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2. 성인이 되어
  • 제문, 앞서 간 배우자에 대한 애달픔
박현순

부부는 평생 해로(偕老)하기를 바라지만 많은 사람은 일찍 배우자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전염병이나 질병으로 배우자와 자식을 함께 잃는 경우도 다반사(茶飯事)였거니와 젊은 아내가 출산 중에 세상을 뜨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곽주의 아내 하씨처럼 젊어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해 지은 글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16세기 말 안동에 살던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편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편지는 1998년 묘를 이장할 때 남편의 관 속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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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태 부인의 편지
이응태 부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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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하였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 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44)KBS 역사 스페셜 제작팀, 『역사 스페셜』 3-조선판 사랑과 영혼, 4백 년 전의 편지-, 효형 출판, 2008.

이응태는 안동 출신으로 1586년(선조 19)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른 남짓하였을 아내는 자신과 아들의 옷을 관 속에 함께 넣어 죽은 남편과의 단란한 한때를 추억하였고, 머리카락으로 미투리 한 켤레를 삼아 관 속에 함께 넣었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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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리
미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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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한 장의 편지를 써서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도록 애원하였다. 이 편지에는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였던 생전의 약속을 되새기며 먼저 간 남편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절망감을 호소 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으며, 재혼도 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남편을 잃은 여성은 홀로 자식을 키우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응태의 아내가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이른 것은 이후에 살아갈 자신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성이 곧잘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남아 있는 삶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많은 남편은 죽은 아내를 추억하며 제문이나 묘지(墓誌) 같은 글을 지었다. 제문이나 묘지는 망자(亡者)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아내의 모습은 때로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 와서 시부모와 시동생·시누이를 돌보며 일생을 보낸 아내는 매우 가련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푸성귀로 배를 채우고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으면서 남편을 위해서는 다리를 잘라 팔아 술상을 차리고 철마다 옷을 해 입히는 것이 조선시대 아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또 아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남편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자 친구였다. 어디에서도 아내가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아내는 철저하게 가족과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45)황수연, 「17세기 ‘제망실문(祭亡室文)’과 ‘제망여문(祭亡女文)’ 연구」, 『한국 한문학 연구』 30, 한국 한문학회, 2002 ; 유미림, 「조선시대 사대부의 여성관-‘제망실문(祭亡室文)’을 중심으로-」, 『한국 정치학 회보』 39-5, 한국 정치학회, 2005.

남편이 지은 제문에는 자신이 얼마나 아내에게 의지하였는지 토로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고된 생활을 묵묵히 이어 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피력하며 아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회한을 곱씹는 경우도 많다. 그중에는 정양(鄭瀁, 1600∼1668)처럼 아내에게 무심하였던 자신을 자책한 경우도 있다.

당신은 10여 년 전 자식 셋을 잇달아 잃은 뒤 병이 심해져 그 뒤로 다시는 건강을 찾지 못하였소. 부모상을 당해서도 가 뵙지 못해 한스러워 하더니, 그 통한이 평생 가슴에 맺혀 부모 생각에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은 날 이 없었소. …… 얼굴색이 까맣게 타 들어가 옛날의 꽃다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내가 어리석어 근심 걱정도 하지 않았구려. 나는 줄곧 신경 쇠약으로 당신에게 마구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마치 원수나 해충 보듯 “왜 안 죽나.” 하기까지 하였소. 내가 함부로 거칠게 대한 잘못을 속죄할 길이 없구려. 앞으로 나는 결코 새 장가를 들거나 첩을 두지 않을 것이며, 고생 고생하면서 여생을 마칠 작정이요. …… 발인이 내일이기에 조촐하나마 술, 숭어, 배, 수박 등 평소에 당신이 좋아하였으나 실컷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을 차려 놓고 당신의 죽음을 통곡하는데, 하늘의 뜻은 알 수가 없구려.46)정양(鄭瀁), 『포옹집(抱翁集)』 권4, 제망실이씨문(祭亡室李氏文) : 송시열·이인상 외, 유미림 외 옮김, 『빈 방에 달빛 들면-조선 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 학고재, 2005, 40∼43쪽.

정철(鄭澈)의 손자였던 정양은 마흔 여덟에 아내 전의이씨(全義李氏)를 잃었다. 부부는 아이 여섯을 두었으나 이 중 셋을 어릴 때 잃었고, 아내 이씨는 심신이 쇠약해져 앓아눕고 말았다. 오랫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아내는 죽어야지 하는 말을 되뇌곤 하였다. 정양은 이런 아내를 다정하게 위로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는 폭언(暴言)을 하기도 하였다.

