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2. 성인이 되어
  • 가서, 가족끼리 주고받은 온갖 사연
박현순

결혼한 부부가 한 집에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도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가 계속 처가에서 살고 있는 경우 남편은 양가를 오가며 생활하여 야 했다. 또 한집에 살더라도 젊은 남편은 과거 준비를 하느라 절이나 서원, 서재 등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벼슬살이를 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도 하였다. 아내는 꼭 출산이 아니더라도 친정에 가서 오랫동안 머무는 경우가 있었다.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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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필의 가서
김한필의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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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린(趙德隣, 1658∼1737)은 결혼 생활 14년 동안 실제 아내와 함께 지낸 기간은 5∼6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과거를 준비할 때는 공부를 하느라 과거에 합격한 후에는 벼슬살이를 하느라 아내와 한집에서 지낸 기간은 1년에 길 때는 5∼6개월, 짧을 때는 3∼4개월에 불과하였다.29)조덕린(趙德隣), 『옥천집(玉川集)』 권9, 제망실공인권씨문(祭亡室恭人權氏文).

가족들은 헤어져 있는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편지는 노비를 보내 전하기도 하였으나 장날 시장에 오는 사람, 행상(行商), 공무(公務)로 오가는 관리나 향리(鄕吏), 서원의 노복(奴僕) 등 가능한 한 모든 인편을 활용하였다. 이처럼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를 가서(家書)라고 한다.

편지는 주고받는 사람에 따라 사용하는 문자가 달랐다. 사대부 남성은 한문을 사용하고, 여성이나 아이는 한글을 썼다. 한글로 쓴 편지는 ‘언간(諺簡)’이라고 한다.

가서는 집안의 일상사를 전하는 것으로 사생활을 담고 있다. 때문에 사후에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문집(文集)을 편찬할 때에도 특별히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면 대부분 싣지 않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황의 경우처럼 많은 가서가 현전하는 경우도 있다. 또 조선시대 여성의 관 속에서 많은 양의 언간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가족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사연은 다양하다. 간단한 안부 확인에서부터 농사일과 같은 집안일, 아들이나 손자의 교육 문제까지 수많은 일을 편지를 통해 처리하였다.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아래에서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부부·가족 관계의 일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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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가서
이황의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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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가장 많은 가서가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가 쓴 가서는 현재 937통이 전한다. 50대 전반까지 서울과 지방에서 벼슬살이할 때에는 주로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50대 후반부터 고향에 머물 때는 벼슬살이하는 아들과 서울 등에서 공부하고 있는 손자에게 편지를 보냈다.30)權五鳳, 『李退溪家書の總合的硏究』, 中文出版社, 1991.

아들 이준(李寯)에게 보낸 편지는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주로 집 안일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황은 원래 아들 둘을 두었으나 둘째가 요절(夭折)하여 이준이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집안의 농사일에서부터 노비들의 단속, 제사 등 집안의 온갖 일을 편지를 통해 전달하였다. 한편으로 아직 20∼30대였던 아들에게 학업에 매진하도록 당부하는 내용도 많이 있다. 이황은 자신을 대신하여 가사를 처리하는 아들을 안쓰러워하면서도 학업을 소홀히 하는 아들을 질책하고 이웃집의 아이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또 좀 더 나이가 들어 손자 이안도가 자랄 때는 손자의 학업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31)이황, 이장우·전일주 옮김,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연암 서가, 2008.

손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손자의 학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염려하고 서울의 신료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을 의식하여 손자가 조심하여 처신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이 많다. 이황이 손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들을 대할 때와 사뭇 다르다. 연륜과 함께 스스로의 학문도 성숙하여 손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한결 여유가 있다. 아들에게처럼 질책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지도하였으며 때때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역력하게 드러내기도 한다.32)이황, 정석태 옮김, 『안도에게 보낸다』, 들녘, 2006.

아버지가 아들·손자에게 주는 편지에는 대개 가장으로서 가사를 처리하거나 자식의 학업을 지도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자식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처리하는 모습도 있다.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다음 편지에서는 아들의 처가살이 문제가 화제이다.

