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2. 성인이 되어
  • 혼례와 혼서
박현순

조선시대에 아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는 16세였다. 16세 이상의 남성은 장정으로서 국가에서 부과하는 역을 담당하였다. 노비를 매매할 때도 15세 이하와 16세 이상은 가격 차이가 있었다. 16세 이상이 되면 성인 노동력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반면 15세 이하는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年未滿兒)’로 일컬어졌으며, 강도나 살인이 아니면 수금되지 않았고, 강도죄를 저지르더라도 자자형(刺字刑)이 면제되었다. 살인 사건의 증인도 될 수 없었다. 오늘날 만 14세 이하를 형사상 미성년자로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제상(禮制上)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의식은 관례와 계례였다. 남자아이는 상투를 틀고 여자아이는 비녀를 꽂는 의식이다. 관례와 계례는 어른이 되는 통과 의례로서 아이에게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우는 의식이었다.17)이문주, 「성인식으로서의 관례의 구조와 의미 분석」, 『유교 사상 연구』 17, 한국 유교 학회, 2003 ; 전명기, 「전통 사회 통과 의례와 청소년 존재 개념」, 『청소년학 연구』 11-2, 한국 청소년 학회, 2004.

관례는 상투를 틀고 옷을 갈아입는 가례(加禮), 술을 마시는 초례(醮禮), 자를 지어 주고 관을 씌우는 자관자례(字冠者禮)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중 가례는 초가(初加), 재가(再加), 삼가(三加) 세 번의 의식을 치르는데, 매번 다른 종류의 관, 옷, 신발을 바꾸어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부유한 집에서는 화려한 옷을 준비하여 성대하게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옷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경제적인 부담이 되었다.18)권시(權諰), 『탄옹집(炭翁集)』 권10, 유아관례의(惟兒冠禮儀) ; 안정복(安鼎福), 『순암집(順菴集)』 권14, 관례작의의절(冠禮酌宜儀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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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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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예서(禮書)에서는 관례와 계례를 사례(四禮)의 하나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계례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관례도 나이와 상관없이 혼례 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치른 이숙길이나 계례를 치른 이숙희는 그리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인으로 공인받는 의식은 혼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법적으로 혼인이 가능한 나이는 남자 열다섯 살, 여자 열네 살이었다. 만일 부모 중 한 사람이 지병이 있거나 쉰 살이 넘었다면 열두 살만 되면 결혼을 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조혼(早婚)이다.

실제 혼인을 한 나이는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6∼19세기 양반가의 혼서(婚書)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여성의 초혼 연령은 16세기 만 17.75세에서 19세기 만 17.15세로 낮아지며, 남성의 초혼 연령도 17세기 17.31세에서 19세기 15.68세로 낮아졌다.19)박희진, 「양반의 혼인 연령 : 1535∼1945-혼서(婚書)를 중심으로-」, 『경제 사학』 40, 경제 사학회, 2006. 여성보다는 남성의 혼인 연령이 빠르게 낮아지는 것은 그만큼 빨리 후손을 보려는 부모의 의지가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되는 꼬마 신랑은 그리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17∼19세가 혼인 적령기였다고 하겠다. 이것은 중국과 유사 하지만 서유럽의 23∼28세, 일본의 20.5세에 비하면 상당한 조혼이다.20)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단성 호적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51, 한국 역사 연구회, 2004.

조선시대의 혼례는 전래의 관습과 유교적 예제를 결합하여 의혼(議婚), 납채(納采), 연길(涓吉), 납폐(納幣), 초례(醮禮), 우귀(于歸)의 과정으로 시행되었다. 각 과정에서 양가는 혼서를 주고받았다.21)김신연, 「궁중과 사대부가의 혼례 풍속 비교 연구」, 『문명연지』 6-3, 한국 문명 학회, 2005.

의혼은 양쪽의 부모가 자녀들을 혼인시키기로 약속을 하는 과정이다. 배우자는 대개 지인(知人)의 자녀이거나 지인이 소개한 사람이었다. 어느 경우건 부모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며 중간에 중매를 두어 혼담을 진행시켰다.

