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3. 노년에서 죽음까지
  • 기념하는 연회와 기념첩
박현순

평생도에는 노년의 모습으로 후원에서 자식의 봉양을 받으며 벗들과 한담을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이 든 사람의 이상은 일선에서 물러나 자식의 봉양을 받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은일지사(隱逸之士)와 같이 여유로운 삶을 사는 즐기는 것이다. 또 결혼 60주년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회혼례(回婚禮)를 치르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부가 장수해야 할 뿐 아니라 부부를 봉양할 자식도 있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장수를 기념하고 축원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축사(祝辭), 축시(祝詩) 등을 모아 첩(帖)을 만들었다. 회갑, 장수, 회혼 등을 기념하는 각종 그림이나 첩은 오늘날까지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확대보기
봉수당진찬도
봉수당진찬도
팝업창 닫기

회갑은 인생에서 중요한 기념일이다. 60갑자를 쓰던 시절에 회갑은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주변의 친지와 친우를 초청하여 흥겨운 회갑연을 베풀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성대하게 회갑연을 치른 사람은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이다. 홍씨는 홍봉한의 딸로 열 살 때 세자빈(世子嬪)이 되었으나 스물여덟 살에 남편 사도 세자가 뒤주에서 숨지는 참변을 겪었다. 당시 열 한 살이던 정조는 국왕이 된 후 동갑인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던 1795년(정조 19) 사도 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근처 화성(華城)에서 성대한 회갑잔치를 베풀었다. 살아 있는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가 함께하는 잔치였다.

이해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출발하여 윤2월 13일 아침 화성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성대한 진찬례(進饌禮)를 베풀었다. 정조는 세 번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고두(叩頭)를 행한 후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를 부르며 모후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왕의 제창을 따라 하였다. 축수(祝壽)가 끝난 후 좌 중에게도 음식상과 꽃이 나왔고,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확대보기
이안와수석시회도
이안와수석시회도
팝업창 닫기

행사가 모두 끝난 후 정조는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내리고 연회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화답(和答)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화성 행차와 회갑연의 준비에서 환궁까지의 전 과정은 『정리의궤(整理儀軌)』와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으로 남아 있다.51)한영우, 『정조의 화성 행차』, 효형 출판, 2007.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에 비할 바야 아니겠지만 민가에서도 회갑연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열에 대여섯은 회갑을 맞이한다고 할 정도로 회갑연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52)장혼(張混), 『이이엄집(而已广集)』 권3, 술지사장차도운(述志四章次陶韻).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손님을 초청하고 기생과 악사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개중에는 가까운 벗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여는 경우도 있었다.53)장혼, 『이이엄집』 권11, 호고자회갑첩발(好古子回甲帖跋). 1786년(정조 10) 남기한(南紀漢)의 회갑연은 이안와수석시회도(易安窩壽席詩會圖)라는 그림으로 전해진다.

일흔을 넘어서면 한 사람 두 사람씩 세상을 떠나고 살아남은 사람은 특별히 장수하는 노인으로 인식되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장수를 기념하여 특별히 연회를 열었는데 이를 수연(壽宴), 경수연(慶壽宴)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끝난 후 다시 10년 후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칠순 잔치를 열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 정조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여든 한 살이 될 때까지 장수하였지만 자식의 축하를 받을 수는 없었다. 경수연은 본인의 장수와 더불어 장수를 축하해 줄 자식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행사였다.

