메는 손자를 보여 자신의 눈에도 눈 물이 고여 차마 더 때리지를 못하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손자의 말을 위안으로 삼으며 애써 걱정을 없애려 하였다.

종아리를 때리고 나서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내가 악독해서가 아니요 아이의 나쁜 습관을 금지시키기 위해서라.

만약 악습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고질이 되어 끝내 금지시키기 어려우리

……

아이를 가여워하는 고식적인 마음이 사사건건 그렇게 아이의 마음을 반복되게 하였도다.

……

10여 대를 때리고 나서 차마 더 때리지 못하고 나중에 봐가며 더 때린다고 타일렀네

그만 때리자 한참을 엎드려 우는데 늙은이 마음 또한 울고 싶을 뿐이라

언제 아이의 지혜가 밝아져 때가 되면 스스로 허물을 알게 될꼬

1560. 5.610)이문건, 『양아록』, 달아탄(撻兒嘆) : 이상주 역주, 앞의 책.

그러나 이후에도 할아버지와 손자의 실랑이는 반복되었다. 어린 이숙길은 사내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나가서 뛰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할아버지가 불러다 앉혀 놓고 공부를 시켜도 눈치를 보아 가며 금방 줄행랑을 치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종을 보내 억지로 끌고 오면 꾸중을 들을 것이 무서워 문 밖에서 들어오지 않고 버텼다. 할아버지는 종아리를 때리거나 손찌검을 하며 손자의 버릇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쉽사리 할아버지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열 살 무렵까지 이숙길의 모습은 요즈음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가운데 현대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모습도 보인다. 이숙 길이 아주 어려서부터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숙길이 술을 좋아한다는 기록은 여섯 살 때부터 나온다. 열 한 살부터는 옆집 노파나 하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종종 취하기도 하였으며, 아침나절부터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술에 취한 이숙길은 구토를 하고 밥을 먹지 못하였으며, 숙취(宿醉) 때문에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이문건은 손자가 술 때문에 허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숙취를 풀 수 있도록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1563년(명종 18) 10월 15일 이문건은 집주인 배인손(裵仁孫)의 초대를 받아 손자를 데리고 갔다. 이숙길은 그 자리에서 술 석 잔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 꼬인 혀로 횡설수설(橫說竪說)하였다. 화가 난 이문건은 온가족이 모인 가운데 자신은 물론 할머니와 어머니, 누이들이 돌아가며 종아리 60대를 때렸다.

술에 취한 것을 탄식하며

먼저 자매를 시켜, 각각 10대를 때리게 하네

다음엔 어머니, 그 다음엔 할머니에게 또 10대씩 종아리를 때리게 하네

나만 유독 20대를 때려 울화를 풀어 버리려 하였네

손자 하나라서 항상 가련히 여겨 매번 과실을 용납해 주었더니

손자의 마음이 점점 오만해져 어기려는 기색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라

……

손자를 고식적으로 교육해서는 안 되니 고집부리는 걸 내버려 두면 고질이 되리라.

이로부터 일상생활 중에 일을 저지르면 엄격하게 다루려 한다.

1563. 10. 1711)이문건, 『양아록』, 경취탄(警醉嘆)(이상주 역주, 앞의 책).

이문건이 화가 난 것은 손자가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일찍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였으며, 어른들이 술을 권하 기도 하였다. 화가 난 것은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술 때문에 손자가 건강을 해치는 것도 염려하였다.

이숙길의 음주 행태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다소 심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문건의 말을 보더라도 열다섯이 되어 혈기가 안정된다면 술을 마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열다섯 살은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열세 살이 된 이숙길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며 점차 어른들의 생활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제 이숙길은 집안의 작은 어른으로서 집안일을 돕기도 하였다. 열 살 때 이미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종들의 추수(秋收)를 감독하러 갔으며, 또 집안에서는 노비들을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곧, 어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시(詩)를 짓기도 하였고, 경서(經書) 해석을 두고 할아버지와 논쟁을 벌일 만큼 식견이 자라 있었다. 물론 이숙길의 일 처리는 다소간 미숙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이숙길은 어린 어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사회적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열여섯 살이 되면 장정(壯丁)으로서 군역(軍役)을 담당하였다. 애처롭게 보이는 열여섯 살 소년 병사는 조선시대에는 초보 어른의 모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청소년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아이와 소년의 구분은 있었다. 이문건은 일곱 살이면 지혜가 성장할 나이이고, 열 살이면 혈기가 거의 안정되고 정신과 식견이 성숙된다고 하였다. 일곱 살과 열 살은 어른이 되기 전의 성장 단계에서 중요한 경계가 되었다. 열 살이 지난 아이는 점차 부형(父兄)의 생활양식을 따라 배우며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12)백혜리, 앞의 글, 2001, 2004.

