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3. 노년에서 죽음까지
  • 유서, 살아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
박현순

시간이 흘러 어느 시점에 이르면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녀를 위해 유서(遺書)를 작성하여 생전에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때로는 유언을 남기며 자손에게 대필하게 한 경우도 있다. 또 여성이나 어린아이도 볼 수 있도록 한글로 작성한 경우도 있다.

유서나 유언의 내용은 생전에 처리하지 못한 일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고, 또 자제에게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 당부하는 경우도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내용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부친이 남긴 유서는 유계(遺戒), 유훈(遺訓)으로도 일컬으며, 후손에게는 하나의 가훈(家訓)이 되었다.63)정무곤, 『조선시대 가훈서의 교육학적 해석』, 한국학 중앙 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07. 조선시대 양반이 남긴 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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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은 제사에 대한 것이다. 제사는 가계(家系)를 이어 가는 고리로서 가장이 주관하다가 본인의 죽음과 더불어 자손에게 물려준다. 따라서 후손이 제사를 잘 봉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은 조 상의 후손이자 후손의 조상으로서 가장이 수행해야 할 마지막 책임이었다. 다음은 17세기 전반 문장가로 유명한 이식(李植, 1584∼1647)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면천(沔川) 증조부의 묘제(墓祭)는…… 너희들에게는 이미 4대가 되었으니 선영(先塋)에 계속해서 물품을 보내 제사를 돕더라도 너희 세대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묘제는 영원히 폐할 수 없으니 4대가 지나면 한 해 한 번 지내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라.

위안(渭岸)의 두 유모(乳母) 묘는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고 밥 한 그릇만 놓되, 부인이 살아 계실 때에는 폐하지 마라.

외증조의 제사는 너희들에게는 세대가 머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외조모님은 은혜가 외손에게까지 미쳐 이곳의 노비와 전답이 외가에서 온 것이 많다. 그 집의 얼자(孽子)가 제사를 지내는데 조석(朝夕)으로 유망(流亡)하여 참혹함을 말할 수가 없다. 외조모의 묘제는 봄가을로 위안의 노(奴)에게 물품을 보내고 너희들이 단속하되 너희 대에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자녀들이 제사를 돌려 가며 지내는 것은 옛 법이 아니다. …… 다만 우리나라의 법이 종자(宗子)와 여러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갖는데 차이가 없으니 다만 종가(宗家)에만 제사를 책임지우는 것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정성을 다해 받드는 것이겠는가. …… 내 생각에 기제(忌祭)는 제수를 돕고 묘제는 윤행(輪行)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상의해서 하여라. 딸네의 경우는 아들과 예가 다르니 억지로 지내게 해서는 안 된다.64)이식(李植), 『택당집(澤堂集)』 별집(別集) 권16, 유계수사(遺戒數事).

이식의 유언은 증조부의 묘제, 아내의 유모 제사, 외가의 제사, 제사 윤행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씩 일러 주었다. 4대가 지나 친진(親盡)한 조상, 예제상 제사를 지낼 대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제사를 도와 야 하는 외가의 제사, 『주자가례(朱子家禮)』와는 어긋나는 조선의 윤행 관행 등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정리하여 전달한 것이다.

사대부가의 제사는 기제사 외에도 『주자가례』에 규정된 사시제(四時祭)와 가묘제(家廟祭), 조선 고유의 명절인 정조(正朝), 한식, 단오, 추석에 올리는 사명일(四名日) 묘제 등 종류가 매우 많았을 뿐 아니라 제사 방식도 『주자가례』와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 외가의 제사를 봉행하거나 자녀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조선 고유의 관행인 윤행도 일반화되어 있었다.65)박현순, 「16세기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친족 질서-이황(李滉) 집안을 중심으로-」, 『한국사 연구』 107, 한국사 연구회, 1999 ;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 설행과 그 성격-이문건의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98, 일지사, 2000.