신벌(申撥, 1523∼1616)은 이런 복을 누린 사람이었다. 신벌은 일흔이 넘어 종3품의 관직인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에서 물러나 20여 년을 더 산 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법에 따라 노인직을 받아 80세가 되던 해에 당상의 품계에 오르고 90세에는 2품을 하사받았다. 아들 신응구(申應榘)와 세 누이는 이를 기념하여 부친이 80세가 되던 1602년(선조 35)에 성대한 경수연을 베풀고, 그 광경을 네 점의 그림으로 그리고 당대의 고관이자 문장가인 이항복(李恒福), 이수광(李睟光) 등 16명의 시문과 축문을 담아 『경수연도(慶壽宴圖)』를 제작하였다. 90세 때에도 다시 경수연을 베풀고, 장유(張維), 신흠(申欽)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에게 연회를 기념하는 서문(序文)을 받아 기념첩을 제작하였다.54)김상헌(金尙憲), 『청음집(淸陰集)』 권31, 「동지중추부사신공묘갈명(同知中樞府事申公墓碣銘)」 ; 신흠(申欽), 『상촌집(象村稿)』 권21, 「동지중추부사신공벌구십경수연서(同知中樞府事申公撥九十慶壽宴序)」 ; 장유(張維), 『계곡집(谿谷集)』 권5, 「하동지신공경수연시서(賀同知申公慶壽宴詩序)」.

신벌보다 더 장수하여 자식에게까지 영예를 더하게 한 사람은 103세를 산 이거(李蘧)의 어머니 채씨(蔡氏) 부인(1504∼1606)이다. 100세를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다. 선조는 특별히 채씨 부인의 100세를 기념하여 아들 이거를 2품에 가자(加資)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하여 모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이거는 모친을 위해 조정의 대신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경수연을 베풀고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과 축사를 담은 『경수도첩(慶壽圖帖)』을 제작하였다.55)이경석(李景奭), 『백헌집(白軒集)』 권30, 「백세채부인경수연도서(百歲蔡夫人慶壽宴圖序)」 ; 허목(許穆), 『기언(記言)』 권12, 중편(中篇) 수고(壽考), 「경수연도기(慶壽宴圖記)」.

이를 계기로 70세 이상의 어머니를 모시는 한준겸(韓浚謙) 등 대신 13명이 봉로계(奉老契)를 만들어 1605년(선조 38) 합동으로 성대한 경수연을 열었다. 그 과정은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라는 기념첩으로 제작하였다. 이 도첩은 다섯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연회의 준비 장면과 아들인 대신들, 그 자제들, 주인공인 모부인들의 연회 장면이 실려 있다. 이 중 모부인의 연회 장면에는 기녀, 악사, 무동 들이 흥을 돋우는 가운데 자제들이 모부인에게 축수를 올리는 모습과 나이든 대신들이 흰 수염을 날리며 모부인을 위해 춤을 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색동옷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노인이 다 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56)윤진영, 「조선시대 연회도의 유형과 회화적 특성」, 『조선시대 연회도』, 국립 국악원, 2001.

개중에는 어부가(漁父歌)로 유명한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집안처럼 대대로 장수한 집안도 있었다. 그의 선조 중 생몰년이 처음 확인되는 고조부는 84세, 증조와 조부는 76세, 부친은 97세, 숙부는 99세를 살았다. 외가도 장수하여 외조부는 93세, 외숙은 92세, 모친은 85세를 살았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장수하는 집안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확대보기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다섯 번째 장면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다섯 번째 장면
팝업창 닫기

1532년(중종 27) 67세이던 이현보는 94세의 부친을 위해 수연을 열었다. 특별히 고령에 홀로 되신 부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을의 80세 이상 노인 여덟 명을 초청하고, 모임을 구로회(九老會)라고 일컬었다.57)이현보(李賢輔), 『농암집(聾巖集)』 권3, 애일당희환록(愛日堂戲歡錄),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 양로서발(養老序跋).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낙양의 향산에서 인근에 사는 노인 아홉 명과 함께 주연(酒宴)과 시회(詩會)를 열고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향산 고사(香山故事)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고을은 노인이 많다고 칭한다. 내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와서 수연(壽宴)을 베풀었는데, 그때 춘부(春府)의 연세가 아흔 넷이었다. 생각해 보니 옛날에 부모님이 함께 계실 때는 잔치를 열고 손님을 초청하니 부모님이 기뻐하셔서 즐거움이 많았다. 지금은 노인이 혼자 계시고 기거(起居)도 힘드셔서 잡스러운 손님은 제하고 다만 향중(鄕中)에 아버님과 함께 어울렸던 여든 살 이상 되신 여덟 분을 초청하였다. 마침 향산의 고사가 있어서 구로회(九老會)라고 하였다.58)이현보, 『농암집』 권3, 애일당구로회.

