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3. 가계의 운영
  • 조선 전기
  • 축보작답(築堡作畓)과 호노(戶奴)를 통한 농장 경영
전경목

우반동의 부안 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재산 증식에 유난히 큰 관심과 열 정을 보인 인물이 눈에 띤다. 바로 김개(金漑)와 그의 아들 김경순(金景順) 등이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관으로 화려하게 벼슬살이를 한 김석필과 달리, 그의 아들 김개나 손자 김경순은 비록 한때 참봉(參奉)과 부장(部將)이라는 하위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약 때문에 관직 생활에는 그다지 마음을 쓰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낙향(落鄕)해서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개는 관직을 그만둔 후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도 부안현으로 귀향하지 않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임실현(任實縣)으로 낙향하였다. 그가 왜 임실현으로 낙향하였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손자 김홍원(金弘遠)이 1634년(인조 12)에 전라도 겸순찰사(兼巡察使)에게 제출한 다음 청원서에 잘 드러나 있다.

부안에 사는 전부사(前府使) 김홍원이 아룁니다.106)『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94쪽, 소지 4.

제가 이와 같이 탄원서를 올리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의 조부가 살아 계실 때 □□현(縣) 말목(馬項)과 걸명(傑明)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기와집을 지어 여러 해 동안 살았습니다. 그곳에 묵은 땅(陳田)이 있었는데 가히 100여 가마(石)를 파종해도 될 만큼 넓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조부께서는) 둑(堡)을 막고 관개(灌漑)를 할 계획으로 먼저 땅을 개간하여 경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땅을 방치하고 돌보지 않아서 선조께서 물려주신 토지가 오랜 기간 동안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이는 매우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 옛 터를 일구어 전답을 개간하려고 하나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어 새로 개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들게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방치해 둘 수도 없어서) 위 말목과 걸명의 묵은 땅에 둑을 막고 개간을 하고자 하오니 다시 입안(立案)을 발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처분) 옛 일을 잘 아는 노인과 담당자를 불러 사실을 조사하라. (만일) 주인 없이 오래 묵혀 둔 땅이라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에는 예(例)에 따라 입안해 주라. (그렇게 하여) 그가 경작료를 거두어들이고 땅을 갈아먹을 수 있도록 해 줄 일이다. 임실(任實)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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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원 청원서
김홍원 청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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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탄원서에서 김홍원은 자기 조부가 말목과 걸명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기와집을 지어 여러 해 동안 살았다고 하였다. 김개가 말목이나 걸명에 터를 잡은 이유는 그곳에 있는 묵은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땅은 자그마치 벼를 100여 가마나 파종해도 될 만큼 드넓은 땅이었는데, 단순히 이 땅을 개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둑을 막아서 관개 농업을 하려고 하였다(築堡灌漑)는 것이었다. 또 잠시 머물기 위해서 이곳에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눌러 살 생각으로 좋은 터를 물색(卜居)하고서 많은 돈을 들여 기와집을 지었다(創立瓦家)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탄원서에는 말목과 걸명이 어느 고을에 있는지 밝혀져 있지 않는데, 그것은 원래 김홍원이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존 과정에서 해당 부분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서의 끝부분을 보면, 관찰사가 “옛 일을 잘 아는 노인과 담당자를 불러 조사한 후 주인 없이 오래 묵혀 둔 땅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입안해 주라.”는 취지의 처분을 내리고서 이를 임실현감에게 시행토록 지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말목과 걸명이 임실현 내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곳은 현재 섬진강(蟾津江) 상류 지역으로 추정된다. 강의 상류 지역은 물살이 세지 않아 보를 쌓기가 비교 적 쉬울 뿐만 아니라 여러 여건이 논농사를 짓기에 충분하였다.

