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3. 가계의 운영
  • 조선 후기
  • 장자 중심의 재산 상속
전경목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이 주을래리와 우반동에 있던 많은 토지를 매입해서 농장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재산을 크게 증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 전기처럼 부모의 유산을 자녀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다 보면 자손들은 금세 영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손들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재산은 크게 증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조선 전기와 같이 아들과 딸 구분 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줄 경우, 자손들은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곧바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가 되면서 각 가문마다 재산을 흩뜨리지 않고 집적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은 우선 딸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을 남자 형제 몫의 3분의 1만 받도록 하였다. 딸은 출가한 후에는 시댁 식구를 부양하느라 친정 부모를 돌볼 수 없었으며, 또 친정 부모가 사망 후에는 이들의 제사를 받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 봉양하고 사후에 제사를 돌려 가며 지내는 남자 형제들과 유산을 동등하게 분배받는 것은 결코 타당한 조처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와 같이 출가한 딸에게 물려주는 부모의 유산을 삭감하자는 주장은 당시에 널리 보급되던 종법이나 예학(禮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부안 김씨 가문에서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김명열이다. 그는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노봉 (老峰) 민정중(閔鼎重)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김명열이 이와 같이 예학에 밝았던 학자들과 교유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그 또한 예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당시에 점차 보급되던 예학과 종법을 수용하여 자기 집안의 가례(家禮)와 분재 관행 등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놓고 아우 김용열(金用說), 김유열(金惟說) 등과 상의한 후 이러한 취지를 아버지 김홍원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이와 같이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시킨 이유는 재산 분배나 제사 봉행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김명열이 이러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준 것은 1669년(현종 10) 11월인데 우선 이 문서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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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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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己酉年) 11월 11일 후손들에게 전하는 문서(傳後文書)116)『우반 김씨 고문서』, 224쪽, 분재기 33.

종가에서 제사를 받드는 법은 예문(禮文)에 소상히 밝혀져 있듯이 매우 중하고 또 엄하다. 그래서 봉사전민(奉祀田民)을 많이 마련하여 전적으로 종가에서만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고 여러 아들(衆子)은 제사를 번갈아 가며 지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종가의 법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예법을 안다고 하는) 사대부 집안에서조차 여러 아들에게 (제사를) 윤행(輪行)시키는 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되어버렸다. 실정이 그러하니 이를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딸들은 출가한 이후에는 곧바로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되어 버리니 그 지아비를 따르는 도리(義)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 에 성인들이 예법을 만들면서 출가한 딸은 한 등급 낮추었으며 정(情)과 도리 모두를 가볍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사대부 집안에서 제사를 사위에게 돌려가며 지내도록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내가 일찍이 살펴보니, 다른 집안의 사위와 외손들이 (제사를) 서로 미루다가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또 비록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예(禮)를 정성과 경외(敬畏)의 마음 없이 행하니 (그렇게 제사를 받들 바에야)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일찍이 이 일을 아버지께 아뢰어 정하고 또 우리 형제들이 충분히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제사를 결단코 사위나 외손의 집에 윤행시키지 마라. 그리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대대로 준행(遵行)토록 하라.

아비와 자식 사이의 정리(情理)라는 면에서 본다면 아들과 딸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딸들은 출가하여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 생전에 봉양할 방법이 없고 (또) 사후에 제사의 예마저 차리지 않는데 어찌 유독 재산만은 (제사를 지내는) 남자 형제와 균등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딸들은 (이제부터 남자 형제들이 물려받는) 재산의 3분의 1만 나누어 갖도록 해라. 정이나 도리라는 면에서 따져 보아도 (이렇게 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다. (그러므로) 딸들과 외손들이 어찌 감히 (유산을) 더 받으려고 서로 다투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느냐.

이 글을 보고 나의 뜻을 잘 헤아려 본다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이니 (나의 자손 중에) 그 누가 (이러한 분배 방식이) 상례(常例)와 다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인가. 본종(本宗)의 자손이 가난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 만일 이 결정을 어기고 (사위나 외손에게 제사를) 윤행하게 한다면 어찌 나에게 자손이 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겠는가.