이처럼 제사와 관련된 다양한 습속이 공존하는 가운데 죽음을 앞둔 가장은 제사를 예법에 맞게 안정적으로 봉행하는 방법을 마련하여 전범(典範)을 세워 주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제사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제전(祭田)을 떼 주고 제상(祭床)에 올릴 음식과 그릇 수까지 정해 주기도 하였다. 또 봉사 대수(奉祀代數)가 다한 선조나 예법상 봉사 대상이 아닌 외조부모, 처부모, 자식 없이 죽은 아들의 제사를 지내는 방법도 일러 주었다.

유서에는 자신이 죽은 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세세하게 당부한 사례도 많이 있다. 장지의 선정에서부터 장례에 사용할 물품, 묘비(墓碑)의 건립, 제물의 그릇 수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적어 전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 자식의 정리는 가능하면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어 부모의 마지막 길이 장엄한 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후에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자식들이 법도를 벗어나는 것을 미리 경계시키려고 하였다. 그 요점은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것이었다.

효종 때 도승지(都承旨) 김좌명(金佐明)이 부친 김육(金堉, 1580∼1658) 부부의 묘에 수도(隧道)를 만든 일이 있었다. 영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세자빈의 조부모이기도 한 부모의 묘에 수도를 만드는 것은 아들로서 부모를 존숭하는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좌명은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削奪官爵)을 당하였고 돌아가신 부친에게도 오 명을 남기고 말았다. 부모가 이런 경우를 우려하는 것도 기우(杞憂)는 아닐 것이다. 특별히 상장례(喪葬禮)에 대해 많이 언급한 데에는 조선 후기에 상장을 후하게 치르는 것이 유행하여 경제적인 부담이 컸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저술은 평생 글 쓰는 일에 매진한 사대부에게는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생전의 저술이나 기록은 허목(許穆, 1595∼1682)처럼 생전에 스스로 정리하여 편찬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사후에 자손들의 손에 맡겨졌다. 자손이나 제자들은 유고를 모아 문집을 간행하는 것을 자신들이 해야 할 과업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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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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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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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후손들이 유고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유실되는 경우도 있었다. 유고를 휴지로 활용하여 벽지나 창호지로 바르거나 항아리를 덮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시장의 휴지전(休紙廛)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런 경우를 목도(目睹)하였던 윤기(尹愭, 1741∼1826)는 특별히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서적과 집필 원고를 철저하게 보관하도록 자손들에게 부탁하였다. 이것을 망실되게 하는 것은 자신의 팔다리를 짐승의 밥으로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만큼 그는 유고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다. 그가 보관하도록 한 서책에는 자신이 직접 지은 시문(詩文), 경의(經義), 과문(科文), 역서(曆書)에 쓴 일기, 여러 책에서 등초(謄抄)하여 엮은 책도 있었으며, 내사본(內賜本) 『맹자(孟子)』, 『팔자백선(八子百選)』, 『규장전운(奎章全韻)』, 『건릉지 장(健陵誌狀)』처럼 당대에 간행된 책도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성정(性情)을 담은 것으로 사후에도 후손에게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66)윤기(尹愭),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책(文稿冊) 10, 예작유계 부익배(預作遺戒付翼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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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본초(文集本草)』
『문집본초(文集本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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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영조 35)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쓴 유서에는 자신이 집필하던 저술의 완성을 당부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하학지남(下學指南)』,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집필 중이던 책의 의도와 집필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동사강목』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보이며 권철신(權哲身) 등에게 부탁하여 완성하도록 당부하였다.67)안정복, 『순암집』 권14, 시제정록자경증유서(示弟鼎祿子景曾遺書). 안정복이 이 유서를 쓴 것은 병을 앓던 48세 때이다. 그러나 그는 이후 80세까지 살았으며, 1778년(정조 2) 목천현감으로 있으면서 『동사강목』을 간행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저술을 완성하라고 유서에 기록한 것은 일평생을 학문 연구에 몰두해 온 학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 탓일 것이다.

유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식들에게 앞으로의 삶에 지침이 될 교훈적인 내용이다. 노년에 이르러 손자들까지 이미 성장한 뒤라면 그나마 나을 수 있으나 아직 자식들이 성장하는 중이라면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당부가 더욱 절실할 것이다.