네가 돌아갈 곳이 없어서 처가살이를 하며 어렵고 고생스럽다 하니 매번 너의 편지를 보고 나면 며칠은 즐겁지가 않구나.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스스로 살아가는 도리는 더욱 굳게 스스로를 지키며 분수를 편히 여기고 천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나도 처가살이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궁핍한 형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아비가 가난하여 자식도 가난한 것이니 무엇이 이상하겠느냐. 내가 내려갈 것이니 모든 일은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내가 관직에 나아가면 관리의 봉급이 아주 적지는 않을 것 이니 마땅히 너를 데리고 올 것이다. 다만 지금은 관직에 나아갈 마음이 더욱 적어지니 어찌할고, 어찌하리오.33)이황, 『도산전서』 4, 답준(答寯),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0, 259쪽 : 이장우·전일주 옮김, 앞의 책, 64쪽.

이준은 열여덟 살 때인 1540년(중종 35) 같은 예안에 사는 금씨(琴氏)와 혼인하여 줄곧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부친은 벼슬살이를 하느라 서울에 있었는데, 당시까지도 예안에는 아들 부부가 거처할 만한 집이 없었다. 이 편지를 보낸 때는 처가살이가 6년째로 접어든 1545년(인종 1)으로 손자도 다섯 살이 되었을 때이다.

처가살이의 어려움을 토로한 아들의 편지를 받은 이황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답장은 자신도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아들을 위로하는 데서 시작하여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데려오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말로 아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를 숙고하게 하였다.

실제 아들 부부가 부친과 함께 살게 되기까지는 3년가량이 더 소요되었다. 1548년(명종 3) 이황이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면서 아들 부부와 손자를 임지로 데려온 것이다. 아들은 결혼한 지 근 10년이 되어서 비로소 처가살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준처럼 오랜 기간 처와 자식을 처가에 두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 속에서 남성들이 상당한 갈등을 겪었음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이황은 조선시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성리학자이다. 그러나 가서에 나타난 이황의 모습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역시 아버지·할아버지로서 아들과 손자의 장래와 평범한 일상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생활인이었던 것이다.

경상도 현풍(玄風)에 살던 양반 곽주(郭澍, 1569∼1617)는 매우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는 처음 광주이씨(廣州李氏)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상처하고 진주하씨(晋州河氏)와 재혼하였다. 부부의 나이 차는 그리 크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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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주의 가서
곽주의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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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주는 결혼 후에 분가하여 논공이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인근의 소례에서 부친을 모시고 지내기도 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등 여러 가지 일로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또 부인 하씨가 친정에 가 떨어져 지내는 때도 있었다. 그 사이 곽주는 부인 하씨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냈다. 부인 하씨가 받은 편지는 그녀의 관 속에 묻혀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다.34)백두현, 『현풍 곽씨 언간 주해』, 태학사, 2003.

곽주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한글로 씌어졌는데, 대부분 아내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다. 특히 여행 중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여정과 일정을 소상히 알려 주곤 하였다. 또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집안을 어떻게 단속해야 하는지 알려 주며 아내와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였다. 어느 해 곽주는 과거를 보러 상경하는 길에 문경 새재를 넘어가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요사이 아버님 편치 아니 하신데 어떠하신고. 걱정이 가이 없네. 자네가 병든 자식들 데리고 혼자서 근심하는 줄 잊지 못하네. 버리고 멀리 나오니 아마도 과거가 사람을 그릇 만드는 것이로세. 졍녜는 적으나마 나아 있으며, 졍냥이의 학질병은 나아 있는가. 한때도 잊히지 아니하여 눈에 암암하 여 하네. …… 졍녜 졍녈이 절대로 밖에 나가 사내아이들하고 한 데서 못 놀게 하소. 내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여도 무던하지만 내가 없는데 밖에 나와 사내아이들하고 한 데서 놀더라하면 가장 그릇될 것이니 절대로 밖에 못 나오게 하소. 당직도 금츈이를 내어 보내지 말고 늘 자게 하소. 내가 있었던 때는 어떻게 하여도 무던하지만 내가 없을 때는 절대로 혼자 자지 마소. 조심조심하여 계시요. 뒷간도 움 뒤에 만들어서 보고 절대로 밖의 뒷간에 나와 보지 마소. 정녜 정녈이 절대 나와 놀지 못하게 하소. …… 낮이라도 자네 있는 집이 외딴 곳이니 절대로 혼자 있지 말고 정녜 졍녈이를 한 데서 떠나지 못하게 하여 데리고 계시오.35)백두현, 앞의 책, 110쪽.