자필 통훈대부행평산도호부사(通訓大夫行平山都護府使) 명열(수결)

선교랑(宣敎郞) 용열 (수결)

통덕랑(通德郞) 유열 (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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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전후 문서(己酉年傳後文書)
기유년 전후 문서(己酉年傳後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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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이 딸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을 줄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재산을 분배 받을 남자의 수는 늘어만 가는 데 비하여 이들에게 나누어 줄 재산을 크게 증식시킬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남자 형제들끼리 부모의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고 하더라도, 재산이 크게 증식되지 않으면, 겨우 몇 세대 지나지 않아 모든 형제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남자 형제 중에서도 장자에게 유산 대부분을 물려주고 조상의 제사를 전담하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그 중에는 장자 독점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재산 대부분을 장자에게 물려주는 방안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상제위전민조(祖上祭位田民條)’라는 이름 아래 그 집안 재산의 대부분을 여 기에 속하도록 한 후, 이를 종손 또는 장자에게만 물려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모든 자손이 다 함께 영세하게 되도록 방치하여 가정이나 가문의 위세가 크게 기울어지는 것보다는 종손이나 장자만이라도 유산을 물려받아 양반으로서의 지체와 위신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부모의 유산 대부분을 장자에게 물려주는 재산 분배의 구체적인 모습을 우반동의 부안 김씨 문서를 통해서 살펴보자. 다음 문서는 1799년(정조 23) 5월에 김정하(金鼎夏)의 아내 평택임씨(平澤林氏)가 네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그녀가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분재를 서두른 이유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장차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미(己未) 5월 초3일 네 아들에게 재산을 분급하고 작성한 문서117)『우반 김씨 고문서』, 224∼225쪽, 분재기 34.

문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불행하게 가옹(家翁, 남편)이 작년에 (느닷없이) 별세해서 약간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였다. 마땅히 삼년상을 치룬 후에 (재산을 나누어 주고) 문서를 작성해야 하나 내가 (건강이 갑자기 좋지 않으니) 사람 일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연상(練祥)을 지낸 후에 (서둘러서) 이와 같이 재산을 나누어 준다.

시집의 유훈(舅家遺訓) 중에 선대의 승중전민(承重田民)은 오로지 종손에게만 물려주라는 취지로 재삼 강조되어 왔으니 한결같이 선조의 유훈(先訓)과 가옹이 살아 있을 때의 지시에 따라 가옹의 여러 종친(宗親)과 상의하여 (재산을) 나누어 준다. 다만 전래되어 오던 전장(田庄) 4섬지기와 우반동의 집터를 팔아서 산 논 4섬지기는 승중조(承重條)와 관련이 있으(니 별도로 승중조로 포함시키)며 그 나머지 가옹 자신이 매득한 전답은 4남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승중답(承重畓) 중 작(作) 자 5마지기는 가옹의 말대로 내가 죽기 전까지 세를 받아 사적으로 사용하다가 장차 (내가 사망한 후 에는) 종가로 반환하고, 큰며느리에게 별급한 궐(闕) 자 답 12마지기는 가옹의 초상(初喪)이 났을 때 (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방매(放賣)한 전답에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대신 염(念) 자 답 9마지기 소경(所耕) 22복(卜) 5속(束) 곳을 지급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4남매에게 몫을 나누어 주면서 장남에게 정(正) 자 답 6마지기를 보태어 준 것은 (그 토지가) 그의 외가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118)장남 김기정은 김정하의 첫째 부인인 연안김씨(延安金氏) 소생으로 추정된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승중전민은 전적으로 가법(家法)에 따라 대대로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말도록 하라. ……