권시(權諰, 1604∼1672)는 48세가 되던 1651년(효종 2) 오래도록 병을 앓으며 갑작스런 죽음에 대비하여 유서를 남겼다. 그는 권기(權愭)와 권유(權惟)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유서를 쓸 당시 권기는 28세, 권유는 26세였다.

권시는 자신이 파악한 두 아들의 성품과 기질의 장단점에 대해 평하고, 고쳐야 할 점과 자신을 수양해 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였다. 유약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권기에게는 포용력을 키우고 집안일은 동생에게 맡기고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당부하였다. 또 학문에 뜻이 없던 동생 권유에게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형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두 아 들에게 당부를 달리한 것은 한 명이라도 학업으로 성취하여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68)권시, 『탄옹집』 권10, 양아유서 신묘지월망일(兩兒遺書辛卯至月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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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척기 초상
유척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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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장년이 된 경우라도 아버지의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유교 도덕에 입각한 일반적인 도덕률에서부터 생활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나 처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하나하나 자손들에게 전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한평생에 걸친 부친의 경험과 시대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귀결은 자손들이 스스로를 수양하고 바른 삶을 살아 선조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 문호(門戶)를 지켜 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유계이다.

혼인을 할 때는 먼저 문지(門地)와 인품을 보고 빈부는 절대 비교하지 마라. 종반(宗班), 부마(駙馬)와 가까운 친척, 무장(武將), 훈신(勳臣)의 집은 선대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혼인을 한 일이 없다. 대개 문호(門戶)가 한미하고 권세를 피하여 멀리하는 것이 가법(家法)이어서 그런 것이다. 내 자손들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 내 말을 저버리지 말고 영세토록 지키도록 해라. 만약 거절하기 어려운 곳이 있으면 선조의 가르침이라고 하며 사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사문(私門)에서 소를 잡는 것은 이미 국가에서 금지하는 것이다. 하물며 가축 중의 중요한 것이 소만 한 것이 없으며 민생의 본업에 힘써 일하는 것도 소만 한 것이 없다. 어찌 마음대로 도살할 수 있겠느냐. 혼인이나 수 연(壽宴), 제사를 막론하고 자손 중에 사사로이 소를 잡는 자가 있으면 가묘(家廟)에 배알하지 못하게 하라. 옛날에 내가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 수연을 베풀었는데 작은 송아지도 감히 잡지 않고 모두 현방(懸房)의 사람에게 사게 하였다. 어찌 작은 비용을 아끼려고 국가의 금령을 범하고 큰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꺼리지 않겠느냐.

……

빚을 놓아 이익을 얻는 것은 근래 중외의 막대한 폐단이요 궁한 백성들에게 해가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 사가(私家)에서 전곡(錢穀)이 있는 자들이 이자를 취하는 일을 일삼아 혹은 장리(長利)라고 하고 혹은 달수를 따져 이자를 걷는데 의복을 전당(典當)으로 잡고 침학(侵虐)하고 욕을 퍼붓는다. 심지어 구타하는 것도 꺼리지 않아 송옥(訟獄)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차후에 자손과 부녀 중에 혹 돈으로 빚을 놓거나 곡식을 주고 이자를 받는 두 가지 일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가묘를 배알하지 못하게 하고 함께 배척하여 친척에 끼지 못하게 하라.

……

되, 말, 저울 같은 것은 마땅히 크기와 무게를 한결같이 해라. 가장이 된 자는 때때로 단속하여 살피고 절대로 큰 것으로 들어오고 작은 것으로 나가거나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일이 없도록 해라.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조상의 견책(譴責)을 두려워할지어다.69)유척기(兪拓基), 『지수재집(知守齋集)』 권15, 유계(遺戒).

유서에는 후손으로서 선조를 봉양(奉養)하고 현창(顯彰)하려는 마음과 선조로서 후손이 바른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바람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은 선조와 후손을 연결하는 매개로서 간결하게 정리될 것을 희망하였다. 하지만 유서는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 장의 유서는 선조의 가르침이자 가법(家法)으로서 선조와 후손을 잇는 가교(架橋)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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