김개가 살았던 바로 이 시기에 강의 상류에 보(堡)를 막아 관개 농사를 짓는 농법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점차 이를 실시하는 지역이 지방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중이었다. 김개가 벼슬을 그만두고 임실로 낙향한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강의 상류 지역에 보를 쌓고 농지를 개간하여 관개 농사를 지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를 쌓는 기술을 터득하고 관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익힌 후 이를 시행하기 적합한 섬진강 상류의 말목과 걸명에 ‘복거(卜居)’하고서 ‘창립와가(創立瓦家)’를 하여 자손 대대로 이곳에 눌러 살 계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개와 그의 아들 김경순은 단지 말목과 걸명에서만 ‘축보작답(築堡作畓)’, 즉 보를 쌓고 농지를 개간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림평(照林坪)이라는 곳에서도 축보작답을 하여 농장을 이루었는데, 이 농장에 관해서는 다음의 탄원서에 자세히 나온다. 이 탄원서를 제출한 사람은 김홍원의 호노(戶奴) 군석(君石)으로, 탄원서를 제출한 시기는 1613년(광해군 5) 정월이다.

전(前) 목사(牧使) 김홍원의 호노 군석이 아룁니다.107)『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93∼94쪽, 소지 3.

이와 같이 탄원서를 올리는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의 상전(上典)의 선조께서 이 고을의 조림평으로 와서 살면서 (한편으로는) 둑을 막고 논을 만들었으며(築堡作畓)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주고 밭을 사들여 오랜 기간 동안 농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의 상전께서는 이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경작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倭兵)이 이 고을에 이르자 상전께서는 부안의 본가(本家)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난후(亂後)에 농장을 관리하던 노비들이 침탈을 당하여 각지로 흩어지자 이웃 점촌(店村)에 거주하던 신중부(申仲夫), 정인(鄭仁), 박대명(朴大命), 임수번(林守番) 등이 땅을 빌려 경작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에 아뢰어 다짐을 받고 임시로 차경(借耕)토록 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토지 대장을 작성할 때 (이들 전답을) 차경인(借耕人)의 이름으로 등록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전해 오던 (우리 상전의) 전답을 (차경인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훗날 모점(冒占)하려는 폐단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위 전답을 저의 이름으로 양안에 등록해 주시고 차경인들이 오랫동안 차경한 연유를 자세히 기록한 다짐을 받아주셔서 훗날 참고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만력 41년 정월 일 소지

(처분) 추문(推問)하기 위해 탄원서에 기록된 차경인들을 잡아올 것.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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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원의 호노 군석의 탄원서
김홍원의 호노 군석의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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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탄원서에서 군석은 상전인 김홍원의 선조가 조림평에 와서 살면서 둑을 막고 논을 만드는 한편 돈을 주고 밭을 사들여 농장을 만들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병들이 이 고을에 들어 닥치자 상전은 부안의 본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농장을 관리하던 노비들이 흩어져서 밭이 묵게 되자 이웃 점촌에 살던 사람들이 관에 다짐을 제출하고서 이 농장의 땅을 차경하였는데 이번의 토지 조사 사업 때, 농장의 토지들이 차경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훗날 말썽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고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조림평의 농장도 어느 고을에 있었는지는 이 탄원서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서를 살펴보면 전라도 용담현(龍潭縣)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림평이라는 지명이 해당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사무소와 조림 초등학교가 있던 지역이 조림평으로 불리던 곳인데, 최근에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모두 수몰되었다. 이곳은 금강(錦江)의 상류 지역으로 축보작답을 하여 관개 농업을 하기에는 최적지였다.

김홍원이 이 농장을 선조에게 물려받은 것은 1591년(선조 24)의 일이다. 그가 이 농장을 물려받게 된 과정은 아버지 김경순이 작성해 준 다음의 별급 문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농장에 대한 관리 방식이다. 우선 별급 문기를 살펴보자.

만력 19년 신묘(辛卯) 10월 5일 장자 진사 홍원에게 별급하면서 작성한 명문108)『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5쪽, 분재문기류 17.