이문건 못지않게 이황도 손자를 기르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황은 마흔 살에 첫손자 아몽(阿蒙)을 얻었다. 유배 중인 이문건과 달리 이황은 벼 슬살이를 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손자를 직접 키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손자의 양육 문제를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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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도의 지주와 농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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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길이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채에서 생활한 것과 달리 아몽은 늦게까지 안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아몽이 열서너 살이 되자 이황은 사내아이는 열 살이면 사랑으로 나온다는 『예기(禮記)』의 내용을 상기시키며 손자가 사랑으로 거처를 옮겨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게 하였다.13)이황(李滉), 『도산전서(陶山全書)』 3, 기자준별지(寄子寯別紙),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0, 578쪽.

아울러 아몽에게 안도(安道)라는 이름과 봉원(逢原)이라는 자(字)를 지어 주었다. 아몽이 열네 살 때의 일이다.14)이황, 『퇴계집(退溪集)』 속집 권2, 손아아몽명명왈안도 시이절운(孫兒阿蒙命名曰安道示二絶云). 이를 계기로 아몽은 어른으로서 의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제 아이에게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익힐 수 있도록 더욱 엄격한 교육이 요구되었다.

몽아가 점점 장성하게 되었으니 매번 아명(兒名)으로 부를 수는 없다. 지금 좋은 이름을 지으면 자(字)는 따라서 지을 것이다. 다만 지금부터는 점차 성인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의(義)로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손을 아름답게 키우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지극한 소망이다. 다만 애정에 끌려 가르치는 것을 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모를 심지 않고 익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느냐. 전에 보니 네가 아이에게 애정이 넘쳐 엄하지 못하기에 이야기하는 것이다.15)이황, 『도산전서』 3, 우기자준(又寄子寯),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0, 211쪽.

이숙길도 열네 살이 되자 아명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숙길의 새 이름은 수봉(守封), 자는 경무(景茂)였다. 이숙길은 ‘이수봉’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리고 열여섯이 된 1566년(명종 21) 정월 15일 관례(冠禮)를 치르고 상투를 틀었다. 이후 이문건은 일기에도 손자를 ‘수봉’이라고 기록하였다. 할아버지도 이제 손자를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은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번 이름을 지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꾸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아이가 태어나면 곧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아이 때의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성인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식 이름을 갖는 것은 성인이 되는 첫 단계였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는 어떠하였을까? 이숙길에게는 이숙희(李淑禧), 이숙복(李淑福), 이숙녀(李淑女)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이숙길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자마자 붙여 준 아명이다. 이중 큰누나 이숙희는 이문건의 첫손자로 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숙희의 성장 과정은 이숙길과 달랐다. 이숙희는 사서삼경을 위주로 하는 체계적인 유학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대신 여섯 살 때부터 여성의 글이라고 할 언문(諺文)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어려서부터 베짜기와 같은 가사를 담당하며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익혀 갔다. 열 살 때는 할아버지를 졸라 『천자문』을 익혔고 그 후에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소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숙희의 수학(修學)은 체계적이거나 지속적이지도 않았으며, 내용도 효자행실도(孝子行實圖), 열녀행실도(烈女行實圖) 같이 주로 여성에게 부여된 덕목을 내면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교육 과정과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16)김선경, 「공부와 경계 확장의 욕망 : 16세기 여성 이숙희 이야기」, 『역사 연구』 17, 역사학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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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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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는 열다섯 살이 되던 1561년(명종 16) 정월 여성의 성인식인 계례(笄禮)를 치르고 같은 해 11월 3일 서울에 사는 정섭(鄭涉)과 혼인하였다. 이문건은 큰 손녀가 결혼한 후에도 한동안은 일기에 ‘숙희’라는 아명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점차 ‘정부(鄭婦)’나 ‘정처(鄭妻)’라고 하여 ‘정씨의 아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열일곱이 되던 1563년 2월 딸 희정(禧貞)을 낳은 후에는 ‘희정 어미(禧貞母氏)’라고 기록하였다. 이숙희는 이숙길과 달리 계속 아명으로 불리다가 결혼 후에는 ‘누구의 아내’로 불렸으며, 아이를 낳은 후에는 ‘누구 엄마’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통과 의례로써 새로운 이름과 자를 얻는 것과 달리 여자아이의 통과 의례는 그리 분명치 않았다. 이숙희는 계례를 치렀 지만 조선시대에 행한 관례나 계례는 혼인의 전 단계였을 뿐이었으며, 그나마 계례를 치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에는 어린 시절의 이름이 잊혀지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사회적인 역할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여성이 성인으로 인식되는 계기는 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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