곽주는 아내에게 낮에도 혼자 있지 말고 밤에도 혼자 자지 말며, 뒷간도 안채에 따로 만들어 쓰고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또 딸아이들에 대해서는 밖에 나가 사내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말리라고 부탁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당부는 계속 반복되는데, 가족 걱정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과거가 사람을 그르친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곽주의 많은 편지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손님 접대나 제수(祭需) 준비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물목(物目)까지도 소상하게 알려 주어 아내가 준비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곽주의 숙부(叔父)가 하씨를 보러 곽주의 집을 찾았다. 곽주는 서둘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주버님이 오늘 가시는 길에 우리 집에 다녀가려 하시니 진지도 옳게 잘 차리려니와 다담상(茶啖床)을 가장 좋게 차리게 하소. 내가 길에 가지고 다니는 발상에 놓아 잡수게 하소. 다담상에 절육, 세실과, 모과, 정과, 홍시, 자잡채, 수정과에는 석류를 띄워 놓고, 곁상에는 율무죽과 녹두죽 두 가지를 쑤어 놓게 하소. 율무죽과 녹두죽을 놓은 반(盤)에 꿀을 종지에 놓 아서 함께 놓게 하소. 안주로는 처음에 꿩고기를 구워 드리고, 두 번째는 대구를 구워 드리고, 세 번째는 청어를 구워 드리게 하소. 자네를 보려고 가시니, 머리를 꾸미고 가리매를 쓰도록 하소. 맏이도 뵙게 하소. 여느 잡수실 것은 보아가며 차리소. 잔대와 규화를 김 참봉 댁이나 초계 댁에서 얻도록 하소. 가서(家書)36)백두현, 앞의 책, 343쪽.

곽주는 아내에게 특별히 다담상을 차려 아주버님을 극진히 대접하게 하였다. 아직 가풍(家風)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가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상은 어떤 상을 쓰며, 상차림은 어떻게 할지도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자신이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는 발상에다 절육, 세실과, 모과, 정과, 홍시, 자잡채, 석류를 띄운 수정과를 올리고 곁상에는 율무죽과 녹두죽을 꿀종지와 함께 차리도록 하였다. 또 안주로는 꿩고기, 대구, 청어를 차례차례 구워 올리게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머리를 꾸미고 가리마를 쓰라고 하며 아내의 옷차림에까지 신경을 썼다.

곽주의 여러 편지에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 배어 있다.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아내를 걱정하고 마음이 상한 아내를 다독거리며 집안일과 자식들에 관계된 일은 세심한 것 하나까지 챙겨 주는 세심한 남편이었다. 엄친(嚴親)으로 묘사되는 근엄한 이미지와 달리 가서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남편은 오늘날 못지않게 자상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37)백두현, 앞의 책, 해제 및 17세기의 언어와 생활 문화.

그렇다면 하씨는 남편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까? 아쉽게도 하씨가 보낸 편지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 신천강씨(信川康氏)가 딸 순천김씨(順天金氏)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곽주 부부와는 또 다른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천강씨는 김훈(金壎)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岉)이 그녀의 둘째 아들이며,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瑬)가 그녀의 손자이다.