양쪽 부모가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하면 비로소 본격적인 혼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맨 먼저 신랑 집에서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단자(單子)를 보낸다. 사주 단자는 사성(四星), 강서(剛書), 강의(剛儀), 경첩(庚帖)이라고도 한다. 종이를 접어 가운데에 신랑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적는다. 오른쪽에는 혼주의 이름을 적고, 왼쪽 칸에는 보내는 날짜를 적었다. 봉투나 뒷면에 사성(四星)이라고 썼다.

신랑 집에서는 사주를 보내면서 허혼(許婚)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택일(擇日)을 청하는 편지도 함께 보냈다. 이를 납채서(納采書)라고 한다. 납채서는 일정한 투식이 있는데, 내용은 혼인을 하게 된 것이 집안의 경사라고 인사하고 신랑의 사주 단자를 보내며 택일을 청한다는 것이다.

[사성 단자]

사성(四星)

월성 후인 김기헌 (수결)

신사 8월 21일 자시

기유 11월 초 2일22)양진석 엮음, 『최승희 서울대 명예 교수 소장 조선시대 고문서』 V, 도서 출판 다운샘, 2007, 732쪽.

[납채서]

삼가 생각컨대 초겨울에 부모님 모시고 존체(尊體)의 동지(動止)가 편안 하십니까? 우러러 지극히 궁금하옵니다. 저는 그저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혼사는 나이를 묻는 데에 이르렀으니 저희 집안의 경사이고 행운입니다. 사주 단자를 말씀에 따라 적어 올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살펴 주십시오.

임신년 10월 7일

삭녕 최효숙23)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묵향(墨香)-진양 하씨 창주 후손가-』, 2004, 183쪽.

신랑의 사주 단자를 받은 신부 집에서는 두 사람의 사주와 집안 사정 등을 고려하여 혼인 날짜를 잡았다. 이것을 연길(涓吉)이라고 한다. 신랑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연길 단자에는 혼례식을 가리키는 전안(奠雁) 날짜만 적기도 하고 함을 들이는 납폐 날짜를 함께 적기도 하였다.

신부 집에서는 연길을 보내면서 납폐서(納幣書)에 대한 답서도 보냈다. 이것을 납기서(納期書)라고 하였다. 사주 단자를 받은 것을 집안의 경사라고 사례하고 신랑의 옷을 짓기 위한 치수를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옷 치수를 적어 보내면 신부 집에서 신랑의 옷을 마련하였다.

[연길 단자]

연길(涓吉)

납폐(納幣) 신묘 12월 11일 신축 길(吉)

전안(奠雁) 동일

신묘 11월 초7일 이(李) 수결(手決)24)양진석 엮음, 앞의 책, 746쪽.

[납기서]

편지를 받고 초여름에 존체의 동지가 만중하시다니 매우 위로됩니다. 혼사는 이미 사주 단자를 받고 이제 택일하여 올리게 되었으니 어찌 첫째 가는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옷제도를 회시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살펴 주십시요.

기유년 4월 7일

연일 정철기 올림25)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묵향-진양 하씨 창주 후손가-』, 2004, 184쪽.

[납기서에 대한 답서]

안동 권병명 재배

엎드려 은혜로 쓴 글을 받고 삼가 살피건대 봄을 맞이하여 그대의 생활이 모두 좋으시다니 우러러 간절히 위로됩니다. 재종 집안의 혼사는 이미 길일을 택하였으니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장제(章製)는 말씀하신대로 지어 올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대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절하며 답장을 올립니다.

임자 2월 7일26)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유향(遺香)-진양 하씨 판윤·송정 후손가-』, 2007, 338쪽.

택일을 한 후 혼례식까지는 대개 한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혼인 날짜를 잡고 나면 양쪽 집안은 혼례 준비로 분주해진다. 신부 집에서는 혼수와 함께 잔치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준비하였고, 신랑 집에서는 여러 가지 혼수와 더불어 신부 집에 보낼 함을 마련하였다. 이 기간에 신랑은 관례를 치렀다.

