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2. 가계 계승
  • 방앗다리 양자와 파양
  • 방앗다리 양자
전경목

김수종의 입양을 둘러싸고 더욱 재미있는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김번이 김수종을 입양하고 우반동으로 이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인 한양조씨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둘째 부인으로 문화유씨(文化柳氏)를 맞이하였는데,100)첫째 부인 한양조씨가 사망하고 둘째 부인 문화유씨가 들어온 것은 1681년(숙종 7)부터 1684년 사이이다. 1681년에 작성한 준호구에는 부인이 한양조씨로 되어 있으나 3년 후인 1684년에 작성한 준호구에는 부인이 문화유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31∼33쪽, 준호구 5와 7 참조). 그녀는 시집을 오자마자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수창(守昌)과 수경(守經)이 그들이다. 또 후에 어느 첩(妾)의 소생인지 알 수 없으나 서자 수현(守賢)도 출생하였다.

그동안 적자를 얻지 못하여 애태우다가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김수종을 입양하였던 김번은 갑자기 처와 첩이 잇따라 아들을 낳자 기쁘기 한량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고민거리가 생겼다. 우선 가통을 잇고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급하여 망제(亡弟)의 외아들인 김수종을 입양시키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혼자서 옛 집에서 적적하게 사는 제수 이씨를 생각하면 가슴이 몹시 아팠다. 갑자기 사망한 동생의 얼굴도 종종 떠오르곤 하였다. 지금은 다행히 제수 이씨가 생존해 있어서 그나마 동생의 기일(忌日)마다 제사를 지내 주지만, 하루 빨리 누군가를 입양시켜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아울러 그 양아들로 하여금 홀로 지내는 제수를 봉양하도록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큰 고민거리는 자기가 낳은, 그래서 자기의 피를 이어받은 적자가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수종에게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종을 파양(罷養)하여 동생의 집으로 돌려보내자니 그것도 할 일이 못되었다. 자기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는 망제의 외아들을, 그것도 갑자기 홀로 된 제수에게 빼앗아 오듯이 입양해 놓고서 후에 자기의 아들들이 태어났다고 해서 이미 입양한 조카를 헌신짝 버리듯 파양해서 본가로 돌려보낸다면 여러 친족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김번이 이 당시 겪었을 복잡한 심사는 그가 1688년(숙종 14) 3월 7일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다음과 같은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무진년 3월 초7일 후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작성한 문서(傳後區處文書)101)『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13쪽, 분재기 29.

이 문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여러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몸인데 나이가 사십이 다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망제의 외아들인 수종을 예조에 글을 올려 (국왕의 허락을 받고) 양자로 삼아 종통(宗統)을 계승토록 하였다.

그 후 불행하게 처를 잃어 다시 장가를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이어 아들이 태어났다. 마땅히 나의 친아들에게 종통을 전해 주어야 하나 이미 (국왕의 허락을 받아) 수종을 양자로 세웠으니 수종을 장자로 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망제는 (양자로 들여온 수종 이외에는) 다른 자녀가 없어서 (그의)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으니 사정이 (몹시) 딱하다. 그래서 나의 아들 수창(守昌)을 망제의 양자로 삼도록 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이 문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그는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다가 결국 국왕의 허가까지 받은 양자 수종을 장자로 삼아 가통을 계승토록 하고, 대신 자신의 핏줄을 이은 수창을 망제에게 입양시켜 그의 제사를 받들고 또 홀로 된 제수를 봉양하도록 하였다. 김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에 맞고 또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아들을 서로 바꾸어 양자 삼는 것을 속칭 ‘방앗다리 양자’라고 하였다. 즉 양자를 들인 집에서 후에 아들을 낳고 양자를 준 집에서는 나중에 아들이 모두 요절하여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인 집에 서 나중에 낳은 아들을 양자로 주었는데 이러한 일은 비록 흔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물론 김수종의 경우는 처음부터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약간 다르지만 역시 양자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방앗다리 양자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에 가계 계승의 큰 부담 때문에 부부들이 늙어서 아이를 낳지 못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서 입양을 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기이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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