김훈은 예순 즈음에 성현 찰방(省峴察訪)이 되었는데, 신천강씨도 남편의 임지에 내려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어린 첩을 얻어 딴 집 살림을 차리면서 부인 신천강씨와 불화가 일어났다. 남편 임지에서 홀로 생활하던 신천강씨는 출가한 둘째 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사를 토로하곤 하였다. 이들 편지는 딸 순천김씨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종이나 남이나 시새움한다 할까 하여 남에게도 아픈 사색(辭色)을 않고 있다. 너희 보고 서럽게 여길 뿐이지마는 마음 둘 데 아주 없어 편지를 쓴다. 100권에 쓴다 한들 다 쓰겠느냐. 생원에게는 말하지 말며 사위들과 남들에게 다 이르지 말고 너희만 보아라. 종잇장을 얻어 쓰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앓다가 아주 서러우면 내 손으로 죽되 말없이 소주를 맵게 하여 먹고 죽고자하여 요사이는 계교를 하되 다만 너희는 어이없이 되었으니 잊어버리고 생원을 보고 죽으려 원망하지 않고 견딘다마는 가슴이 몹시 답답한 때야 그저 모르면 이렇게 서럽겠는가 싶구나. 보고 불에 넣어라.

발기의 첩을 그만두기를 바란다고 한 것을 미워 노하여서 마누라와 응전 년을 데려다 주고 있는 것은 밉지 않은 첩 말이다. “내 이 년이 밉지 않으니 이는 첩을 삼겠다. 잡말 말라.” 발기 것 미워라 미워라 하고 첩이라 얻지 말라 할지라도 “계집아이라 얻었다. 다시는 잡말 말라.”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증이 끌고 종일 데리고 닫고 들었고 내게 편지도 세 줄에서 더하지 않는다. 아들들까지도 나를 시샘한다 하므로 나는 열 아흐렛날부터 아픈 것을 지금까지 마치어서 앓는다. 누어서 앓는 병이 아니니 견디지마는 마음이 매양 서러우니 천지가 막막하구나. 음식 먹지 않으면 종들이나 기별할까. 조석반(朝夕飯)을 받아는 본다. 영금이 년도 나날이 못 가는가 몹시 괘씸히 굴고 당신도 보내라 하므로 엊그제 보내고 선금이에게 내 몸을 의지하고 있다.38)조항범, 『순천 김씨 묘 출토 간찰』, 태학사, 1998, 227쪽.

신천강씨의 편지는 자신의 울분과 답답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도 부리는 종이나 주변 사람들이 시샘한다고 할까봐 내색도 못한 채 타지에서 혼자 애간장을 끓였다. 강씨는 몸이 아파 앓아누운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 처지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남편이 벼슬을 얻은 것이 원망스럽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도 원망스럽다. 강씨는 소주를 독하게 내려 먹고 죽겠다는 험한 말까지 쏟아 내며 자신의 절망감을 토로하였다.

조선시대 남성들은 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반드시 애정 관계가 아니더라도 벼슬살이를 하거나 유배를 가 타지에서 생활할 때 첩을 두어 가사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와 첩의 사이에는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분명한 구분이 있었으며, 아내의 자리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것이었다. 하지만 첩이나 서얼(庶孼)을 잘 보살피는 것도 아내의 미덕(美德)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은 내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를 표출할 수 없었다.39)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 연구』 23, 한국 고문서 학회, 2003 ; 황수연, 「조선 후기 첩과 아내-은폐된 갈등과 전략적 화해-」, 『한국 고전 여성 문학 연구』 20, 한국 고전 여성 문학회, 2006.

조선시대 기록은 대부분 남성이 남긴 것이다. 여성의 삶을 적은 묘지명이나 여성을 위한 제문(祭文)도 모두 남성이 쓴 것이다. 심지어 현전하는 언간(諺簡)도 남편이 부인에게 쓴 것이 많아 그 속에서 부인들의 속사정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신천강씨가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구구절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속을 끓이는 아내의 속내가 드러나 있다.40)조항범, 앞의 책.

물론 강씨의 편지에 신세 한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씨는 가족의 옷을 장만하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씨앗을 놓아 키우고 실을 뽑아 베를 짜는 일에서부터 옷을 만들고 염색하고 수선하는 과정에 대하여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이나 아들의 편지에도 옷을 세탁하거나 수선하고 옷을 새로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많다.

