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1. 가족 형태와 거주율
  • 조선 전기의 가족
  • 남귀여가혼, 솔서혼
전경목

우선 성인 남녀가 결혼한 후 시가(媤家)나 처가(妻家) 그 어느 쪽에서 살았는지에 따라 가족 형태의 일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 이,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부모가 재산을 자녀의 성별이나 차서(次序)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결혼을 계기로 처가로 옮겨 가서 사는 남성이 많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김석필(金錫弼)의 외숙(外叔)인 신중수(辛仲粹)가 1506년(중종 1)에 김석필에게 작성해 준 다음과 같은 별급 문기(別給文記)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김석필은 한림직(翰林職)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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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수 별급 문기
신중수 별급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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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弘治) 19년…… 초9일 3촌 조카 한림 김석필에게 주는 명문77)『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扶安金氏愚磻古文書)』,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3, 201쪽, 분재기류(分財記類) 1. 이 문서의 첫 줄에 나오는 ‘홍치 19년’은 ‘정덕 원년(正德元年)’의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명문을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너의 양친(兩親)이 모두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네가 나의 집으로 와서 성장하였는데 일찍이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연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니 이는 가문의 영광이요 지극히 효성스러운 일이다. 내가 너를 친아들과 다름이 없이 여기기 때문에 어머니 쪽으로부터 물려받은(母邊傳來) 사내종 눌금(訥金)이 양처(良妻)와의 사이에서 낳은 넷째 소생(所生) 계집종 청비(靑非)를 지급(許給)하니 (너는 이를) 영영 차지하여 부리고(執持使用) 자손에게 전해 줄 일이다.

신중수는 이 문기에서 김석필이 마치 양친의 사망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의 집에 와서 거처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김석필의 아버지 김차손(金次孫)이 영월 신씨(寧越辛氏) 신숙량(辛淑良)의 딸과 혼인하면서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에 와서 거처하고 그곳에서 김석필을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 김차손과 그의 처 신씨가 일찍 사망하자 김석필의 외숙인 신중수는 정성을 다해 그를 돌보아 주었다. 그 후 그가 생원시(生員試)와 문과에 연이어 합격하자 이를 ‘가문의 영광(家門榮孝)’이라고 칭찬하며 계집종 한 명을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분재기를 통하여 김차손이 처가살이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처가살이는 당시에 하나의 풍조였다. 처가가 친가(親家)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정치적으로 권세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이러한 혼인 형태를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든다는 뜻에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또는 장인이 사위를 데리고 산다는 의미에서 ‘솔서혼(率壻婚)’이라고 불렀다. “어려서는 외가살이를 하고 혼인하고서는 처가살이를 한다.”는 옛 속담이 있는데, 이는 바로 조선 초기와 중기의 처가살이 풍습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전기 가족을 언급하면서 이 남귀여가혼 혹은 솔서혼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이 점이 가계 계승이나 제사 봉행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부부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두었을 경우, 구태여 동성(同姓) 양자(養子)를 들여 가계를 계승하지 않고 딸들에게 재산이나 제사를 물려주는 경우가 흔하였다. 이와 같이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제사를 봉행하도록 한 것은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오던 하나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이 비록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건국 이념(建國理念)으로 표방하고 각종 제도와 의례 등을 유교화하려 했지만 가족 제도와 사회 의례 부분에서는 조선 중기까지도 여전히 고려적인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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