이현보가 여든 하나가 되던 해 그 아들들도 부친을 위해 수연을 베풀어 아버지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이때에는 70세 이상의 고을 노인 여덟 명을 초청하였는데 이를 속구로회(續九老會)라고 하였다.

확대보기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
팝업창 닫기

이현보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 이문량(李文樑)은 83세, 둘째 이중량(李仲樑)은 78세, 셋째 이계량(李季樑)은 81세, 넷째 이숙량(李叔樑)은 73세를 살았다. 그나마 가장 생이 짧았다고 할 이숙량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총탄을 맞아 순절(殉節)한 것이니 이 집안의 무병장수는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 집안에서는 이문량이 72세 되던 해 다시 구로회를 열었다. 고을 어른을 모시고 부모의 장수를 축원하는 구로회를 여는 것이 집안 대대의 전통이 되었다.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큰 복은 부부가 해로하는 것이다. 부부의 장수와 해로를 기념하는 행사가 회혼례였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이상적인 삶을 묘사한 평생도의 마지막 폭은 항상 회혼례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고 사람들이 경하(慶賀)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의 회갑, 등과(登科)의 회방(回榜), 초례의 회근(回巹)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력으로도 취할 수 없고, 진(秦)나라·초(楚)나라와 도주공(陶朱公)·의돈(猗頓)의 부(富)라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賢人君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장수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 무릇 회혼이라고 하는 것을 경사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고 집이 다소나마 풍성한 연후에야 즐거움에 이를 수 있으며, 이와 같지 못하면 그때를 당하여도 즐거움을 갖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59)장혼, 『이이엄집』 권3, 술지사장차도운.

회혼례는 회근례(回禮)라고도 하는데, 결혼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부부가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혼례 의식을 재현하는 행사이다. 회혼례는 예 서에 실린 의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법에 엄격한 유학자들은 속습(俗習)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자식들이 부모의 회혼을 기념하여 주연을 열어 헌수(獻壽)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혼례를 재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60)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88, 답권치도(答權致道) ; 이재(李縡), 『도암집(陶菴集)』 권20, 답이생(答李生).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각종 연회가 발달한 가운데 사대부가에서는 회혼례도 크게 성행하였다.

확대보기
회혼례도병
회혼례도병
팝업창 닫기

회혼례 때에는 자손들이 집사(執事)가 되어 60년 전의 혼례와 마찬가지로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를 재현하였다. 영조는 안윤행(安允行)의 회혼을 맞아 특별히 전안례에 필요한 목기러기(木雁)와 잔치 물품까지 하사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부모 중 한쪽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회혼일을 기념하여 연회를 베푼 경우도 있었다.61)장혼, 『이이엄집』 권3, 술지사장차도운.

회혼례 장면은 평생도의 일부분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따로 병풍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현재 민씨 집안에서 만든 여덟 폭짜리 회혼례도병(回婚禮圖屛)이 전한다.62)박정혜, 「홍익 대학교 소장 ‘회혼례도병(回婚禮圖屛)’」, 『미술사 연구』 6, 미술사 연구회, 1992 ; 고경희, 「18세기 조선시대 회갑연과 회혼례 회화에 나타난 식생활 문화에 관한 연구」,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지』, Vol.18, No.6,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 2003.

회혼은 누구나 누릴 수 없는 큰 복이었다. 회혼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부부가 남다르게 장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축하해 줄 수 있는 자식도 있어야 하였다. 따라서 회혼례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행운이었으며, 집안의 번성과 화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