강씨는 벼슬살이를 하는 남편을 두어 경제 형편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 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옷을 제대로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기가 죽어도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하기도 하였으며, 딸들을 걱정하여 자기가 입으려고 지은 옷을 보내기도 하고 겨우 장만한 옷감을 손자들의 겨울옷을 해 입히라고 보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옷을 제대로 얻어 입지 못하는 아들이 불쌍하여 첩을 얻어 주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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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녀재봉(三女裁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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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달리 여성은 온 가족의 옷을 직접 지어 입혔다. 여자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베를 짜고 옷을 짓는 일을 배워 평생 가족의 옷을 손수 마련하였다. 철마다 새 옷을 지어 입히는 것은 여성이 평생토록 담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바느질에 대한 이야기는 곽주의 장녀 곽씨가 쓴 편지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곽씨는 때때로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바느질감을 보내기도 하였다. 장옷을 해 입으려고 옷감을 친정에 보내 물들여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고, 동생에게 바느질감을 많이 부탁하고 살아 있는 한 그 품을 갚겠다고 미리 감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바느질감을 나누어 품앗이를 하는 것은 어머니와 자매들의 일상이었을 것이다.41)백두현, 앞의 책.

곽씨는 경주에 사는 최동언(崔東彦, 1592∼1672)에게 시집을 갔다. 고향 인 현풍 논공까지는 족히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이고 인편이 드물어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전염병이 치성(熾盛)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이즈음 아버지 곽주는 5남 4녀의 자녀를 두고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전처소생(前妻所生)인 곽이창(郭以昌) 외에는 장녀만이 혼인을 하였으며 하씨 소생의 세 아들은 한 살, 세 살, 다섯 살에 지나지 않았다.

곽씨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경주에 살면서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어머니 하씨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친정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가득 배여 있다.

너무 기별을 못 듣자와 민망하여 여러 번 울다가, (어머님의 예전 편지를) 읽어 보는 것이 여러 번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님께서도 나를 잊고 기별도 아니하옵시니 섧습니다. 나는 바라는 것은 없사오나 아쉬운 뜻에 꿈이라도 꾸면 자주 기별을 들을까. 그 날을 겨우 머무르게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42)백두현, 앞의 책, 586∼591쪽.

보낼 것이 없사와 쌀 서 말, 제주 한 병, 생광어 두 마리, 생꿩 한 마리를 보냅니다. 아무것도 제사에 쓰실 것을 못 보내니 더욱 애닯게 여깁니다. “무슨 죄를 전생에 짓고 제사도 함께 못 볼까.” 하며 생각하니 어둑 새롭게 망극하여 눈물을 금치 못하옵니다. …… 혼인은 언제 어디로 하시려 의논하십니까? 몰라서 답답합니다. 먼 곳으로 의논하지는 마십시요. 기별을 못해 답답합니다.43)백두현, 앞의 책, 559∼564쪽.

곽씨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옛날의 한때를 떠올리고 눈물 짓곤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친정에서 먼 곳으로 시집와 친정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것인지 서러워하였다. 그리하여 여동생들이 혼인할 즈음에는 절대로 하룻길이 넘는 곳으로는 혼인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누구보다도 왕래가 어려운 서러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씨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어머니를 걱정하며 작은 물건이라도 보내며 정(情)을 표시하고 싶어 하였다. 그녀는 바닷가에 가까웠던 탓에 해산물을 많이 보냈다. 대구 한 마리, 김, 기름이 없어 지지지 못한 자반, 생강 여섯 개, 삼치 등 소소한 물건을 보냈는데, 아무것도 보낼 것이 없어서 한스러워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통신이나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여행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더욱 길었다. 또 떨어져 있는 가족이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서로 소식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가족에게 전하는 한 장의 편지에는 오늘날보다 더욱 절실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특히 여성의 편지에는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가서는 조선시대 가족관계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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