이 명문을 작성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늘그막에 너를 낳아 날마다 (어서 빨리) 장성하기만을 바랐는데 너는 입학하던 초기부터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네 나이 18세에 드디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는) 쇠잔(衰殘)한 우리 가문의 큰 경사로 늙은 이 아비의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다.

네가 집으로 돌아오던 날에 나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몇 명의 노비를 특별히 주셨으며 너의 아비인 나도 (도문연(到門宴)을 여는) 경사스러운 잔칫날에 너에게 특별히 재산을 주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집안에 병환이 잇따라 생겨 연회를 끝내 열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럽고 또 통탄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번에 (또) 별시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으니 사랑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용담의 전장(田庄)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진황지(陳荒地)가 되어 버렸으니 심히 애석하다. 이 전장의 갈아먹는 논 5석락지(石落只)와 묵은 논 6석락지, 갈아먹는 콩밭 3석락지, 묵은 콩밭 5∼6석락지 등을 (너에게) 영영 별급하며 지금 거주하는 용담의 사내종 홍세(洪世)의 양처병산(良妻幷産) 1소생 사내종 우세(右世) 34세 무오생(戊午生), 같은 사내종의 양처병산 1소생 계집종 만화(萬化) 나이 16세 병자생(丙子生) 등 두 명을 뒷날 낳을 자식들과 함께 모두 영영 별급하니 이를 잃어버리지 말고 사내종 우세로 하여금 전답을 차지해서 갈아먹게 하여 늙은 아비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면 좋겠다.

재주 부(父) 전부장(前部長) 김경순(수결)

필집(筆執) 처동생남        강응구(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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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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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김경순은 늦게 낳은 김홍원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자 매우 기뻐하였으나 집안에 병환이 잇따라 발생하여 도문연을 열어 주지 못하자 못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원이 연이어서 문과 초시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자 김경순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김경순은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용담에 있는 농장을 그에게 별 급해 주었다. 이 농장은 김경순이 용담현의 조림평에 가서 직접 보를 막아 묵은 땅을 개간하고 타인에게서 밭을 구입하여 만든 것이었다.109)이때 김경순이 구입한 용담현 조림평의 토지 매득 문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174쪽, 토지문기류 1 참조. 그러나 그 이후 그가 돌아가서 머물던 부안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관리가 여의치 못하여 농장이 거의 진황지와 같이 되어 버렸다. 김경순은 이 농장과 그곳에 살던 노비를 김홍원에게 물려주고서 사내 종 우세를 시켜 농장을 관리토록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우세 같은 노비들을 조선시대에는 ‘호노(戶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일반 노비와 달랐다. 이들은 일종의 집사노(執事奴)로 그 집안의 농사와 재정 관리, 소송과 편지 전달 등과 같은 그 집안의 모든 일을 총괄하였고, 그 때문에 상전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110)조선시대의 노비 중에 호노의 역할이나 지위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목해야 하나 아직 이와 관련된 연구 성과가 전무한 형편이다. 호노와 관련된 자료로는 윤선도(尹善道)의 『고산유고(孤山遺稿)』 중 ‘기대아서(寄大兒書)’가 비록 짧지만 참고할 만하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 或有大運力外 其他細小雜役 及尋常使喚等事 只任家內奴婢 勿使戶奴 使其優游 而自盡於力本有生之樂 洞人尤不可種種使之 如此等事 須留念察之 忍耐過了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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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별급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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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원은 부친의 당부를 좆아 직접 용담현의 조림평으로 와서 이곳에 한동안 머물며 우세를 통해 농장을 관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용담현으로 밀려들어 오자 그는 난을 피하여 고향인 부안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임실현에 들러 그곳에 계시던 조부를 모시고 부안으로 피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이 끝난 후 그는 용담현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대신 호노 군석을 통하여 이 농장을 관리하였다.111)호노가 우세에서 군석으로 바뀐 이유는 군석의 탄원서에 따르면, 용담에 있던 노비들이 임진왜란 도중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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