혼례식 전에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함을 보낸다. 이것을 납폐라고 하였다. 함 속에는 허혼과 택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납폐서를 함께 넣었다. 일반적으로 혼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납폐서를 가리킨다. 납폐는 원칙적으로는 혼례 날짜를 받은 후에 바로 행해야 하지만 혼례 전날이나 혼례날 당일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번거로움을 피해 의식을 간소화한 결과이다.

[납폐서]

삼가 생각건대 한 겨울에 존체의 기후는 모두 복되신지요. 저의 아들 한필이 나이는 이미 장성하였으나 아직 배필이 없었는데 존자(尊慈)의 허락을 입어 따님을 아내로 주시니, 이에 선인(先人)의 예에 따라 삼가 사람을 보내 폐백(幣帛)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만 줄이오며 삼가 글을 올립니다.

정유년 11월 초5일

경주 김흥경 올림27)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여경-경주 김씨 학주 후손가-』, 2006,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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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례하는 모양
초례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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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진아비를 먼저 보낸 후 신랑은 혼인 시간에 맞추어 신부 집으로 향하였다. 거리에 따라 전날 미리 출발하기도 하고 혼례 당일 출발하기도 하였다. 신부 집에 도착한 후 잠시 쉬었다가 혼례를 행하는데, 혼례 시간은 대개 저녁 무렵이었다.

혼례는 초례라고 하는데, 홀기(笏記)에 따라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서천지례(誓天地禮), 서배우례(誓配偶禮), 근배례(杯禮)의 차례로 행하였다.

전안례는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와서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이며, 교배례는 신랑과 신부가 초례청(醮禮廳)에서 상면하여 교대로 절을 하며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하는 의식이다. 교배례가 끝나면 천지신명에게 혼인 서약을 하는 서천지례를 행하고, 배우자에게 결혼 생활에 성실할 것을 맹세하는 서배우례를 행한다.

혼례식의 마지막 절차는 근배례로, 합근례(合禮)라고도 한다. 조롱박 하나를 나누어 두 개로 만든 표주박으로 신랑 신부가 술을 마시는 의식이다. 표주박은 둘이지만 합치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따로 태어났지만 일심동체(一心同體)의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인 후 사흘째가 되면 신랑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부인을 맞이하였다는 것을 고하고 평소처럼 자신의 집에서 머문다. 그 후 한 달 여가 지나면 신랑은 다시 처가로 가서 한 달가량 머물다 돌아왔고, 다시 두세 달이 지난 후에 세 번째로 처가를 찾아갔다. 이른바 초행(初行), 재행(再行), 삼행(三行)이라고 하는 의식 절차이다.

그 후 길일을 받아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우귀(于歸), 우가(于家)라고 한다. 혼례식 후 신부가 시가에 들어갈 때까지의 기간은 매우 다양하였다. 10여 년이 지나 자식들이 한참 자란 후에 시가로 들어가거나 분가(分家)를 하기도 하고, ‘삼일우귀(三日于歸)’라고 하여 혼례 후 이틀을 묵고 신랑과 함께 바로 시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해넘이, 달넘이라고 하여 해가 바뀌거나 달이 바뀐 후에 우귀를 한 경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기가 내려올수록 그 기간이 짧아졌다. 현대에도 신부 쪽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 후에 처가에 먼저 들르는 것은 우귀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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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시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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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혼례는 오늘날의 전통 혼례와 달리 신랑의 부모나 가족이 혼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부는 대개 우귀할 때까지 시부모를 뵐 기회가 없었다. 신부가 시가에 들어가면 시부모와 친척을 뵙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를 현구고례(見舅姑禮)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폐백과 같은 의식이다.28)김신연, 앞의 글 ; 김건태, 「19세기 단성 지역의 결혼 관행」, 『고문서 연구』 28, 한국 고문서 학회, 2006 ; 김소은, 「18세기 영남 사족(士族)의 일상과 생활 의례(Ⅰ)-『청대일기』에 나타난 혼례를 중심으로-」, 『사학 연구』 88, 한국 사학회, 200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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