정양이 아내를 위해 쓴 제문에는 그간의 일을 되새기며 아내를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자신의 회한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그의 제문은 새 장가를 들거나 첩을 두지 않고 고생을 감내하며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먼저 떠난 아내를 가련히 여겨 여러 가지 약속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더 이상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를 모시는 젊은 남성은 현실적으로 재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맹세는 대개 자식이 혼례를 하고 마흔을 넘긴 남성이나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정양은 마흔 여덟 살로 당시에도 재혼을 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자식들이 아직 어렸으니 재혼을 할 수도 있었고, 노년의 생활을 첩에게 의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양은 생전의 아내에게 모질게 굴었 다는 자책 탓인지 굳이 재혼이나 축첩(蓄妾)을 마다하고 마지막까지 죽은 아내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이 약속을 지킨 듯하다.

아내에게 바치는 제문에는 아내의 장지(葬地)에 대한 언급도 자주 등장한다. 아내가 죽어서도 외롭지 않도록 조상이나 일찍 죽은 자식 가까이 묘를 쓴다는 사연을 쓰고 있다. 개중에는 죽어서도 함께 묻힐 것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조덕린이 아내 권씨에게 바친 제문의 일부이다.

당신의 장지는 안동으로 정하였다오. 주천에서는 30리밖에 안 되지만 여기서는 100여 리 정도 멀리 떨어진 곳이오. 당신은 주천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채 결국 객지(客地)의 혼이 되고 말았으니, 견디기 어려운 당신 심정을 내 어찌 모르겠오. 장지는 평소 길지(吉地)라 일컬어지던 곳이니 아마도 혼백이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거요. 또 그 오른편 광중(壙中)을 비워 훗날 내가 곁에 묻힐 것이요. 그리고 산 아래 밭을 마련하여 자식 하나를 분가시켜 그곳에 살게 할 것이니, 의지할 곳 없어 외롭지는 않을 거요.47)조덕린, 『옥천집』 권9, 제망실공인권씨문 : 송시열·이인상 외, 유미림 외 옮김, 앞의 책, 149∼156쪽.

조덕린은 영양(英陽) 출신으로 스무 살 때 두 살 연상의 권씨와 혼인하였다. 혼인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계속 과거 공부를 하다 서른네 살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겨우 두 해가 지나 아내 권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조덕린은 결혼 후 줄곧 과거 준비에 매달려 아내와 한집에서 지낸 것은 5∼6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결혼 생활을 회고하였다. 긴 세월 어려움을 감내한 아내는 남편이 겨우 문과에 급제하여 영화를 누릴 만하다고 할 즈음인 1693년(숙종 19)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아내는 친정에 갔다 세상을 떠났고 장지도 친정 쪽으로 정해졌다. 상심한 조덕린은 자신이 아내의 곁에 함께 묻힐 것과 자식을 묘지 근처로 분가(分家)시켜 죽어서도 아내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 재혼하는 데에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다 하더라도 부모를 위해 다시 혼인해야 하는 것이 자식된 의무였다. 조덕린도 진주강씨(晋州姜氏)와 재혼을 하였다. 다른 경우에 비추어 그가 재혼하는 데에도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48)문숙자, 「조선 후기 양반의 일상과 가족 내외의 남녀 관계-노상추의 ‘일기(1763-1829)’를 중심으로-」, 『고문서 연구』 28, 한국 고문서 학회, 2006 ; 김소은, 앞의 글.

조덕린은 정말 권씨와 함께 묻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조덕린은 재혼을 하였으나 후취한 강씨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본인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나이 여든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 영암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자식들은 시신을 운구(運柩)해 와서 권씨의 묘 곁에 안장(安葬)하였다.49)조덕린, 『옥천집』 권18, 행장(行狀).

여러 부인을 두었을 때 사후에 누구와 묻힐 것인가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은 정리상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부친과 함께 묻히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을 두지 못한 아내는 죽어서도 서러울 수 있고 자식들 간에도 분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선(李選, 1631∼1692)은 이 문제를 고민하다 예법에 맞추어 반드시 전처와 합장하고 후처의 묘는 다른 곳에 따로 쓰도록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그로서도 이런 유언이 지켜질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묘를 쓰는 것은 자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50)이선(李選), 『지호집(芝湖集)』 권6, 가계(家戒).

조덕린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권씨 소생이었으며, 후처 강씨는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 약속은 쉽게 지켜질 수 있었다. 만약 권씨에게 자식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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