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1. 가족 형태와 거주율
  • 조선 전기의 가족
  • 봉사권과 가계 계승권
전경목

그런데 이상과 같이 조선 전기의 가족에 대하여 고찰할 때,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솔서제든 이성 양자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봉사권(奉祀權), 즉 제사를 받들 수 있는 권한이지 가계 계승(家系繼承)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통 시기 일본의 경우처럼 사위나 이성 양자 또는 조카사위가 입양된 후 성을 바꾸어 가계를 계승하는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족 제도 등을 언급할 때 봉사권과 아울러 가계 계승권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점차 동성 양자 입양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입양하려고 하였다. 입양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므로 잠시 미루고, 여기에서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가계 계승권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문서 하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 문서는 김명열(金命說)의 아내 이씨(李氏)가 그녀의 백모(伯母) 조씨(趙氏)에게서 받은 문서인데, 이 문서를 작성한 시기는 1657년(효종 8)이다. 김명열은 앞서 소개한 김경순의 손자이다.

순치(順治) 14년 10월 초2일 시양녀(侍養女)83)이씨를 세 살 이전에 데려다 길렀으므로 법적으로는 시양녀(侍養女)가 아니라 수양녀(收養女)라고 해야 옳다. 김명열의 처 이씨에게 허여(許與)하는 명문(明文)84)『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3쪽, 분재기류 8.

(재산을) 허여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자녀를 낳지 못해서 (우리) 부부가 서로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울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네가 처음 태어나 세 살 이전에 안아서 나의 무릎에 올려놓고 더불어 벗을 삼았는데 사랑하는 정이 매우 깊어서 내 자식과 같았다. 그뿐 아니라 가옹(家翁)이 세상을 떠난 후 3년 거상(居喪)하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이를 (큰 탈 없이) 마쳤고 (그 후)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효성을 지극히 하여 ‘(부모) 살아 계실 때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제사 받드는 일’을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근면하게 하니 (나는 너의) 이러한 뜻에 감탄한다. 그래서 정을 표하고자 하였으나 가옹이 대종(大宗)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인지라 반드시 예조(禮曹)에 청원서를 올려 양자를 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너의 남동생 정아(涏兒)를 이미 양자로 정하고 전민을 나누어 준 후, 나머지인 계집종 명월(明月)의 셋째 소생 사내종 예남(禮男) 나이 22세 병자생(丙子生)…… 다섯째 소생 계집종 계생(季生) 나이 5세, 계사생(癸巳生) 등을 후에 태어날 소생들을 포함하여 허여하니 각별히 애휼(愛恤)하여 오래도록 부리되 만일 다른 족질(族姪) 중에서 잡담을 하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발하여 바로 잡을 일이다.

재주(財主) 고(故) 충의위(忠義衛) 이시춘(李時春) 아내 조씨(趙氏) (인)…

이 문서에 따르면 조씨는 남편인 이시춘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자 남편의 조카딸 이씨를 세 살 이전에 데려다 기르면서 온갖 정이 다 들었다. 그 후 이씨가 자라서 김명열과 혼인하자 역시 조카사위인 김명열과 함께 살았으며, 남편 이시춘이 사망한 후 3년 동안 거상하면서도 이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조씨를 잘 봉양하고 이시춘의 제사를 효성을 다해 받들었다. 그러나 이시춘이 종손(宗孫)이었기 때문에 그 가통을 이어줄 양자를 입양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씨의 남동생인 이정(李涏)을 양자로 삼고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다만 그동안 이씨의 효행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에 남은 재산을 이씨에게 물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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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춘의 처 조씨의 허여 문기
이시춘의 처 조씨의 허여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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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우리는 1564년에 강주보가 슬하에 자녀가 없자 동성의 어린 조카딸을 데려다 살고, 그녀가 혼인하자 새로 맞이한 조카사위에게 재산을 물려준 사례를 살펴보았다. 물론 강주보는 후에 양자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비록 가계를 계승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에 대한 제사는 조카딸과 조카사위가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1657년에 이시춘의 아내 조씨는 역시 남편의 어린 조카딸을 데려다 살고 조카딸이 혼인한 후에는 조카사위와 더불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사후에 별도로 조카딸의 남동생을 동성 양자로 입양시켜 그에게 가계를 계승하도록 하고 제사에 대한 권한도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시대로 계산하면 불과 100년, 세대로 따지면 겨우 3대 사이에 제사 봉행과 가계 계승 및 입양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는 각 문중마다 많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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