재주                          과(寡) 임씨

시집의 문장(舅家門長) 유학(幼學)   김방철(金邦哲) (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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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임씨 분재기 부분
평택임씨 분재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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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 등장하는 유산 목록과 지시 내용은 대단히 어렵고 번잡한 느낌을 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승중전민, 전래되어 오던 전장, 우반동 집터를 팔아서 산 논, 가옹 자신이 매득한 전답 등이 언급되고, 또 선조의 유언으로 시집의 유훈, 선조의 유훈, 가옹이 살아 있을 때의 지시 등이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유산 목록의 핵심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당대에 새로 증식시킨 재산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고, 시댁의 유훈이나 남편이 살아 있을 때의 지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의 항목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승중전민조(承重田民條)에 포함시켜 종손에게 넘겨주고 당대에 매득하였던 재산은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표> 평택임씨가 네 아들에게 분배한 재산 내용
구분 승중전민조 각 깃(各衿) 합계
노비 전답 노비 전답 노비 전답
종손 37명 밭 15마지기, 솔밭,
논 171마지기
    37명 밭 15마지기, 솔밭,
논 171마지기
장남
기정(基正)
    2명 논 69마지기 2명 논 69마지기
차남
기덕(基德)
    1명 논 40.5마지기 1명 논 40.5마지기
삼남
필흥(弼興)
    2명 밭 4마지기,
논 55마지기
2명 밭 4마지기,
논 55마지기
사남
말흥(末興)
    2명 밭 4마지기,
논 55마지기
2명 밭 4마지기,
논 55마지기
총계 37명   7명 밭 8마지기,
논 219.5마지기
44명 밭 23마지기, 솔밭,
논 390.5마지기

재주인 평택임씨는 이러한 유훈과 지시를 충실히 따라서 선대에 마련하였던 유산은 모두 승중전민조로 만들어 종손에게 물려주고 남편이 매득하였던 토지와 노비만을 여러 자녀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다. 다만 이때의 분배에서 제외한 재산, 즉 자신이나 장자 및 큰며느리에게 특별히 지급한 재산에 대해서는 분재에서 제외시킨 이유를 명확히 밝혀 분쟁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평택 임씨는 이렇게 하고서도 혹시 뒷날 후손들 간에 말썽이 일지 않을까 염려하여 재산을 분배할 때 문장을 입회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때 분재한 내용은 표 ‘평택임씨가 네 아들에게 분배한 재산 내용’과 같은데, 이를 통해서 종손과 차손(次孫)들이 유산을 어떻게 분배받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비록 남편이 매득한 재산을 아들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였다 하더라도 종손에게만 물려주는 승중전민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종손과 차남 이하의 형제들이 받았던 재산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119)표 ‘평택임씨가 네 아들에게 분배한 재산 내용’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분재의 내용상 상당한 차이가 있다. 평택 임씨가 분재기에서 남편이 생전에 매득한 토지와 노비를 네 아들에게 ‘평균 분급’한다고 말하였지만, 특히 장자는 밭을 받지 않은 대신 논을 다른 형제에 비해 많이 받았으나 차남은 계집종과 밭을 받지 않았음에도 논조차 다른 형제에 비해 적게 받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분재기에 기재된 유산은 모두 노비 44명, 전답 413.5마지기, 그리고 약간의 솔밭(松田)이 있었다. 이 가운데 종손이자 장자인 김기정은 승중전민을 포함해서 노비 39명, 전답 약 255마지기를 받았다. 이를 비율로 환산해 보면 전체 노비의 89%, 토지의 62%에 해당하였다. 차자 이하 세 형제는 나머지인 노비 5명, 전답 158.5마지기를 나누어 가졌는데, 각자 받은 몫을 계산하면 겨우 노비 2명, 밭 4마지기, 논 55마지기에 불과하였다. 더군다나 분재기 서문에서 승중조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던 “전래되어 오던 전장 4섬지기와 우반동의 집터를 팔아서 산 논 4섬지기”가 실제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는 웬일인지 누락되어 있는데 만일 이 8섬지기를 승중조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장자와 차자 이하가 소유하게 되는 유산의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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