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1. 가족 형태와 거주율
  • 조선 후기의 가족
  • 조선 후기에도 지속된 전기 사회의 풍습
전경목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종법이 널리 보급되고 분재(分財) 방식 등이 바뀌어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솔서혼 풍습 등이 곧바로 바뀌거나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도 각자의 형편에 따라 사위를 데리고 사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예를 부안 김씨 김수종(金守宗)을 통해 볼 수 있다. 김수종이 65세 되던 1735년(영조 11)에 부안현에 제출한 호구 단자를 보면 그는 21세인 아들 광국(光國, 후에 방길(邦佶)로 개명)과 38세인 사위 유명(柳溟)과 함께 살고 있었다.87)『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44∼45쪽, 호구 단자 20 참조. 유명은 둘째 사위였는데, 김수종은 이와 같이 말년에 아들,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와는 약간 다르지만 처남(妻男)과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다. 김수종의 증손이며 김기정의 아버지인 김정하(金鼎夏)가 1795년(정조 19)에 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호구 단자에 따르면, 그는 46세로 네 살 어린 아내 평택임씨(平澤林氏)와 23세인 아들 김기정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처남인 임영직(林永直)도 동거하고 있었다.88)『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63쪽, 호구 단자 48 참조. 임영직은 31세로 당시에 영하(永夏)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도 전기의 유제(遺制)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 될 점은, 조선 후기의 호적에 등재된 사 람들이 과연 서로를 가족이라고 여겼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수종은 사위와 함께 살고, 김정하는 처남과 함께 살았는데, 김수종과 김정하가 과연 이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일반적으로 호구 단자와 준호구에는 호수(戶首)와 그 아내(간혹 호수의 어머니)를 빼고는89)조선 후기에는 간혹 호수의 어머니가 기록되는 경우도 있다. 모두 솔거인(率居人)으로 등재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솔거인은 말 그대로 ‘(식구로) 거느리고 있는 사람’일 것이지만 당시에는 직계 가족을 포함하여 혼인 등을 통하여 맺어진 인척(姻戚) 등도 모두 솔거인으로 등재하였다. 따라서 호구 단자 상으로는 직계 가족이거나 혼인을 통한 인척이거나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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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호구 단자 부분
김수종 호구 단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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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호구 단자 부분
김정하 호구 단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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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생각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약간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는 사위나 처남도 가족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나 종법제가 강조되던 조선 후기에는 가족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성을 같이하면서 혈연적으로 상하 또는 좌우로 연결된 일정 범위 내의 구성원만을 지칭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90)인류학에서는 이런 경우 가족(family)과 가구(household)로 구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상복 외, 『문화 인류학 개론』, 한국 문화 인류학회, 참조. 물론 아내나 어머니 또는 할머니와 같이 성은 다르지만 혼인을 통하여 가족 구성원이 되는 여성들의 경우는 예외였지만 말이다. 사위나 처남들은 비록 한 울타리 안에서 동거하고 있었으나 한가족 구성원이 아닌, 동서(同棲) 관계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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